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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고독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1999년 10월
평점 :
내 책장에 가장 오래 꽂혀 있던 책, <백년의 고독>을 드디어 읽었다!
워낙에 읽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겁을 집어먹고 있었는데, 막상 읽어보니 '이 책은 체력과의 싸움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이 책은 재미있다. 그러나 책을 펼치자 마자 이야기가 봇물처럼 터져나와 쉴 틈이 없다. 몸이 피곤한데 귀에다 대고 계속 누군가가 옆에서 쉬지 않고 이야기하는 그 피로감...그래서 이 책은 몸과 정신의 컨디션이 중요하다.
긴 호흡의 문체,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 애송이 독자이지만 내 독서 인생에서 이토록 빽빽한 플롯의 이야기는 처음 만났다.
많은 등장 인물들의 이름이 같거나 비슷하다는 점 또한 이 소설의 읽기 힘든 점으로 말하는데, 나는 이름으로 애를 먹진 않았다. 왜냐하면 6대에 걸친 한 집안의 이야기가 인물 중심으로 시간의 순서대로 전개되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가계도를 확대 복사해서 옆에 두고 읽으니 도움이 되었다.
이 소설은 마꼰도라는 가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100년의 6대(7대라고 봐도 됨)에 걸친 부엔디아 집안의 성쇠를 다룬다. '주민들 가운데 서른 살이 넘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죽은 사람이 하나도 없는 행복한 마을'(1권 23쪽)이었던 마꼰도는 외부와의 교류를 통한 과학 문물의 도입, 콜롬비아 정부의 간섭, 보수파와 자유파 간에 일어난 내전, 철도 건설, 미국 자본주의 유입과 같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운명을 같이 하게 된다. 외부 문물과 자본이 들어옴에 따라 한때 활기찬 도시로 흥하기도 하지만 그동안 마꼰도 마을이 누렸던 균형과 평화에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미국 자본에 의해 운영되는 바나나 농장은 엄청난 이윤을 챙기지만 노동자들은 부당한 임금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매일매일 고된 노동을 견뎌야 했다. 노동자들은 조합을 만들어 파업을 하지만, 정부는 회사의 요청으로 군인을 파견,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을 학살한다. '천일전쟁'과 함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이 '바나나 농장 학살 사건'은 이 소설에서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군중은 기관총들의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는 규칙적인 가위질에 의해 가장자리가 양파 껍질 벗겨지듯 차근차근 동그랗게 잘려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진원지를 향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거대한 소용돌이를 타고 빙빙 돌면서 가운데에 갇히게 되었다. (2권 152쪽)
군인들의 기관총 발사에 양파껍질 벗겨지듯이 가장자리 사람들이 벗겨져 나가는 학살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러나 이런 끔찍한 학살은 정부의 조작으로 애시당초 없었던 일이 된다. 정부의 '특별 포고령'은 '사망자가 한 명도 없었고, 만족한 노무자들은 모두 가족을 찾아 돌아갔으며 바나나 회사는 비가 그칠 때까지 작업을 중단한다는 내용' (2권 157쪽) 이었다. 그러나 밤이 되고 통행금지가 되면 군인들은 용의자들의 집을 부수고 들어가 죽이는 일을 반복, 결국엔 '노조 지도자들을 몰살'하기에 이른다.
콜롬비아 정부는 이런식으로 국민들을 속이고 억압한다. 끔찍한 사건은 정부의 은폐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서서히 사라지고 마꼰도에는 자그만치 4년 11개월하고도 이틀동안 비가 내린다. 그리고 10년 동안 다시는 비가 내리지 않고, 마꼰도는 홍수와 가뭄, 개미들의 공격, 곰팡이 등으로 폐허로 변해간다.
이런 역사적 흐름 속에서 부엔디아 가문이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고독은 점점 깊어진다. 가문의 그 누구도 고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고독한 운명을 타고난 부엔디아 가문은 콜롬비아, 더 나아가 라틴 아메리카의 불운한 역사와도 겹쳐진다.
그리고 마꼰도라는 마을의 탄생과 부엔디아 가문의 몰락에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근친상간이 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내 소설 <백년의 고독>에서 내게 관심이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근친 상간에 의해 고착되어 있는 가족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작품해설 2권 321쪽)이라고 말했다. 부엔디아 집안의 사람들 피 속에 흐르고 있는 근친 상간의 유혹은 고독과 함께 그들의 삶을 운명적으로 이끈다.
마꼰도 마을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사촌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나와 결혼한 우르술라가 근친 상간으로 돼지꼬리가 달린 아이가 태어날 것을 두려워해 부부 생활을 안하는데, 이를 놀리던 동네 사람을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나가 죽임으로써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던 사연이 있다. 우르술라는 자손들에게 근친끼리의 관계를 엄격히 금하지만, 부엔디나 가문의 혈통에 흐르는 근친상간을 향한 끌림은 억지로 금한다고 되는게 아니다. 형과 동생이 같은 여자와 관계해 아이를 낳고, 한 남자를 동시에 사랑하는 자매, 친오빠는 아니지만 오빠와 결혼하는 여동생, 고모와 조카, 이모와 조카와의 관계 등, 근친 상간은 대를 이어서 계속 크고 작게 나타난다.
'왜 작가는 이 가족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근친상간의 모티프를 이야기의 중요한 요소로 삼았을까...?'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이 질문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근친상간은 외부가 아닌 나와 가장 가까운, 나와 같은 피를 몸에 지니고 있으며 나의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과 몸과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나를 밖으로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수렴, 응축되는 느낌, 더 나아가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가 되는 느낌을 다른 어떤 관계보다 더강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고독한 존재이기에 어쩌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근친을 향한 본능적인 끌림이 있는게 아닐까...그래서 부엔디아 가문의 사람들은 내면에 숙명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그 고독을 근친과의 관계를 통해 치유할 수밖에 없던게 아닐까...
조카와 이모사이인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와 아마란따 우르술라의 사랑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뱃속의 아기가 자라감에 따라 두 사람은 점점 단 한 사람으로 변해 갔고, 마지막 바람 한 줄기만 불어도 무너져버릴 것 같은 그 황폐한 집의 고독 안으로 점점 더 들어가고 있었다. (2권 296쪽)
고독해서 성에 탐닉, 더 나아가 근친 상간에 빠지고 그로인해 또 다시 고독해지는 인간의 반복되는 모습은 부엔디아 가문의 사람들의 삶을 통해 숙명적으로 다가온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을 소개하고 싶다.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술라의 장남 호세 아르까디오의 죽음을 묘사한 장면이다.
호세 아르까디오가 침실문을 닫자마자 권총 소리가 집 안을 진동했다. 한 줄기 피가 문 밑으로 새어나와, 거실을 가로질러 거리로 나가, 울퉁불퉁한 보도를 통해 계속해서 똑바로 가서, 계단을 내려가고, 난간으로 올라가, 터키인들의 거리를 통해 뻗어나가다, 어느 길모퉁이에서 오른쪽으로 돌았다가, 다른 길모퉁이에서 왼쪽으로 돌아, 부엔디아 가문의 집 앞에서 직각으로 방향을 틀어 닫힌 문 밑으로 들어가서는 양탄자를 적시지 않으려고 벽을 타고 응접실을 건너, 계속해서 다른 거실을 건너고, 식당에 있던 식탁을 피하기 위해 넓게 우회해서 베고니아가 있는 복도를 통과해 나아가다, 아우렐리아노 호세에게 산수를 가르치고 있던 아마란따의 의자 밑을 들키지 않고 지나, 곡식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우르술라가 빵을 만들려고 달걀 서른 여섯 개를 깨뜨릴 준비를 하고 있던 부엌에 나타났다. (1권 200쪽)
호세 아르까디오, 창녀들이 돈을 내고 서로 자려고 할 정도로 엄청난 남성성을 지닌 남자. 미스터리한 그의 죽음과 그의 피가 온 마을을 흘러 엄마인 우르슬라에게까지 가는 이 장면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피를 따라가는 내 눈과 마음이 마법에 홀린 듯해 '아 이래서 이 소설이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건가...' 싶었다.
이 외에도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가 죽던 날, 밤새 내리던 노란 꽃비, 침대 시트를 타고 하늘로 승천한 미녀, 흙을 먹는 여자, 날아다니는 양탄자, 전염되는 불면증 등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한 사건들로 가득한 이 소설은 그야말로 현실과 상상이 마술적으로 섞여 있어 내용을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이야기에 나 자신을 맡기고 읽는 것이 이 책을 재미있게 읽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참...써놓고 보니 글에 맥락이 없어 부끄럽지만 이 책을 읽고 이렇게나마 흔적을 남기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며 새삼 느낀건 역시 독서는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건강식으로 먹고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기로 다시 한번 마음을 먹었다.
이번 달에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책을 두 권 읽었는데, 다음엔 <콜레라 시대의 사랑>과 <족장의 가을>을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