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대에게서 떠나 있던 때는 봄이었노라……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난 정말 조금도 안 변했구나. 조앤 스쿠다모어는 생각했다.
거울에 비친 건 날씬한 중년 여성이었다. 얼굴은 팽팽하고갈색 머리에 흰머리는 거의 없었다. 파란 눈은 명랑해 보이고미소짓는 입가에는 활기가 넘쳤다. 단정하고 세련된 코트와 치마를 입고,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넣은 꽤 큰 가방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다 괜찮아졌다. 조앤이 나서서 필요한 일들을 처리했다. 아기와 윌리엄, 회복되고 있는 바버라, 모든 일을 계획해서 순조롭게 돌아가게 해놓았다. 정말 다행이야, 

난 언제나 일을 잘 해결하니까. 
조앤은 생각했다.

"그래봤자 하인들에게 뭘 바라겠니?" 조앤이 말했다.
"엄마의 하인들은 완벽하잖아요. 엄마가 관리를 잘하시니까!" 바버라가 말했다.
조앤은 바버라의 말을 웃으며 흘려들었지만 내심 흐뭇했다.

누구나 칭찬을 좋아하는 법이니까. 이따금 그녀는 자신의 능숙한 살림과 보살핌과 헌신을 가족이 너무 당연시하는 건 아닌지의심이 들었다.
물론 비난하는 건 아니다. 
토니, 에이버릴, 바버라는 흡족한자식들이고, 그녀와 로드니는 자신들의 올바른 양육과 성공한인생을 자랑스럽게 여길 만했다.

자식들 모두 훤칠하고 건강하고 행실이 발랐다. 조앤은 자기부부가 정말 다복하다고 느꼈다. 마음 한구석으로는 부모 노릇을 잘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조앤은 거울에서 눈을 돌리며 자신에게서 빛이 난다고 느꼈다. 그래, 자기 일에서 성공했다고 느끼는 건 정말 흐뭇한 일이야

나는 직업이나 그 비슷한 것을 갖고 싶었던 적이 없었고 아내이자 엄마로 만족스러웠어.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했고, 남편은 자기 분야에서 성공했어. 그 성공 역시 내 덕분이라 할 수 있지, 사람은 영향을 받는 것만으로도 아주 많은 일을 할 수 있어.
내 소중한 로드니!

블란치 해거드, 세인트 앤 고등학교에 다닐 때 조앤은 블란치를 얼마나 숭배했던가! 누구랄 것 없이 블란치에게 열광했다.
블란치는 대담하고 재미있고 말로 다 못 할 만큼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볼품없이 마르고 부산하고 너저분하고 늙수그레한 여자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우스웠다. 별난 차림새라니! 게다가 그녀는…. 적어도 예순 살은 되어 보였다. 정말 그쯤으로 보였다.
블란치는 불행하게 살아온 게 틀림없어. 조앤은 생각했다.

"귀여운 바버라 레이가 네 딸이었구나. 그걸 보면 사람들이얼마나 사정을 오해하는지 알겠다. 다들 그 아이가 불행한 가정에서 도망치기 위해 맨 처음 청혼한 남자와 결혼했다고 알고 있거든."

"우리 둘 다 새로운 일은 원하지 않아. 로드니와 나는 서로에게 완벽하게 만족하거든."
"넌 늘 지독하게 냉정했지. 네 남편이 연애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더라는 말을 해줬어야 했는데!"

"내 말은 다만…… 정말 유감이라는 거야."
"나한테?" 블란치는 그런 생각이 재미있는 듯했다.
 "넌 친절한 사람이야. 하지만 함부로 동정하진 마. 난 지금까지 꽤 재미있게 살아왔으니까."
조앤은 자기도 모르게 친구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블란치는자기가 한심해 보인다는 걸 알까? 

☆"몇 날 며칠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자신에 대해 뭘 알게 될까......"
조앤은 의심스러우면서도 약간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전에 몰랐던 것을 알게 될까?"

"하긴 세상이 그런 거지. 붙어 있어야 할 때는 그만두고, 내버려두어야 할 때는 매달리고, 한순간 인생이 너무나 멋져서 이게현실일까 믿기지가 않다가, 이내 지옥 같은 고민과 고통 속을헤매고! 상황이 잘 풀릴 때는 이 순간이 영원할 것 같은데 그런데 그렇지가 않지 ㅡ 나락으로 떨어질 때는 이제 절대 위로 올라가 숨쉬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잖아. 그런 게 인생이잖니?"

로드니가 연애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더라고 했나? 천박한 표현하고는, 게다가 완전히 틀린 말이잖아, 완전히 틀린 말! 로드니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단 한 번도.
이전과 같은 생각이 마음의 표면을 지나갔다. 
하지만 뱀처럼재빨리 스쳐지나지는 않았다.
랜돌프 계집애……

내가 그때 현명하고 요령 있게 대처하지 않았다면…… 조앤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자화자찬하는 환한 표정으로 그때 자신이 한 처신을되새겼다. 그녀는 그 상황을 아주 잘 처리했다. 사실 아주 잘했다. 가볍게 해치웠다.

"아뇨, 아예 못 들어옵니다. 누사이빈 쪽에 큰비가 내렸거든요. 선로가 넘쳐서 사흘이나 나흘, 아마 대엿새는 기차가 다니지 못할 겁니다."
조앤은 경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나는 뭘 하죠?"

"로드니, 어떻게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할 수 있죠! 바버라는당연히 그를 사랑해요! 사랑하지 않는다면 대체 왜 결혼하겠어
"내가 걱정하는 게 그거지." 로드니는 좀 어눌하게 대답했다.

"집을 벗어나기 위해 결혼하는 여자도 있어."
조앤은 갑자기 웃음이 났다.
"설마 바버라가 그럴 리가요! 우리처럼 행복한 가정에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요."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해, 조앤?"

"제가 엄마의 경험과 지혜라는 특별한 것 없이 혼자 배를 저어가야 한다는 것 같네요." 바버라가 미소지으면서 대담했다.

눈에 익은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앤은 자기도 모르게 전율했다. 그의 뒷모습이 갑자기 젊어진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어깨를 펴고 걷고 있었다. 그 모습이 조앤에게는 조금 충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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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을 앞 둔, 월요일
세 여인이 있다.
다락에서 남편의 편지를 발견한 세실리아.
자매처럼 지내온 사촌 펠리시티와 남편 윌의 불륜을 알게된, 테스
삶의 유일한 활력소이자 희망인 손자 제이컵이 아들내외와 함께 곧 뉴욕으로 떠나게된다는 사실을 통보받은, 레이첼.
그녀들 삶 속에 불안, 불행이 찾아오면서 조금씩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가까워진다.
남편의 편지를 읽고 절망한 세실리아, 과거의 남친과 급속도로 발전하게된 테스, 딸 자니의 살인범을 찾으려 애쓰는 레이첼은 서로의 인생이 조금씩 겹치고, 그 안에서 위로를 받는다.
하지만 수면 위로 떠오른 거짓과 잘못들로 가슴아픈 죄값을 치르게되는 그들.




"테스는 조금 수줍음이 많아. 아빠를 닮은 거 같아 걱정이야."
엄마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다 들릴 정도로 크게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곤 했다. 엄마의 말투엔 분명 경멸이 담겨 있어서 테스는 수줍음은 어떤 형태가 되었건 모두 잘못된 거라고, 윤리적으로문제가 있는 거라고 믿게 되었다. 

그러니 테스가 내성적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는 것도 당연하다. 테스에게 수줍음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감춰야 하는 당혹스러운 신체 질병과 같았다.

이런 말 있잖아. 아들은 아내를 데려오기 전까지만 아들이고, 딸은 영원히 딸이다.

테스와 펠리시티는 인생의 관중석에 앉아 선수들을 비웃고 있었던 거다

성 금요일과 복싱 데이(크리스마스가 끝나고 오는 첫 번째 평일을공휴일로 지징한 날 옮긴이)는 일정이 선혀 없는, 1년에 딱 이틀뿐인 아주 귀중한 날이었다. 

레이첼은 언제나 완벽한 시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는 이우를세워 로렌이 거들지 못하게 막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일을 들지못하게 함으로써 거리를 두고, 가족이 아님을 알게 하고, 내 주방에 들어오게 할 만큼 널 좋아하지 않아‘ 라는 무언의 말을 하고 있는 거였다.

☆☆가끔은 정말 순수하고 원초적인 슬픔이 몰려왔다. 가끔은 할퀴고 차고 죽이고 싶은 맹렬한 바람이, 분노가 몰려왔다. 그리고 지금 같은 순간도 있었다. 그저 질식할 것처럼 묵직한 안개에 휩싸여 무뎌진 감각으로 아무것도 못하고 가라앉아버리는 거다.
그러니까 그냥 지독하게 슬퍼지는 것이다.

희생자가 되는 건 정말 쉽다. 비난이 쉽게 거부할 수 없는 즐거움을 지닌 채 입에서 흘러나왔다.

"절대로 변명하자는 게 아니야. 그런 생각은 조금도 하지 마하지만 6개월 전쯤이었어. 마흔 번째 생일을 맞은 뒤에 말이야.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는 단조롭다‘ 였어. ‘맥이 빠졌다‘ 고도 할 수 있을 거 같아."

☆"내 무릎이 온갖 말썽을 부렸던 거 기억해? 그다음엔 등이 문제였지? 그때 생각했어. 세상에, 이젠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 의사를 찾아가고 약을 먹고 고통에 시달리고 망할 찜질이나 하면서? 벌써? 이제 모두 끝난 거야?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한 거였어. 그러다 어느 날…… 알아, 그건 너무 당혹스러웠어."

윌과 펠리시티가 정말로 맺어질 운명이라면 어떻게 하나? 테스와 코너가 결국 맺어질 운명이라면? 아마도 그런 질문에 정답이없을 것이다. 결국 맺어질 운명 같은 건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삶이 있는 거다. 
바로 지금 최선을 다해야 하는 삶이. 
그저 조금 굴곡이 있는 것뿐이야.

☆우리 인생이 어떤 길로 가게 될지,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마도 그 편이 나을 것이다. 어떤 비밀은 영원히 비밀로 남는다. 그저 판도라에게 물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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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는 이미 끊어져 있었다. 테스의 아빠는 늘 정신없이 갑작스럽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마치 경찰이 도청을 하고 있어 위치를파악하기 전에 황급히 전화를 끊어야 하는 범죄자 같았다. 아빠는5년 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시드니와는 정반대에 있는 서부로 옮겨가선 작고 평평하고 나무도 없는 곳에서 살았다.

세실리아는 테스처럼 신비롭고 우아한사람들에겐 대책 없이 끌렸다. 세실리아의 친구들은 대부분 수다쟁이였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 목소리엔 늘 절망이 덧씌워져 있었다. 

세실리아는 가끔 정말 중요한 일을 경험하고 싶다.
는 생각을 했다. 가끔은 자신의 인생이 너무나도 보잘것없게 느껴졌다.

지금 나, 재앙을 원하는 거야?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알고 싶어서 이 도시를 가르는 장벽이 생기길바라는 거야? 아니면 레이첼 크롤리 같은 비극을 겪고 싶은 거야?

정말 그런 걸 원해, 세실리아? 엄청나게 진지하고 흥미로운 비극 말이야?
물론 그렇진 않았다.

"모든 게 너무 힘들 게 느껴졌거든, 영원히 잠드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았어."
존 폴은 그렇게 대답했다.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옳지 않은 일을 해야 할 때도 있는 거다. 세실리아에겐 비윤리적인 일을 할 윤리적인 의무가 있다. 두 악 중에 작은 악을 행하는 거다. 세실리아에겐명분이 있다.

자니 크롤리 언니가, 레이첼의 따님이 저한테 다가왔어요. 언니는저를 일으켜세우고는 제 등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줬어요. 그리고제 귀에 대고 조용히 별일 아니야. 그냥 바보 같은 행진일 뿐이야 라고 해줬어요."

세실리아가 보기에 사람들에겐등이 굽거나 몸이 떨리기 전에 한때 믿었던 자기 몸을 더는 믿지못하는 시기가 오는 것 같았다.

"우리 아이들은 사내아이일 거 같아. 그리고 가장 친한 친구가될 거야."
메리가 말했다.
"글쎄, 서로 죽이겠다고 덤빌 확률이 더 크지."
루시가 말했다.

코너는 에드와 악수를 하고 레이첼에게 차가운 뺨을 댔다. 레이첼에게코너는 악몽이었다. 시체가 든 관처럼 비현실적이고 잘못됐다. 몇달 뒤에 레이첼은 두 아이가 함께 있는 사진을 찾았다. 코너는 무슨 말인가 하고 있는 자니를 보고 웃고 있었다.

사람들은 보통 비극을 겪은 사람은 자동적으로 훨씬 높고 고상한 차원으로 올라간다고 믿지만, 레이첼이 보기엔 그 반대였다.
비극은 사람을 옹졸하고 편협하게 만든다. 위대한 지식이나 영감을 주는 일 따윈 없다. 

레이첼은 그런 에드를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은 남편의 슬픔과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으면 했다. 절대 남편의 슬픔을 알고 싶지도, 느끼고 싶지도, 함께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의 슬픔만으로도 충분했다. 도대체 어떻게 남편의 슬픔까지 감당하란 말인가?

하지만 이제 레이첼은 궁금했다. 어째서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면서 함께 슬픔을 나누려고 하지 않았을까?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다. 하지만 자니가 죽었을 때 두 사람은 상대방이 우는 모습을 참아내지 못했다.

"편지, 읽었군."
존 폴이 말했다.

"응, 읽었어."
세실리아가 말했다.

세실리아는 지금까지 수도 없이 분노해왔다고 생각했지만, 이제야 정말로 분노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았다. 순수한 진짜최대 분노 말이다. 진짜 분노는 미칠 것 같고 광포해지고 경이로운 느낌이었다. 세실리아는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악마처럼 서재를 날아서 날카로운 손톱으로 존 폴의 얼굴을 피범벅으로만들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살인 희생자는 언제나정확하게 살인 희생자처럼 보였다. 그런 운명이 미리 예정된 것처럼 모두 아름답고 순진하고 불운했다. 

세실리아의 마음은 절대로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에 부딪친 것처럼 오싹하고 무시무시한 변하지 않는 사실로 돌아왔다.

"그건 마치 내 마음속에 괴물을 가두고 있는 것과 같아."
존 폴이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 괴물이 가끔 풀려나서 마구 날뛰는 거야. 그러면 난 다시그 녀석에게 잡혀야 해, 다시 사슬에 묶이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러다 당신을 만났지. 난 당신에게서 특별한 걸 느꼈어. 뼛속까지 선한 감정 말이야. 난 그 선함을 사랑하게 됐어. 마치 아름다.
운 호수를 보는 것 같았어. 당신이 날 정화시켜줄 수 있다고 믿은거야."
세실리아는 오싹해졌다. 
난 선하지 않아. 
마리화나를 피운 적도있다고, 우린 함께 술도 마셨잖아. 
세상에, 난 당신이 내 모습을사랑한 줄 알았어, 선함이 아니라 번쩍이는 재치를, 유머 감각을사랑하는 줄 알았다고,

존 폴은 계속 말했다. 끝이 없었다. 세실리아는 몸속에 이상한벌레가 산다는 도시 괴담이 떠올랐다. 이 벌레를 없애는 유일한방법은 죽기 직전까지 굶은 뒤에 아주 맛있는 음식을 입에 물고벌레가 음식 냄새를 맡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음식 냄새를맡으면 벌레는 식도를 타고 올라와 입안으로 들어온다. 존 폴의목소리가 그 벌레처럼 들렸다. 끝도 없이 끔찍한 이야기가 그 입에서 흘러나왔다.

자기는 정말 보이스카우트 같아."
연인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윌은 그렇게 말했다. 영화를보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고, 어두운 거리에서 윌이 차 열쇠를 떨어뜨리자 테스가 가방에서 작은 손전등을 꺼냈을 때였다.

"무인도에 떨어져도 테스의 핸드백만 있으면 우린 충분히 살수 있어."
펠리시티가 말했다. 당연히 그 밤에, 펠리시티도 두 사람과 함께 있었다. 도대체 펠리시티가 없는 순간은 언제인 거야?

수십년동안 레이첼은 자니를 위해 무언가 해주고 싶었다. 
여전히 자니의 엄마이고 싶었고, 자니를 위해 사소한 일들을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니에게해줄 수 있는 일을 찾았다. 내가 범인을 잡아줄게, 조금만 기다려,자니

테스는 윌과 펠리시티를 생각했다. 차가운 커피를 얼굴에 들이부었을 때 두 사람이 보였던 절실하고도 슬픈 얼굴이 떠올랐다. 펠리시티는 새로 산 눈처럼 하얀 실크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커피 얼룩은 절대로 빠지지 않을 거다.

베를린 장벽에 관한 책을 읽는 건세실리아가 정말로 생각하고 있는 걸 생각하지 않는 척하는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엄마는 이상하게 꼭 행복하면 울더라."
에스터가 말했다.
"그러게."
세실리아가 대답했다. 행복한 결말은 언제나 세실리아를 울렸다.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이게 문제였다. 이제 존 폴의 모든 결점이 너무나도 크게 보였다. 그건 법을 준수하는 온화한 남편이자 아버지에게 결점이 있는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불편할 때에만 나타나는 특별한 고집, 역시 불편할 때만 가끔씩 나타나는 우울함, 말다툼을 할 때면 드러나는 참을 수 없는 가혹함, 단정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물건을 잃어버리는 경솔함 등의 결점은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그 때문에 평범하게 느껴져서 좋기도 했다.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생각을 한다. 생각은 위험하다.

잠시 테스는 기이하게 부적절한 행복이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슬픔의 골짜기에 둘러싸인 좁은 틈새 위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약간만 잘못 생각하면 그대로 굴러떨어질 수도 있었다.

테스는 언제나 부모님이 이혼했기 때문에 무언가 잘못되었다.
는 느낌을 받았다. 어렸을 땐 부모님이 함께 살았다면 자신이 훨씬 나은 삶을 살았을 거라고 공상하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결혼은 실패하기 마련이고, 아이들은 살아남는다. 테스도 살아남았다. 소위 말해 아이들이 받는다는 ‘상처‘는모두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아빠가 보내온 물건은 나무로 만든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나침반이었다.
"정말 독특한 사람이라니까."
테스의 엄마가 곳방귀를 뀌었다.
테스는 나침반을 들어올렸다. 상자 밑엔 노란 포스트잇에 쓴 편지가 붙어 있었다. 테스가 편지를 읽었다.

☆사랑하는 테스,
이게 여자애들에겐 적절한 선물이 아닌 거 알아, 너에게 어떤 선물을 해야 하는지 한 번도 제대로 알았던 적이 없구나 하지만 길을 잃었을 것 같은 너에게필요한 게 뭐일지 고민해봤단다. 나는 길을 잃는 느낌이 어떤 건지 생생하게기억하고 있어. 정말 끔찍한 느낌이지. 하지만 내겐 언제나 네가 있었어. 너의길을 찾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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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폴이었다.
세실리아는 전화기 너머로 듣는 존 폴의 목소리가 정말 좋았다.
따뜻하고 편안하고 깊게 울리는 소리였다. 정말로 세실리아의 남편은 대책이 없었다. 끊임없이 물건을 잃어버리고, 지각을 밥 먹 듯 했다

하지만 언제나 가족을 알뜰하게 보살피는 남자였다. 이건 남자가 할 일이지, 라는 태도로 책임감 있게 행동하는 전형적인 가장이었다. 브리짓의 말이 맞아. 세실리아의 세계를 지배하는사람은 세실리아다. 하지만 위기가 닥칠 때, 그러니까 총을 든 미친 남자가 뛰어들어오거나 홍수나 화재가 났을 때 피츠패트릭 집안의 네 여자를 구할 사람은 존 폴이다. 

"무슨 편지?"
"자기가 나한테 쓴 편지."
세실리아는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도록 되도록 가볍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래야 이 편지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고, 아무것도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자기가 죽은 다음에 펴보라는 편지 말이야."

 펠리시티야말로 <도전! FAT 제로>에서 간절히 찾는 그런 사람이다. 뚱뚱한 몸에 갇혀 있는 매혹적인 미인.

결국 승리를 얻어냈다. 웃는 얼굴은 어제, 아직 윌과 펠리시티의비밀을 모르고 있을 때 그려넣은 것이다. 테스가 저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두 사람은 유감이라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작은 비밀을 고백하면 저렇게 웃는 얼굴을그릴 수 없을 텐데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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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 월, 펠리시티, 세 사람은 자신들의 이름을 따 꿈에 그리던작은 회사를 설립했다. 그저 한번 해보면 어떨까? 했던 바람이실제로 이루어진 거다.

유당을 먹지 못하는 사람이나 피부가 민감한 사람들이 그러듯, 
테스는 수줍음과 함께 사는 방법을 익혔다.

테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펠리시티와 내가사랑에 빠졌어."
"아주 재밌네."
테스가 머그잔을 모으며 웃었다.

"진정한 사랑을 찾았다는 거야? 두 사람이 영혼의 동반자라고?"
윌은 뺨을 실룩거렸고, 펠리시티는 머리카릭을 잡아당겼다.
그렇다는 말이군. 그게 바로 두 사람이 생각하는 거였다. 그래.
진정한 사랑이야. 우린 영혼의 동반자라고!

제이컵을 처음 품에 안고 부드럽고 연약한 머리에 입을 맞춘 순간, 레이첼은 시들어버린 식물에 물을 주자 다시 살아난 것처럼자신의 삶도 다시 살아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갓 태어난 아기 냄새가 레이첼의 폐에 산소를 가득 불어넣었다. 누군가가 드디어 레이첼이 수년 동안 매달고 다녀야 했던 무거운 추를 받아든 것처럼허리가 쭉 펴지는 기분이 들었다. 병원에서 나와 주차장으로 가는동안 무채색이었던 세상이 다시 색을 입었음을 알 수 있었다.

 레이첼은 아들이 엄마의 인생을 잊어버린 건지, 처음부터알지 못했던 건지, 그것도 아니면 전혀 흥미가 없는 건지 궁금했다.

레이첼은 자신의 인생이 카드로 만든 것처럼 이렇게 연약한 줄은 몰랐다. 롭과 로렌이 월요일 밤에 쳐들어와 카드로 만든 집에서 아주 중요한 카드 한 장을 저렇게 즐거워하면서 빼내갈 줄은몰랐다. 제이컵이라는 카드가 빠지면 레이첼의 인생은 완전히 무너지고, 남은 카드들은 나풀거리며 땅바닥에 내려앉을 것이다.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레이첼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았다. <도전! FAT 제로>에 출연하는 트레이너 목소리였다. 레이첼은 그 프로그램이 좋았다. 
총천연색 가짜 세상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1984년에 가족에게 그 일이 생긴 뒤에 레이첼은 롭을 훨씬 더많이 사랑했어야 했다. 하지만 레이첼은 사랑하는 능력을 완전히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 능력은 제이컵이 태어난 뒤에야 다시 돌아왔다.

폴리는 비밀을 사랑했다. 두 살 때 이 세상에 비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폴리는 끊임없이 비밀을 말했고, 비밀을 공유했다.

절대로 열어보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이젠 절대 열어볼 수없게 됐다. 차라리 말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세실리아는 차를 다 마시고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모든 여성이 간절히 원하는 걸 지닌 아이는 어떤사람으로 자랄까? 세실리아가 보기에 아름다운 여자들은 자신이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예쁜 여자들은 엄청난 관심이라는 바람에 흔들리는 야자수 같다. 세실리아는 딸들이 뛰고, 성큼성큼걷고, 발을 구르는 사람이 되길 바랐다. 폴리가 마구 흔들리는 사람이 되길 원하지 않았다.

일부러 잊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레이첼은 자신이 며느리를 얼마나 싫어하는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어쩌면 미워하고있는지도 모른다.

강철 바이스가 레이첼의 가슴을 움켜잡고 강하게 조이는 것 같았다. 숨이 막혀 질식해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고통 아래에서 침울하지만 차분한 경험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겪어본 일이잖아. 이것 때문에 죽진 않아,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지만사실은 숨을 쉬고 있잖아, 결코 눈물을 멈추지 못할 것 같지만, 결국 멈추게 될 거야.

레이첼은 항상 눕는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불은 켜두었다.
자니가 죽은 뒤부터 레이첼과 에드는 어둠을 참지 못했다. 두 사람은 평범한 사람처럼 잠들 수가 없었다. 잠을 자지 않는 것처럼스스로를 속이고 기만해야 했다.

그저 아는 것은 제이컵이 그녀의 인생에서 사라지면 다시 견딜 수 없는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아니, 사실 가장 끔찍한 일은 그런 삶도 견딜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사실 가장 끔찍한 일은 그런 삶도 견딜 수 있다는 것이다.

가톨릭 성당은 그녀가 영원히 응원할 팀이다. 
하지만 신에 대해 말하자면, 그(또는 그녀)가 맡은 바 일을 잘하고 있는지는전혀 다른 문제였다.

세실리아는 브리짓에게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기꺼이 신장을줄 수 있다. 하지만 가끔은 정말이지 브리짓 위에 올라타 베개로얼굴을 깔아뭉개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어렸을 땐 그게 브리짓에게 규칙을 지키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어른이 되면 진짜 감정을 숨겨야 한다.

세실리아는 편지를 꺼내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제는 읽어볼 수도 없고, 읽을 생각도 없다.

 테스는 네 상여군이 관을 들고 영구차로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 사람의 인생이 끝났다. 저 사람은 얼굴을 간질이는 이 햇빛을 다시는 느끼지 못하겠지. 테스는 고통을 잊기 위해 죽음을 사색해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날씨도 테스를 도와주지 않았다. 너무 지나치게 사랑스러워서,
꼭 테스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이 세상은 정말 아름다워, 너는 뭐가 문제니?
시드니가 테스에게 말했다.

두사람이 데이트를 하고 몇 달도 되지 않아 윌은 "당신이 없으면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어. 당신은 꼭 있어야만 잘 수 있는 베개 같아. 가는 곳마다 가져가야겠어" 라고 했다.

세실리아 피츠패트릭이야. 벨 씨네 큰딸인데, 피츠패트릭네큰가를 준 꽃이랑 결혼했어, 아들들 모두 비슷하게 생겼지만, 내가 보기게 가장 갈생긴 아들 말이야. 세실리아한테 동생이 있지.
다 같은 학년이었을 텐데, 누구더라. 그래 브리짓 벨."

이런 세상에. 테스는 모든 기운이 몸에서 완전히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말이 많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을 만나면 언제나 그런기분이 들었다.

세실리아가 테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러니까세실리아는 한참 동안 다른 사람의 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인거다. 테스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맞아요. 레이첼 크롤리 아주머니 말예요. 정말 효율적인 분이에요. 꼭 스위스 시계처럼 학교를 운영하시죠. 우리 시어머니랑같은 일을 나눠서 하시지만, 우리끼리 하는 말인데, 사실 레이첼이 일을 다 하세요. 시어머니는 그저 잡담만 하시죠. 이건 내가 하면 안 되는 말이긴 하지만, 저런, 근데 이미 말해버렸네요."

테스와 테스의 아빠가 동시에 말했다.
그리고 둘 다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이런 순간은 언제나 고통스러웠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아빠와의 대화는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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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모두 베를린 장벽 때문이다.
베를린 장벽만 아니었다면 세실리아는 편지를 발견하지도, 시탁에 앉아 열어보지 않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을 거다.

솔직히 말해 편지 좀 본다고 큰일이 날 린 없다. 보자마자 뜯어보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거고,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다들 무슨말을 할지 뻔했다.

"베를린 장벽을 세우자고 한 사람이 누구지?"
"다들 니키타 흐루쇼프일 거라고 하던데?"
에스터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의기양양하게 이국적인 이름을 외쳤다. 자신이 직접 익힌 독특한 러시아 억양으로,
"누구냐면 러시아의 수상 같은 사람이야. 사실 수상은 아니고서기장인데, 아마도……."

물론 세실리아도 지극히 평범하게 살길 바랐다. 하지만 좀 더나은 일을 하지 않는다고, 좀 더 뛰어난 일을 하지 않는다고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세실리아는 가끔 멍하니멈춰 서서 생각했다. 지금 뭐라는 거니? 교외에 사는 엄마들은 모두 나 같단 말이야!

말을 하지 않는 건 세실리아답지 않았다. 세실리아는 말을 해야하는 사람이었다. 전 남자 친구는 세실리아에게 "진지하게 말하는건데, 제발 입 좀 다물고 있으면 안 돼?" 라고까지 했다. 세실리아는 긴장하면 말이 많아졌다. 그러니까 전 남자 친구가 세실리아를긴장하게 한 거다. 물론 행복할 때도 말이 많아지긴 했다.

물건이 가득 들어 있는 다락은 좁았지만, 당연히 조직적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조직적‘ 이란 말은 세실리아를 규정하는 가장 큰 특징이 된 듯했다. 세실리아가 지역사회에서 살짝 유명 인사처럼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언젠가가족과 친구들이 세실리아를 언급하면서 놀린 뒤로 그런 평판은영구적으로 정착해버렸다.
 그 때문에 세실리아의 인생은 엄청나게 굉장하고 조직적인 것이 되었고, 세실리아가 엄마로 사는 일은일종의 스포츠가 되어 세실리아는 아주 유능한 선수인 양 되어버렸다.

나의 아내 세실리아 피츠패트릭에게

반드시 내가 죽은 뒤에 열어볼 것

삶을 관리하는 부분만 아니라면 세실리아가 아는 사람 중에 존폴만큼 영리한 사람은 드물었다.
남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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