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에 보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오페라를 선보인 보리스 그로엔!
그리고 그의 작품을 감상하던 중 자연스레 떠오른 이름, 버넌 데어!
그렇게 자연스레 버넌 데어의 어린시절을 그리기 시작한 소설, 인생의 양식.
부족할 것 없이 애버츠 퓨어슨츠에서 자라고 있는 버넌. 호기심많고 이상할 정도로 음악에 대한 거부반응을 보이는 그는 점점 자신의 세계의 확장해나가며, 두려움의 실체에 대한 진실에 눈뜨고 그가 가진 천재성을 펼치려 한다.
어린 시절 그가 애정을 가진 존재는 엄마가 아닌 고모 니나였다. 사랑만을 쫓으며 불운한 삶을 살던 그녀는 딸, 조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고, 조는 애버츠 퓨어슨츠로 보내져 버넌과 어린시절을 함께 보내게 된다. 삶에 열정적이지만 그녀만의 편협한 시각이 절대적인 옳음이라 생각하며 살게된다. 엄마와 같은 인생을 살지않겠다고 늘 다짐해왔지만 결국엔 니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마지막에 나타난다.
버넌과 조의 이웃이었던 시배스천. 별나게 생긴 그는 유대인으로 장사수완있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돈의 흐름을 앞서 예측하고 냉철하고 이성적인 삶이 태도를 고수하며 조의 사랑만을 바라며 여유롭지만 외로운 삶을 살며 버넌과 조의 곁을 지킨다.
이 소설 속에서 가장 호감가고, 그의 삶을 응원하게 되는 인물이다.
버넌의 어린시절 여성여성한 모습에 학을 뗐지만 다 자란 후 만난 아름다운 모습에 첫 눈에 반해버린 넬.
사랑을 갈구하지만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지독한 현실적인 이기주의자!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하며 살 수 밖에 없는 그녀가 애처롭기도 하다.
그리고 뛰어난 재능과 아름다움, 사람을 끄는 매력까지 모두 타고났지만 작품 내내 비극적인 삶을 살게되는 제인 하딩!
이 소설은 이렇게 다섯 남녀의 얽히고 설킨 인생을 그리고있다.
그들의 모순적인 언행들이 이해되지않기도 하고, 그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가는 세상사에 연민이 느껴지기도하며 이 두꺼운 책은 쉼없이 읽어진다.




왜 집에 간다‘고 하지 않았을까? 버넌은 왜 그 말이 이렇게도 낯설게 들리는지 생각했다. 그에게 집은 오직 한 곳, 애버츠퓨어슨츠뿐이었다. 집! 이 이상한 단어에는 정말 많은 의미가담겨 있었다. 그는 조가 만났던 청년이 목청껏 부르던 노래가떠올라서 (음악이란 정말 불쾌한 것이다!) 옷깃을 만지작거리며감상적으로 레빈 부인을 바라보았다. "집은, 사랑은, 마음이 머무는 곳, 마음이 향하는 곳...."

버넌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작은 악마가 요동치는 것 같았다.
악마는 불쑥 뜻밖의 말을 꺼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지? 엄마에게는 집이 있고, 수다 떨고 호통 쳐댈 하인들이 있어. 남 얘기를해댈 친구들과 가까이 사는 친정 식구들까지 있다고. 엄마는 너보다 그것들을 잃는 걸 훨씬 아쉬워할길? 엄마는 널 사랑하지만 네가 케임브리지로 돌아가면 안도해. 물론 네가 안도하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셰되브르 chef-d‘oeuvre. 명작, 걸작을 뜻하는 프랑스어.

"솔직히 난 그게 반사회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하지만 넌 늘 그래. 누가 하지 말라고 하면 더하고 싶어하잖아. 네가 그걸 진심으로 좋아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상관없이, 제대로 표현하긴 힘들지만 아무튼 내 말뜻은 너도알 거야."

더이상 달아날 수 없었어. 마주볼 수밖에 없었지. 조, 음악은 세
"당연히 기억 못할 거야. 네가 우리집에 오기 전이었으니까.
내 다리가 부러졌을 때 말이야. 난 프랜시스 간호사가 해준 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 살펴보기도 전에 도망부터 치지 말라는 얘기였지. 그래, 오늘 내게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난 거야. 난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야………"

"알아. 그래서 그만큼 충격도 컸던 거야. 지금 현재의 음악이아름답다는 건 아니야. 음악을 의도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 음악을 구성하는 부분들은 추해. 마치 어떤 그림에 바싹 다가서서 지저분한 회색 물감 얼룩을 보는 것과비슷해. 하지만 떨어져서 보면 그 자국들은 아주 멋진 음영으로제자리를 찾잖아. 전체를 봐야 해. 난 여전히 바이올린 소리는듣기 싫고 피아노 소리는 끔찍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 소리하나하나에 다 쓸모가 있을 거야. 그래 아! 조, 음악은 정말 대단해질 수 있어. 그렇다고 확신해."

"그래, 오케스트라가 아홉 개였어. 대규모 편성이었지. 규모가 충분히 크면 소리가 웅장해질 수 있어. 단순히 음량이 커진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 조용히 연주할수록 더 많은 것이 들려. 하지만 반드시 규모가 충분해야 해. 난 그들이 무슨 곡을 연주했는지 몰라. 아무것도 현실적으로 들리지 않았던 것 같아.
하지만 알 수 있었어...
난 알 수 있었어…"

"알아야 할 것,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아. 악기를 직접 연주하고 싶지는 않아. 그럴 마음은 전혀 없어. 하지만 모든 악기에대해 알고 싶어. 하나하나의 악기가 어떤 소리를 내는지, 그 소리들의 한계는 어디까지이고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또 음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 사용하지 않는 음이 있어, 사용해야 하는 음도 있고, 그런 음들이 있다는 건 알아. 조, 오늘 음악이 어땠는지 알아? 마치 글로스터 대성당 지하에 있는 작지만 단단한 노르만 양식 기둥들 같았어. 그리고 이건 시작일 뿐이야."

"넌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지? 하긴 미친 소리처럼 들릴 거야하지만 난 미치지 않았어. 그리고…… 아! 조, 이렇게 커다란안도감을 느껴본 적이 없어. 마치 오랜 세월 연기하면서 살다가이제 더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 같은 기분이야. 이제까지난 음악이 소름끼치게 싫었어. 언제나. 하지만 이젠

 정말 신기했다. 평소의 버넌과는 완전히 달랐다. 마치조는 적당한 표현을 찾았다…… 마치 버넌은 갑자기 살아난 것같았다.
조는 두려움마저 느꼈다.

조는 단호하게 말했지만 내심 낙담했다. 부녀는 십 년 동안딱 두 번 만났고, 그들 사이에는 해묵은 적대감이 있었다. 이 계획은 의심할 것도 없이 조의 아버지인 웨이트 소령에게 달린 것이었다. 그는 일 년에 몇 백 파운드를 보내는 것으로 딸의 일에서 손을 떼고 있었다. 

아니다. 그건 죽어도 싫다! 진심으로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간청할 수는 없다. 버넌은 엄마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그랬던 적이 있었다고 할 수도 없다. 이상하고 슬프고, 조금은 끔찍하지만 그래도 사실이었다.

엄마를 다시 못 본다면 괴로울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엄마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지낸다면 안심은 할 것이다. 하지만그리워하지 않을 거고, 엄마의 존재를 절감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사실 그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다. 

버넌이 결국 해낼지 아니면 하찮은 미치광이 취급을 받게 될지는 모르겠어. 사실 그건 종이 한 장의 차이야 

버넌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게 아니야. 이미 있는 뭔가를 발견하려는 거지. 과학자와 비슷해. 제프리스는 버넌이 어릴 때 음악을 싫어했던 게 이해되고도 남는다고 했어. 버넌의 귀에는 음악이 불완전했던거야.…… 드로잉과 비슷해. 전체적인 균형이 맞지 않았던 거지.
버넌에게는 그 소리가 마치 아마 우리가 원시 부족의 음악을 듣는 것처럼 들렸을 거야 … 참기 힘든 불협화음으로.

시배스천은 비관적으로 말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버넌이 천재일지는 모르지만,
천재라는 사실과 성공은 완전히 별개거든. 사람들은 천재를 환영하지 않아. 어쩌면 버넌은 그저 살짝 미친 건지도 몰라. 가끔버넌이 떠들어댈 때 그렇게 보이기도 하니까. 어쨌든 버넌의 말이 옳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상한 방식이긴 하지만, 버넌은 그걸 잘 알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거든."

금빛 도는 긴 갈색 속눈썹에 둘러싸인 눈동자가 아주 파랬다.
넬은 머리 위의 나무에 핀 꽃 같았다. 아직 아무도 손대지 않은……… 봄꽃.

"응. 좋아하는 모든 걸 포기하고 자기가 선택한 일을 좋아하기로 한 거잖아. 그건 굉장한 거야!"

그들은 과거의 수많은 연인들이 꿈꾸던,
사랑하기 때문에 틀림없이 다 잘될 거라는 착각에 빠졌다. 

그녀는 엄마의 신랄한 말이나 어떤 태도에 알게 모르게 위축되곤 했다. 넬은 종종 자신을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난겁쟁이야. 어떤 일에도 맞서질 못해."

그녀는 분명 엄마를 두려워했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 지배당했다. 베리커 부인은 마음이 약한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는 비정하고 거만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빌은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고, 엄마 자신이 누리지 못한 행복을딸에게 주려고 굳게 마음먹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더 쉽게순종적이 되었다.

넬은 대문에서 뒤돌아보았을 때 아멜리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읽었다. 허기진 듯한, 부러운 듯한 표정이었다.

넬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했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걸까? 가난이 사랑을 소멸시키는 걸까?

"차라리 죽고 싶어요." 버넌이 비통하게 말했다.
제인은 눈썹을 치떴다.
"그럼 이 건물 꼭대기로 가서 뛰어내려요." 제인이 말했다.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왜 하는데요?"
"해야 하니까요."
"사실은 하고 싶어서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라면 진작 그만뒀겠죠"

☆그가 이야기를 마치자 제인이 말했다.
"당신은 인생을 동화 같은 걸로 생각하나보군요."

☆그 네 가지 중 한 가지는 이뤄질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려고 전력투구한다면요. 하지만 모든 걸 손에 넣긴 어려울 거예요. 인생은 싸구려 소설과는 다르니까."

☆"오라, 내가 어떻게 사는지 말하라, 그가 외쳤다." 
제인이 인용해서 말했다. 
• 루이스 캐럴 거울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문장, 애거사 크리스티의 자서전과 기행문 제목이기도 함.

"네, 내가 가진 많은 것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을 만큼 좋아합니다. 이상하죠? 난 조 말고는 원하는 걸 모두 가졌어요. 하지만내게는 그녀만 중요해요.. 정말 바보 같지만 그래도 어쩔 수가없어요! 조도 다른 여자들과 다르지 않을 텐데 말이에요. 다르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오직 조뿐이에요.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어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당신이 아끼는 천재라면 이탈하는 일도 좌절하는 일도 없을 테니까.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살다보니 그런 생각이 더 확고해졌어요."
"당신을 보면 어떤 것도 당신을 목적으로부터 떼어놓지 못할것 같아요. 당신은 추진력을 가졌어요."

시배스천, 사실은 내가 당신의 친구 버넌보다 더 쉽게 밀려날 수도 있는 사람이란 걸 모르겠어요? 난 내가 뭘 원하는지 알고 그걸 추구하지만 버넌은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도 몰라요.
아니, 어쩌면 그것을 원하지도 않을 거예요. 그런데 그건 그에게저절로 갈 거예요....... 그게 뭐든 그에게 주어지게 될 거라고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제인은 시배스천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리고 뺨에 입을 맞췄다.
"조와 잘되길 바랄게요. 하지만 잘 안 되더라도 당신은 분명다른 모든 걸 얻게 될 거예요!"

당신에게 고통을 준 모든 것, 즐거움을 준 모든 것.
그걸 전부 내 음악에 담아줘요. 무턱대고 쏟아내는 게 아니라 절제되고 단련된 힘으로 담는 겁니다. 당신은 지성과 용기를 갖췄습니다. 용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해낼 수 없고, 용기 없는 사람은 인생에 등을 돌리는 법이에요. 당신은 결코 그러지 않을 겁니다. 무슨 일이 닥치든 당신은 버티고 서서 고개 들고 그 일을직시할 거예요하지만 제인, 당신이 너무 큰 상처를 입진않길 바랍니다.

☆☆원하는 걸 얻으려면 대가를 치르거나 위험을 감수해야 해요. 
때로는 두 가지 다 해야 하죠

‘버넌을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을걸,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를 이만큼 사랑하지 않았다면! 두려워. 정말 두려워 ……

☆☆"제인, 당신에게 인생은 무엇입니까?"
그녀는 잠자코 있다가 입을 열었다.
"힘들고 위험하지만 흥미롭기 그지없는 모험이죠."

하지만 난 분명히 알아요. 버넌이 설득에 넘어갈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는 것을요. 당신이 그걸 뭐라부르든, 천재성이니 예술이니 하는 건 당신보다 훨씬 강하니까요. 차라리 해변의 크누트 왕이 나을걸요. 당신은 버넌을 음악에서 떼어놓을 수 없어요."

☆※막으려고 애쓰지만 결코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 잉글랜드의크누트 왕은 해변에 서서 육지로 밀려오는 물살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보여주려 했지만, 후대에는 그가 바닷물의 흐름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한 것으로 이야기가 변질되어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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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늙은이야. 내게 즐거움을 주는 음악이 있지 ……… 오늘 들은 것처럼 다른 음악도 있고… 하지만 난 천재의 작품은 알아볼 수 있어. 천재를 사칭하는 자가 백 명은 되지. 전통을 파괴하는 것만으로 대단한 것을 이뤘다고 생각하는 파괴자들이 수두룩해. 그런데 백한번째에 창조자가 있어. 대담하게 미래로 발을 내딛는 사람이그는 잠시 멈췄다가 이었다.

"그래, 나는 천재를 알아볼 수 있어, 설령 내 마음에 들지는않더라도 알아보기는 해. 그로엔이 누구든 그는 분명 천재일그건 미래의 음악이었네 ·

"거인! 자네와 그로엔은 아마 속으로 웃고 있겠지? 모두가 몰록 신상 같은 그것을 거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왜소한 인간이 진정한 거인이라는 건 아무도 몰랐어. 돌의 시대와 철의 시대를 거쳐 살아남은 인간, 문명이 붕괴되고 멸망한 뒤 다시 새로운 빙하시대를 이겨내서 우리가 꿈도 못 꾸는 새로운 문명으로 우뚝선 인간이 바로 거인이라는 걸 말일세

"나이가 들면서 확신하게 됐어. 인간만큼 가련하고 바보 같고 우스꽝스럽고, 그러면서 그다지도 완전히 놀라운 존재는 없다는 것을 …."

"궁금하군." 그가 말했다. "<거인> 같은 작품을 만들게 한 것이 말이야. 무엇이 그것을 만들었을까? 그 양분이 뭐였을까? 유전은 도구를 주고….. 환경은 그것을 연마해 완성시키고 …….…욕정은 그걸 일깨웠겠지 ....... 하지만 그 이상의 뭔가가 있어.
거인의 양식이.

피, 파이, 포펌,
영국인의 피 냄새가 나는구나
그가 살았건 죽었건
그놈 뼈를 갈아 내 빵을 만들 거야.

천재란 잔인한 거인이지! 인간의 피와 살을 먹고사는 괴물, 난 그로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는 분명 자기 피와살…… 어쩌면 다른 이의 피와 살까지 자신 안의 거인을 위해바쳤을 걸세..... 

정말 이상했다. 뭐가 이렇게 다 이상할까? 왜 전보다 별별 것들이 더 이상할까? 왜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할까?

버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구나! 유모가 고마웠다.
유모는 뭐든지 알았다. 그녀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버넌의 우주를 다시 가만히 세워주었다. 그녀는 절대 웃지 않았다. 

☆버넌은 그저 알고 싶었다. 알아야 했다. 그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의 일부였다. 모르는 게 없고 주머니에 동전을 넣고 다니는어른이 되는 과정.

짐승은 넓은 거실에 살았다. 다리가 네 개고 갈색 몸통은 반들반들했다. 또 한 줄로 길게 늘어선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는데더 어렸을 때 버넌은 그게 이빨이라고 생각했다. 크고 매끈하고누런 이빨, 처음 짐승을 봤을 때 버넌은 홀딱 빠지는 동시에 겁먹었다.

짐승은 건드리면 이상한 소리를 냈다. 화가 난 듯 으르렁대거나 날카롭게 울었는데, 세상 어떤 소리보다 버넌을 아프게, 몸속까지 아프게 하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으면 떨리고울렁거리고 눈이 따갑고 화끈거렸다. 하지만 묘한 끌림 때문에그 옆을 떠날 수 없었다.

이제는 많이 자라서 잘 알게 됐다. 그 짐승의 이름은 그랜드피아노이고, 짐승의 이빨을 두드리는 것은 ‘피아노 연주!‘ 이며, 만찬이 끝나면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그것을 해준다는 것을, 

버넌은 홀린 듯이 조금씩 다가갔다. 마침내 고모가 돌아봤을때 버넌은 눈물을 흘리면서 작은 몸을 떨고 있었다. 그녀는 연주를 멈추고 물었다.
"왜 그러니, 버넌?"
"난 그게 싫어요." 버넌이 훌쩍였다. "싫다고요. 그 소리를 들으면 여기가 아파요." 그러고는 두 손으로 배를 움켜잡았다.

"음악이 싫다면서 왜 그냥 나가버리지 않을까요?" 니나가 말했다.
"나갈 수가 없어요." 버넌이 울며 말했다.

"아, 그럴 수도 있죠!" 니나가 모호하게 말했다. "음악성이다른 방식으로 드러나기도 하니까요."
마이러는 니나가 데어 가 사람답게 엉뚱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음악성은 연주를 잘하느냐 못하느냐로 판가름나는 게아닌가싶었다. 버넌은 음악성이 없는 게 확실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언제나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대답해야 했다. 사실대로 말할수는 없었다. 그래봤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테니까.

"말할 수 없는 이야기들도 있단다. 한번 뒤처진 말은 승리의기회를 잡기 힘든 법이지 ….… 그게 아무리 애초의 실수라고 한들, 상황을 호전시키지는 못해. 넌 무슨 말인지 모를 거야. 아무튼 프랜시스와 있는 동안은 즐겁게 지내라. 그런 사람은 많지않으니까."

"눈앞에 있는 건 뒤에 있는 것만큼 무섭지 않아. 그걸 기억해. 뒤에 있는 건 눈에 보이지 않아서 무서운 거거든. 그러니까뒤돌아서 그걸 마주봐. 그러면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될 거야."

☆☆☆프랜시스는 독한 말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들을 때만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냉소했다.

오히려 이런 신경질적인 폭발에 뼈저린 고통과 불행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자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인간이란 얼마든지 자기 자신을 소름끼치는 혼란 속에 처박을 수 있는 존재야! 우리가 이렇게 된 건 전부 자기 자신 때문이야. 대단한 가족이지! 자신은 물론 우리와 관계한 모든 사람에게 불행을 안겨주니까."

"왜냐하면 데어 가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지도 못하고 성공하지도 못하니까. 잘 살아가질 못해."

버넌은 특이한 현상을 깨닫기 시작했다. 비극이 반복될 때마다 엄마는 더 커지고 아빠는 더 작아지는 것 같았다. 힐난고독설이 난무하는 감정의 폭풍이 지나가면 마이러는 몸도 마음도 고무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원기와 냉정을 되찾으며 비극에서 빠져나왔고, 그런 뒤에는 세상을 향한 선의로 넘쳐났다.

월터 데어는 반대였다. 아내의 맹공격을 겁내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예민하게 반응했고, 자기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그가 방어 무기로 사용하는 얼핏 정중해 보이는 냉소는 어김없이 아내를 극도의 분노 상태로 몰아갔다.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조용한그의 절제는 다른 어떤 것보다 그녀를 격분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고, 앞으로도 절대 달라지지 않아. 네가 각오해야 해, 마이러. 넌 돈 후안 같은 사람과 결혼했고, 노력했고, 너그럽게 바라보려고도 했었잖아. 넌 그를 좋아해, 키스하고 화해해. 그게 내가 해줄 말이다. 완벽한 사람은 없어. 주고받아야 한다는 걸 잊지 마라. 주고받기."

"결혼은 성가신 일이야." 시드니가 생각에 깊이 잠겨서 말했다. "우리 남자들에게 여자들은 과분하지. 그건 의심할 여지가없어."

애처로운 마이러. 그녀는 전반적으로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다. 그가 마이러와 결혼한 건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가 아니라애버츠 퓨어슨츠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이러는 그를 사랑해서결혼했다. 모든 문제가 거기서 비롯됐다.

월터 데어는 마음 한구석으로는 자신이 돌아오지 않는 편이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게 최선일 것 같았다. 그가 없어도버넌에게는 엄마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 생각을 하니 묘하게도 배반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그가 아들을 버리기라도 하는 듯이…

☆하지만 버넌은 집을 그리워하지 않았다. 엄마에 대한 열렬하고 진정한 애착도 없었다. 엄마와 떨어져 있을 때가 오히려 가장좋았다. 엄마의 감정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자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툭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라고 대답하던 어린 시절의 과묵함은 여전했다. 한두 사람과 이야기할 때가 아니면 그과묵함은 평생 계속될 것 같았다. 버넌에게 학교 친구들은 여러 가지‘를 함께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고 버넌은 속마음을 털어놓을 오직 한 사람을 원했다. 그 한 사람은 버넌의 인생에 일찌감치 들어왔다.

첫 방학을 맞아 돌아왔을 때, 버넌은 조지핀을 발견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 우리를 미워해." 시배스천이 말했다.
하지만 상관없어. 우리가 없으면 그들도 곤란해질 테니까. 우리 아빠는 정말 부자거든. 돈만 있으면 뭐든 살 수 있어."
시배스천에게는 묘하게 오만한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월터 데어는 전사할 경우를 대비해서 편지를 남겼다. 그러나 수신인은 마이러가 아니었고, 그녀는 이 편지에 대해 전혀 몰랐다. 그녀는 슬픔에 잠겼지만 행복해했다. 남편은죽어서 그녀 차지가 됐고, 그의 생전에 그런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마이러는 상황을 원하는 대로 만드는 능력을 발휘해서 자신의 결혼생활이 아주 행복했던 것처럼 그럴듯한 이야기를 엮어가기 시작했다.

사실 아빠는 돌아오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을 버넌은 알았다. 아빠가 불쌍했다. 언제나 그렇게 생각했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빠에게 느끼는 감정은 애도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가슴이저릿한 외로움 비슷한 것이었다. 아빠는 죽었다.……… 니나 고모도 죽었다. 물론 엄마는 살아 있지만, 그건 달랐다.

버넌은 엄마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러지못했다. 마이러는 늘 아들을 끌어안으며 이제는 우리가 하나가되어야 한다고 한탄했다. 하지만 버넌은 엄마가 듣고 싶어하는말을 할 수 없었다. 그냥 할 수가 없었다. 엄마 목을 껴안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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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흔히 알던 오페라가 아니었다. 줄거리도 없고 내세울 만한 주인공도 없었다. 오페라보다는 웅장한 러시아 발레에가까웠다. 특수효과와 특이하고 기이한 조명이 동원됐다. 모두레빈이 직접 고안한 것이었다. 예전부터 그가 연출한 작품들은획기적이고 감각적이라는 평을 들었다. 그는 이 공연에 제작자가 아니라 예술가로서 상상력과 경험으로부터 얻은 모든 것을쏟아부었다.

시배스천 레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소한 노인은 영국의 음악평론가들 중에서도 가장 저명한 칼 바우어만이었다. 두 사람은 레빈의 방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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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 적의 공습으로 사망한 부호, 고든 클로드.

공습 당시 그는 그의 어린 아내와 하인부부, 하녀1명과 아내의 처남과 같이 있었는데, 지하실로 대피한 5명 중 유일하게 그의 아내만 살아남았고, 혼자 동떨어져 2층 침실에 있던 처남 역시 죽음을 모면했다. 그렇게 살아남은 젊은 미망인, 로절린 클로드는 고든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게 되고, 그녀의 오빠와 함께 교외의 저택에 자리잡는다. 고든이 사망 전 금전적으로 도와주던, 그의 친척들은 그녀가 상속받은 재산에 자연스레 불만을 가지게되고, 그녀의 과거를 들춰내 그녀를 몰아내려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의 찬척들 중 고든의 동생, 라이오넬의 아내인 캐서린 클로드가 실종된 로절린의 전남편을 찾아달라며 포와로를 찾아온다. 그녀의 의뢰에 처음엔 거절하지만 이전에 들었던 고든의 사망기사, 그리고 며칠 후 접하게 된 이녹 이든의 사망으로 사건에 관심을 갖게된다. /1948

"실은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내 나름대로 아는 바가 있어요. 재미있는 얘기지.
아까도 말했듯이 난 그녀의 첫 남편인 언더헤이와 안면이 있거든요. 훌륭한 친구였지 한때는 나이지리아의 지방행정관을 지내기도 했는데, 자기 일에 대해

서는 아주 열심인 일류급 인물이었답니다. 그 친구가 그 여자와 결혼한 것은케이프타운에서였어요. 그녀는 그 당시 유랑 극단과 함께 거기에 와 있었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좋지 않은 일을 당해서 불쌍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지요. 그녀는 그 가련한 친구 언더헤이가 자기가 관할하고 있는 지역과 그곳의 광대한미개척 원(原)에 대해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걸 듣고는, ‘정말 멋지군요. 하며 부러움을 표시하고는 자신이 얼마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지를 넋두리해낸 게요. 그녀는 그와 결혼하는 바람에 소원대로 됐지요.

그 친구는 그녀를 몹시 사랑했답니다, 불쌍한 사람 같으니. 그런데 시작부터 일이 뒤틀린 게요. 그녀는 밀림을 싫어했고 원주민들도 두려워했으며, 또지루해 죽을 지경이었으니까. 그녀가 꿈꾸던 생활은 지방이나 돌아다니며 극장 사람들을 만나고, 전문적인 사업 이야기나 나누는 정도였으니까요. 따라서오지(奧地)에서 고독감을 느껴야 한다는 건 그녀가 꿈꾸던 것과는 전혀 다른것이었답니다. 물론 내가 직접 그녀를 만난 것은 아니고, 난 이 모든 얘기를언더헤이에게서 들은 거요. 그런 사실이 그 사람을 아주 곤란하게 만들었나봐요. 그래도 그는 그 일을 원만하게 처리해서 그녀를 집으로 보내면서 이혼을 해주겠다고 한 거요. 내가 그를 만난 것은 바로 그런 일이 있은 직후였지요. 그는 마음이 안정되지 못해서 아무한테나 애기를 털어놓고 싶어 했다오

그는 자기 생각은 그렇지가 않다고 하더군요.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하지만 난 천애고아나 다름없어요. 내게 신경 써 줄 친척이나 친지는 아무도 없어.
만일 내 사망 소식이 전해진다면 로절린은 미망인이 될 것이고 또 그건 그녀가 원하는 바이기도 하죠‘ ‘그러면 자네는?" 하고 내가 물었지요. 그랬더니 그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마 1천 마일쯤 떨어진 어떤 곳에서 이녹 이든이라는사람이 나타나서 새로 삶을 시작하게 될 겁니다."

"잘 알진 못하지만 안면은 있다오. 고든 클로드의 형인 제레미 클로드가 아

니오? 이것 참, 정말 재수 없군 내가 조금만 그걸 생각했어도 .."
"저 사람은 사무변호사예요." 젊은 멜론 씨가 말했다.

이 일은 1944년 가을의 일이었다. 그리고 포와로가 방문을 받은 것은 1946년 늦은 봄이었다.

"피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피하려 들 필요는 없지."

그는 이제야 클로드라는 이름이 왜 낯설지가 않았는지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 공습이 있었던 날 클럽에서 들은 얘기가 떠오른 것이다. 아무도 듣고 싶어하지 않은 얘기를 계속 떠들어대던 포터 소령의 지루한 목소리가 뇌리에 감돌았다. 그는 신문이 바스락거리던 소리와 포터 소령이 갑자기 턱을 떨어뜨리며깜짝 놀라던 표정이 기억났다.

☆동양에서의 그 타는 듯한 긴 여름엔 정말 웜즐리 베일과 초라하지만 시원하고 상쾌한 집, 그리고 사랑하는 어머니가 정말로 그리웠었다. 린은 어머니를사랑하면서도 동시에 귀찮게 여기기도 했었다. 하지만 집을 멀리 떠나 있으니어머니를 더욱 사랑하게 되고, 성가셨던 일은 잊어버리거나 아니면 향수병을더해 주는 것으로만 기억될 뿐이었다. 사랑하는 어머니, 그때는 정말 미칠 지경이었지! 어머니의 달콤한 불평 소리에서 어머니가 늘 하는 상투적인 잔소리하나라도 들을 수 있다면 뭐든지 다 드리고 싶을 정도였었어. 오, 다시 집에돌아가게 되면 다시는 절대, 절대로 집을 떠나지 않으리라!

☆이제 그녀는 군복무를 끝내고 자유의 몸이 되어 화이트 하우스에 돌아와있었다. 여기에 돌아온 지 3일이 되었다. 그런데 이미 이상할 정도의 불만족스런 불안감이 엄습해 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동안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주 한결같은 모습들이었다. 집이며 어머니며 롤리며, 그리고 농장과 친족들 모두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달라져서는 안 되면서도 달라져 버린 것은 그녀자신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비밀을 지켰다. 그러나 롤리는 외삼촌의 인자한 관심을 눈치챈 듯도 싶었다. 그는 자신과 조니가 돈을 대줄 만한 가치가 있는 젊은이들임을 외삼촌에게 증명해 보이려고 애썼던 것이다.
그랬다. 그들은 모두 고든 클로드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친척들이 식객이거나 게으름뱅이여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럼 그녀는 퍼로 뱅크에서 살고 있겠네요? 린이 알고 싶다는 듯 물었다.
"그래, 당연하지. 요양소에서 나와서 갈 곳이라고 별다른 데 있겠니? 의사들말로는 그녀는 런던 교외에서 지내야 한다더구나. 그래서 자기 오빠와 함께퍼로 뱅크에서 지내고 있단다."
"그 남자는 어떤 사람인데요?" 린이 물었다.
"무서운 청년이지!"

☆"정말 이상하기만 하단다. 고든은 늘 신중했었는데. 내 말은 여자 쪽에서 시도하지 않았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거란 얘기다. 예를 들어 그 마지막 비서만해도 그렇잖니. 정말 매우 뻔뻔스런 여자였지. 내가 볼 때는 매우 유능한 여자였지만 네 외삼촌이 그녀를 해고시켜 버려야 했을 정도가 아니었니."
린이 무심코 말했다.
☆☆"워털루야 늘 있게 마련이지요."(워털루는 벨기에 중부의 마을로 1815년 나폴레옹이 패전한 곳 ‘대 패배, 참패‘란 뜻으로도 쓰임.)

프랜시스가 의자 뒤로 몸을 기대며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내가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이 윗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제레미클로드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러한 몸짓은 유별난 것으로 자신이 내적 동요를 느낄 때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행동이었다.
프랜시스는 그의 그런 몸짓을 자주 보지는 못했다. 아들인 앤터니가 어렸을적 중병에 걸렸을 때 한 번, 판결문을 생각하는 재판관을 기다릴 때 한 번, 제2차 대전 발발 시 라디오로 전쟁포고문을 듣기 위해 기다릴 때 한 번, 그리고앤터니가 군대에 가기 바로 전날이 고작이었다.

그녀는 그의 이해심에 매우 감사해 했고 또 갑자기 늙어버린 듯한 모습을보며 매우 측은하게 여겼었다.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그녀의 마음속에는 뭔가가 응어리져 갔는데, 그 때문에 누구나 지닌 평범하고 보편적인 친절함이 다메말라버린 느낌이었다. 그녀는 그전보다도 더 정력적이고 더 유능해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끔 그녀의 엄격한 상식주의를 약간 염려하기도 했다.
제레미 클로드의 손이 다시 윗입술로 향했다. 불안하게 더듬거리는 모습이었다. 

"당신 정말 우습군요! 법률가인 당신 얼굴 뒤에는 꽤 놀라운 단편소설 같은생각이 있었군요 당신은 당신이 늑대들, 아니면 조키 클럽 등과 같은 곳의 임원들로부터 우리 아버지를 구해 주신 대가로 내가 당신과 결혼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방에 어떤 분위기(차가운 공기), 어떤 생각의 음영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프랜시스가 말했다.
"당신은 그런 사실을 내게 전혀 말해 주지 않았어요. 난 그녀가 아주 갖게되는 걸로 생각했지 뭐예요, 그래서 그녀가 죽을 땐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물려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거예요."

롤리 클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붉은 벽돌 빛의 피부에다 생각이 깊어 보이는 파란 눈과 매우 고운 머릿결을 지닌, 덩치가 크고 소박한 젊은이였다. 그는 몸에 밴 것이라기보다는 의도적인 것처럼 보이는 원만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재치 있게 즉답하는 재간을 부리듯 그는 신중함을 일종의 처세술로 이용하고 있었다.
"그래. 요즘에는 모든 게 돈으로 통하는 것 같아." 그가 말했다.

"오, 고마워요. 제가 너무 꼴사납게 보이는군요. 하지만 전 정말 매우 마음이 안 좋았어요. 그 불행한 사람아 그래요. 이런, 손이 끈적끈적하군요. 하지만 당신의 깨끗한 손수건은 사용하고 싶지 않아요. 하여간 정말 고맙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우린 죽음 속에 있는 생명, 그리고 생명 속에 있는 죽음이에요. 그래서 저는 죽은 제 친구들의 영체(體)를 본다 해도 놀라지 않을

" 그리고 경찰은 단순히 그 사람이 자기들을 화나게 한다는 이유로 그에게편견을 가지고 있어요. 그건 데이비드가 잘못이에요. 그는 사람들을 화나게 만드는 걸 좋아하거든요."
☆"경찰은 아가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편견을 갖고 있지는 않아요. 마치몬트 양. 그에 대한 편견은 배심원들의 마음속에 있었이요. 그들은 검시관의제안에 따르기를 거부했지요. 그들이 그에게 유죄판결을 내렸기 때문에 경찰이 그를 체포해야 했던 겁니다. 하지만 그들도 그가 유죄라고 보기에는 너무증거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다는 걸 알려 드려야겠군요."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죠. 그게 내가 하는 일입니다. 그저 얘기를 나누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사람들에게 살인사건에 대한 것들을 물어보시잖아요?"

포와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난 그저, 뭐라고 하면 될까, 뒷얘기나 주워 담고 있는 겁니다."

"오, 그렇게 보지 마세요, 포와로 씨. 너무 곤란해요. 그건 데이비드에 대한문제가 아니에요. 저에 대한 의문이었다고요! 전 변했어요. 34년 동안 나가있다가 이제 돌아와 보니 떠날 때의 저와는 다른 모습이었다고요. 그건 곳곳에서 보게 되는 비극적인 현상이에요. 사람들은 다들 변해서 집에 돌아왔지요.
그래서 스스로를 재조정해야만 되는 거죠. 선생님이라면 멀리 나가서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다가 하나도 변하지 않고 돌아올 수 있겠어요?"

☆☆"아가씨는 잘못 알고 있군요." 포와로가 말했다.
"인생의 비극은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오는 겁니다."

"아가씨는 멀리 떠나고 싶었던 겁니다. 해외로 나가서 세상을 구경해 보고싶었던 거지요. 아마 롤리 클로드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지금도 아가씨는, 여전히 벗어나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어요! 오, 봐요. 아가씨, 그처럼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답니다!"
"제가 해외에 나가 있을 때는 집이 그리웠어요." 린이 변명하듯 외쳤다.

"그렇지, 그래요. 아가씨는 자신이 있지 않은 곳에 있고 싶어 하는 성격이니까. 아마 아가씨는 늘 그럴 게요. 아가씨는 자신의 모습, 그러니까 집에 들어오는 린 마치몬트의 모습을 그려 보지만 그건 실현되지가 않지요. 왜냐하면아가씨가 생각하는 린 마치몬트는 진짜 린 마치몬트가 아니니까. 그 모습은아가씨가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린 마치몬트에 불과한 거지요."

"동기, 바로 그게 우리를 미궁에 빠뜨린 것이었소, 만일 A가 C를 죽일 동기를 가지고 있고 B가 D를 죽일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할 때 그렇다면 말이오,
A가 D를 죽이고 B가 C를 죽였을 가능성도 있을 법하지 않소, 총경?"
스펜스가 신음소리를 냈다.
"가만 계십시오, 포와로 씨, 여유를 가지시라고요. 전 당신이 AL B니 C니하는 말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이건 엘리자베스 시대의 연극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지만 그거나 다름없어요. 셰익스피어의 희곡과 매우 닮았지. 모든 감정인간의 감정들, 셰익스피어가 드러내려 한 감정들 시기심, 증오, 시시각각 변하는 열정적 행동들이 여기에 있으니 말이오. 게다가 여기에는 또한 성공을꿈꾸는 낙관주의도 가세되어 있어요. ‘인간사에는 조수가 있게 마련, 만조(滿湖)를 타면 행운으로 가고……. 누군가가 그 말에 따라 행동한 겁니다, 총경.
기회를 붙잡아서 그걸 자신의 목적에 이용하려 한 것 그리고 그건 완벽하게수행된 것이었소 말하자면 바로 당신의 코앞에서!?

"내가 보기엔 하나는 자살이고 또 하나는 우연사이고 또 하나는 타살이었소" 포와로가 말했다.

☆"무엇이 범죄를 유발시키는가?" 에르큘 포와로는 수사적인 어조로 물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자극을 필요로 하는가? 어떤 타고난 소질이 있어야 하는가? 누구나 다 범죄를, 어떤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저음에 나 자신이 물있던 겁니다만, 실생활로부터, 일상의 생존경쟁으로부터 보호되어 온상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이 갑자기그런 보호를 빼앗겼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내가 당신들에게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시련이 닥쳐올 때까지는 인간의 성격을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의 생애에 있어 그 시련은 일찍찾아오지요. 인간은 매우 빨리 자립해야 되고, 위험한 난관에 대처해 나가야 되고 또 그것들을 헤쳐나가는 수단을 취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하게 되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게 나가는 길이든 아니면 우회하는 길이든, 어떤 쪽으로든간에 인간은 대개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일찍 배우게 된다는 얘깁니다.

☆☆이 소설의 주제는 테니슨(A. Tennyson, 영국, 1809~1892)의 장편시 이녹 아든(Enoch Arden)‘을 이용했다.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부인은 재혼을 한다. 그러나 10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아든은 자기 아내가 친구인 필립과 결혼해서 사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아든은 자기만 나타나지 않으면 그들이 행복하게 살 거라고 생각하고 자살하고 만다.
테니슨의 시는 위와 같지만 이 소설에서는 이녹 아든의 의미가 꽤 다르게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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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큘 포와로 - 달걀형의 머리에 콧수염을 기른 사립탐정.
포터 소령 - 인도 주둔군 육군에서 퇴역한 군인이자 방공감시원으로 매우 수다.
스럽다.
고든 클로드 - 전쟁 중 적의 공습에 의해서 사망한 부호
로절린 클로드 - 고든 클로드의 젊은 미망인
이독 아든 - 케이프타운에서 왔다는 영국인.
제레미 클로드 - 고든 클로드의 형. 수석 변호사
프랜시스 클로드 - 제레미 클로드의 부인.
라이오넬 클로드 - 고든 클로드의 동생. 의사.
캐서린(캐시) 클로드 라이오넬 클로드의 부인. 실종된 로절린의 전남편을 찾아달라고 포와로를 찾아옴.

로버트 언더헤이- 로절린 클로드의 전남편, 아프리카 오지에서 열병으로 사망.
린 마치몬트- 고든 클로드의 조카로 WRNS(영국 해군 여자부대)를 제대한 뒤고향 화이트 하우스로 돌아옴.
롤리 클로드 - 린의 외사촌으로 그녀와 7년 전에 약혼한 사이
아델라 마치몬트 - 린의 어머니이자 고든 클로드의 누나,
데이비드 헌터- 로절린 클로드의 오빠
비어트리스 리핀 - 스태그 여관에서 일하는 여자.
스펜스 총경 - 살인사건 담당 형사.

"타임스지(紙)에 고든 클로드의 사망 기사가 실렸구먼." 
그가 말했다.
"아주 간단하게 실렸는데, ‘10월 5일 적의 공습에 의해서‘라는 정도로 말이오 주소는 나와 있지 않고 실은 그곳은 우리 집에서 모퉁이를 바로 돌아선곳인데 켐프든 힐 정상에 있는 큰 저택들 중 하나죠. 그 집은 내 신경을 건드리곤 했다오. 당신들도 알겠지만 난 방공감시원(防空監視員)이잖소, 클로드는미국에서 돌아온 지 며칠 안 되었어요. 그 사람은 자재 구매 건으로 정부로부터 파견되었는데, 그곳에 머무는 동안 결혼을 했더군요. 젊은 과부였지요 자기 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어렸지. 언더헤이라는 부인이었는데, 실은난 나이지리아에서 그녀의 첫 남편을 알게 되었답니다."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생겼거든요. 폭격으로 그 집 지하실이 폭삭 내려앉고 지붕이 날아갔는데도 2층만은 감쪽같았거든. 그 집에는 여섯 명이 있었는데 하인부부와 하녀 한 명, 고든 클로드와 그의 아내, 그리고 클로드의 처남이었소특공대 출신인 그 처남이라는 사람을 제외하곤 모두 지하실에 피신해 있었는(처남은 2층에 있는 자신의 안락한 침대를 더 좋아했다) 다행히도 그 사람은 약간의 상처만 입고 죽음을 모면한 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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