나는 고백한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9
자우메 카브레 지음, 권가람 옮김 / 민음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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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발카르카의 비에 젖은 거리를 걸으며 비로소 나는 내 가족 중 한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실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권 p.11)


'현존하는 최고의 카탈루냐 작가, 자우메 카브레'(Jaume Cabré 1947~)가 2011년 발표한 <나는 고백한다>(Jo Confesso)의 첫 문장은 이렇게 의미심장하게 시작한다. 

비 내리는 거리를 걸으며 집으로 가는 길에 삶의 중요한 무언가를 깨닫는 62세의 아드리아 아르데볼.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은 그는 자신의 기억이 사라지기 전 자신의 삶을 기록으로 남긴다. 이 소설은 평생을 사랑한 한 여인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자신의 내밀한 고백이다. 


골동품 상점을 운영하며 물건을 사고 파는 일에만 집중하는 아버지와 말이 없는 차가운 어머니 밑에서 외로운 유년을 보내던 아드리아는 아버지의 금고 속에 있는 바이올린 '비알'에 관심을 가진다.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 후, 열세 개의 언어를 구사하는 대학자가 되어 학문적으로 명성을 얻지만 사랑하는 연인 사라와의 만남과 이별을 겪으며 삶의 행복과 괴로움을 겪기도 한다. 

그러던 중 바이올린 '비알'에 얽힌 역사와 비밀이 서서히 밝혀지면서 아드리아는 아버지가 병적으로 집착한 수집욕이 과거의 끔찍한 범죄와 연루되어 있음을 알게 되고, '비알'에 얽힌 역사를 추적해 나간다. 이 소설은 바로 이 '비알'이라는 이름을 가진 바이올린을 중심으로 벌어진 사건과 그에 얽힌 여러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600년이라는 시간을 넘나들며 인간에 의해 자행된 '악'을 여러 형태로 보여주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중세 스페인의 종교 재판과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다. 14세기의 기독교만이 절대 진리라는 믿음이 20세기에는 아리아인만이 위대한 인종이라는 믿음으로 다시 나타났듯이 악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계속 나타남을 작가는 보여준다. '악'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중세 종교 재판이나 나치의 잔악무도한 범죄처럼 인간들의 실질적인 행위 속에서 발현되었고,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평범한 인간들의 일상 속에도 악은 도사리고 있음을 소설은 여러 인물들을 통해 보여준다. 

14세기 종교의 얼굴로 나타난 악이 20세기 인종주의의 얼굴로 나타났듯이 악은 그 모습을 조금씩 바꾸며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소설 속 드라고 그라드니크 수사는 캐속을 벗어버리고 소총을 들고 직접 악과 싸우기로 결심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런 악의 속성, 악은 바로 '인간에 의존'한다는 악의 본질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드리아는 축적된 악의 역사가 자신의 삶을 흔들고 있음을 느끼고 '악이란 무엇인가' 고민한다. 


[악이 머무는 곳을 찾고 싶었으며, 그것은 어느 한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또한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러 사람의 마음속에 있을까? 악이란 왜곡된 인간 의지의 결과물일까? (...) 악이란 악마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신이 존재한다면 악으로 인해 빚어진 결과 앞에서 냉담한 그의 태도는 논란이 될 만하다. 신학자들은 어떠한 의견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을 더욱 아름다운 말로 치장할수록 본질적으로 한계에 부딪치고 만다. (3권 p.327)]


아드리아의 고민처럼 악이란 한마디로 정의내리기 어렵다. 악은 다양한 인간의 여러 행동들을 통해서 드러나고 인간은 이런 악으로부터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600년전의 악이 20세기의 아드리아의 삶에 영향을 미친 것처럼 악은 쌓이고 쌓여서 어떻게든 그 모습을 드러낸다. 


[최초의 모래 알갱이는 눈을 간지럽힌다. 그리고 손의 가시가 되더니 뱃속에서 불덩이로 변하고, 호주머니에서 걸리적 거리기까지 하다가 좀 더 나쁜 운과 만나 양심의 가책에 무게를 더한다. 모든 것, 그러니까 모든 삶과 이야기는, 사랑하는 사라, 이처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무해한 모래 알갱이로부터 시작되는 거였어. (2권 p.123)]



묵직한 주제와 독특한 서사 기법이 인상적인 <나는 고백한다>는 작가가 소설 속에서 아드리아의 입을 빌려 말하듯이 '살아있는 경험의 진실'(2권 p.343)로 쓴 훌륭한 문학이다. '악'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관념적, 학술적으로 풀어낸 것이 아닌 문학이라는 예술적 상상을 동원해 구체적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예술적 아름다움을 맛보고 난 후의 삶은 예전과 달라"(2권 p.309)라고 말한 아드리아의 말처럼 독자에게 큰 감동을 준다.


대단한 소설이다. 구체적 사건과 인물을 통해 보여주는 '악의 보편성과 구체성', 그 '악'을 예술은 어떻게 보여줘야 하는지에 대한 사유, 서사와 구성의 독창성 등 자우메 카브레라는 작가는 어쩜 소설을 이렇게 입체적으로 쓸 수 있을까, 읽으면서 얼마나 감탄을 했는지 모른다. 천 피스짜리 직소 퍼즐을 맞추는 기분이랄까... 빨리 퍼즐을 맞추고 싶어 안달이 나면서도 퍼즐이 하나하나 맞춰질 때마다 느껴지는 그 짜릿함은 이 소설의 굉장한 매력이다. 


처음에는 서사기법이 너무 자유분방해 한 100페이지까지는 책을 뒤적이며 얼마나 헤맸는지 모른다. 현실에서 갑자기 14세기로 갔다가 18세기, 20세기, 현재를 종횡무진 왔다 갔다 하는데, 문장 줄이 바뀌지도 않고 갑자기 시간과 시점이 바뀐다. 1인칭 화자가 나와 독백을 하다가 갑자기 3인칭 화자가 등장하여 전체적 상황을 설명하고, 한 문단 심지어 한 문장 안에 다른 시공간과 시점이 섞여 있어서 처음엔 '이게 뭐지?' 당황했다. 그러나 뭐든지 자꾸 읽고 들으면 이해되고 들리듯이 이 소설의 구성과 서사에 익숙해졌고 즐거움은 배가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놀라운 소설이고, 읽으면 반드시 큰 보람과 뿌듯함을 안겨 줄 소설이다. 


부실한 글을 마치려고 하는데 이 문장이 눈에 들어와 한 마디 더 하려고 한다. 


["악이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다면 인류는 끝장난 거야." (3권 p.35)]


그래, 악은 반드시 대가를 치뤄야 하는데 무엇으로 치뤄야 하는가...이미 피해자가 겪은 고통과 죽음은 되돌릴 수 없는데 말이다. 소설 속 부덴 박사처럼 '악을 어떻게 바로 잡을지 생각해 보'는 수밖엔 없는가. 그저 속죄하고 또 속죄하는 수밖에는 없는가. 그러나 분명한 건 소설 속 고해 신부의 말처럼 천국에 그를 위한 자리는 없다는 것이다. 용서란 있을 수 없다. 그렇지만 인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악은 계속될 것이다. 악은 인간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늘 있어 왔고 그것이 악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악...이 소설이 미완성으로 끝난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인간은 누구나 "Jo Confesso"를 마음속으로 되뇌면서 살아야 한다. 누구나 자기도 모르게 악을 실행할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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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02-06 11:1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세 권의 시리즈네요.
천국과 지옥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악‘때문이지요.

coolcat329 2022-02-06 13:44   좋아요 5 | URL
천 페이지가 넘는 대작인데 미완성으로 끝납니다. ‘악‘이라는게 그만큼 끝도 없이 되풀이된다는 뜻 아닐까 싶어요.

새파랑 2022-02-06 11:2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다 읽으셨군요~! 이 책 다 좋다고 하셔서 저도 읽으려고 사놓았는데 어렵다고 하셔서 쉽게 접근을 못하고 있습니다 😅 몇일동안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 10일은 잡아야 할까요?

coolcat329 2022-02-06 13:47   좋아요 5 | URL
아...저는 1월에 개인적으로 일이 많아서 1권을 읽다 다시 처음부터 읽기를 여러 번 반복해서 다 읽는데 열흘도 넘었습니다.ㅠㅠ
저를 기준으로 삼으시면 안되구요 ㅎㅎ
새파랑님은 버지니아 울프도 여러 권 읽으셨잖아요. 제 생각엔 포크너나 울프보다 쉬울 거 같아요. 새파랑님은 일주일 안에 다 읽으실 거 같은데요. 😚

청아 2022-02-06 11:33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3권짜리라 계속 미뤄두고 있었는데 빨리 읽고 싶어지는 리뷰네요! 모르고 악을 행할 수 있다는 점도 무서운듯 해요😳

coolcat329 2022-02-06 13:50   좋아요 6 | URL
그쵸? 세 권짜리는 선뜻 손이 가질 않아요. 이 책 워낙 기대를 했기에 저도 올해를 시작하며 읽은건데 이렇게 묵직하면서도 입체적인 소설은 처음인거 같아요. 후회 안 하실 거에요.^^

scott 2022-02-15 22:28   좋아요 2 | URL
미미님 이 책 첫 장 읽자 마자 빛의 속도로 완독 하실겁니다 ^ㅅ^

청아 2022-02-15 22:37   좋아요 2 | URL
앗! 스콧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여름 오기전에 도전하겠습니다ㅎㅎ🤭

페넬로페 2022-02-06 15:4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같은 책을 읽으며 같은 경험을 한 것이 참 신기해요. 저도 이 책 읽으며 쿨캣님과 비슷한 경험과 과정을 거친 것 같아요.
너무 방대한 내용이라 리뷰대신 백자평으로 대신했는데 이렇게도 알차고 훌륭한 리뷰를 쓰신 쿨캣님, 대단하세요^^
수고 많으셨어요^^
언젠가 다시 읽어야 할 책 중, 하나입니다~~

coolcat329 2022-02-06 18:55   좋아요 5 | URL
와~저와 비슷하셨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
저도 다 읽고 어떻게 써야 하나 막막했는데 작품해설이 도움이 됐습니다. 1권 반 정도 다시 읽었는데 더 재밌더라구요~두 번 읽으면 더 좋은 책입니다.

얄라알라 2022-02-06 16:1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2021년 북플에서 뜨거운 찬사 올라왔던 걸 기억하는데, 다시 2022 coolcat님께서도 소개해주시네요. 100페이지까지 왔다갔다 페이지 사이를 오가며 읽으셔서 100페이지까지가 유독 손 떄 탄 책으로 인증될 지 모르겠네요^^

coolcat329 2022-02-06 18:57   좋아요 3 | URL
하도 여기저기 많이 뒤적거리며 펼쳐봐서 책이 새 책 같지가 않습니다. ㅎㅎ
이 책은 꼭 내용 정리를 해가며 읽으시길 추천합니다.

레삭매냐 2022-02-07 10: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언능 읽어야 하는데...
1권 수배해서 읽다가 한눈 팔고
있네요 아주 씨게.

coolcat329 2022-02-07 11:20   좋아요 2 | URL
아 1권 읽으시다가 루이스 사폰으로 가신 거군요 ㅋㅋ
저는 레삭매냐님의 그런 모습이 참 재미있고 뭐랄까 활력이 느껴져 좋습니다. 😆

물감 2022-02-11 07: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그렇게나 좋담서요? 다들 만점주시네요, 궁금하게요ㅎㅎ근데 분량의 압박이...

coolcat329 2022-02-11 11:06   좋아요 3 | URL
만점을 안 줄 수가 없는 책이에요. ㅎ 세 권이라 부담이 가지만 좋은 책이니 올 초에 집어 들었습니다. 물감님도 꼭 읽어 보시길요~😊

scott 2022-02-15 22: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2권으로 넘어 가면 속도가 붙고
3권을 시작하면
완독후에 아쉬워서 1-2-3권 앞 뒤 뒤적이게 됩니다 !ㅎㅎ
민음이 이 책에 오타가 안나와서 신기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