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에서 터지는 탄산의 죄책감 <화양연화>, 캄보디아
<화양연화>는 스쳐 지나가는 삶의 섬광 같은 찰나를 가장 아프고아름답게 잡아낸 영화였다.
홍콩 감독 왕가위가 연출한 <화양연화>의 영어 제목은 ‘In TheMood For Love 사랑하고 싶은‘ 였다. 차우와 리첸은 사랑하고 싶었다.
‘화양연화‘란 삶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뜻한다. 그런데 이 영화 속 차우와 리첸은 그 아픈 사랑을 절절히 앓고 있을 때, 정말 그 순간들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느꼈을까.
고통스러운 나날이아름다운 시절로 부활하는 것은 언제나 ‘먼 훗날‘이다. 현재 시제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결국 과거 시제에서 추억을 발명함으로써 스스로에게도 아름다웠던 시절이 있었다고 자위한다. 삶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이 언제나 과거라는 사실 속에 인간의 근원적인 절망이 있다.
앙코르 지역에서의 첫 일몰은 프놈 바켓에서 보았다. 프놈 바켓은앙코르에서 해가 지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는 사원이었다.
호수 한가운데서 코이는 엔진을 껐다. 거대한 정적이 세상을 지배했다. ‘관광‘의 마지막은 무거운 침묵이 지배했다. 흙탕물 속으로 그물을 던지던 아이들 쪽으로 애써 고개를 돌리다가 무의식적으로 손에 쥐고 있던 콜라 캔을 비웠다. 탄산이 입에서 톡 쏘며 가볍게 터지고 음료가 목구멍을 시원하게 넘어갈 때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다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해도, 비참한 생활의 현장을 구경거리로 소비하는 일만큼은 명백한 잘못이었다.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덜 갖춘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스스로가 상대적으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온당한 일일까. 나는정말 이들보다 더 행복한가.
이 흙빛삶의 터전에 비치는 태앙도 다른 어느 곳의 태양만큼이나 아름납다는 사실 속에는 기묘한 슬픔이 배어 있었다. 이 어행은 이제 내게 어떻게 남을 것인가.
무엇일까 어딜까 그저 또 <행잉록의 소풍), 오스트레일리아
소녀들이 사라졌다. 하늘과 땅 사이. 희박한 대기 속으로, 아무 흔적도 없이, 1900년 2월 14일 오후, 행잉록이란 산에 소풍 갔던 길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이득한 산과 들판 그리고 고택, 소녀들은대체 어디로 간 걸까.
행잉록의 소풍에는 마력 같은 게 있었다. 신비만 남겨두고 설명은 거세한 영화. 실종의 모티브가 그 영화의 전부였다.
어둡지 않은 침묵은 감미롭다. 수다스러운 어둠은 즐겁다. 허나침묵과 손잡은 어둠은 전혀 달랐다. 그림자처럼 몸에 붙어 떨어지지않았다. 내 발소리가 허리를 휘감고 타올랐다. 복도에 걸린 초상화들이 눈을 굴렸다. 1920년대에는 여기서 살인사건도 일어났다지. 저택은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의 무대 같았다.
<행잉록의 소풍>은 국내에서 정식으로 개봉된 적이 없지만, 입소문을 통해 소수의 열혈 추종자들을 거느리게 된 걸작이다. <트루먼 쇼>, <죽은 시인의 사회로 유명한 피터 위어 감독은 서른한 살 때 이 시대극을 신비롭고 우아하게 연출해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국민영화로 만들었다.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지만 내내 초현실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으스스한 긴장을 잃지 않는 개성 넘치는 스릴러. 빅토리아 시대의 억압적 환경 속에서 신부 수업을 받아오던 여학생들이 모처럼 행잉록이란 곳으로 소풍을 간다. 그런데 소풍지에서 세 소녀가 흔적도 없이 실종되고, 그들을 찾아 나선 여교사까지 없어진다.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겨울 바다에 갔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치바
부모님께 그들 사이를 인정받으려 떠났던 여정은 이별 여행이 되어버렸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츠네오는 경기 중 입은 부상 때문에 좋아하던럭비를 하지 못하게 된 게 아쉽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생각해도 소용없는 일은 그냥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 먼 훗날, 조제와의 지난 사랑에 대해 누군가 물을 때도 그는 그렇게 대답할수 있을까.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우리가 도망쳐왔던 그 모든 과거에 바치는, 돌아서서 뒤늦게 흘리는 눈물 같은 영화.
게으름 피울 수 있는 권리 <나니아 연대기>, 뉴질랜드
아름다운 해변과 풍요로운 농장, 돌아오는 차 안에서 "행운을 타고나셨군요" 하고 농담 삼아 말을 건넸더니 키라가 정색을 하고 답했다.
예전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그저 작고 조용한 내 나라가 답답하게만 느껴져 몇 년간 외국으로 떠돌았다고, 밖에 나가서야 스스로가 얼마나 행운아인지 깨달았다고, 다시 돌아온 나는 이 땅을 너무도 사랑한다고.
☆행복은 맛이 강하지 않은 최상급 포도주 같은 것이다. 얕은 입맛에는 무미건조하게 느껴진다.
뉴질랜드 남섬 캔터베리 지역에는 영화 <나니아 연대기>와 관련있는 여행상품이 나와 있었다. 이 영화가 주요 국가에서 개봉된 지불과 한 달 만인 2006년 1월 초부터였다. <반지의 제왕 2001~2003과<킹콩>2005에서 <나니아 연대기>까지, 세계인에게 뉴질랜드는 온통판타지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영화 속에 등장한 장소를 외지인에게 소개하는 게 생활인로브 같은 키위들에게 판타지는 곧 하루하루의 리얼리티였다. 여행객과 원주민, 남자와 여자, 그리고 나와 너. 리얼리티와 판타지를 가르는 것은 각도일 뿐, 사실 둘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 떠오르는 것이야말로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응축하는 상징일 것이다. 그게 공간이든 시간이든, 혹은 사람이든,
어디선가 풍겨오는 오래된 저택의 고가구 냄새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소피가 물었다. "한국에 언제 돌아가세요?" 미래의 시간과 과거의 공간, 그 불가해한 시공의 좌표평면 위 한 점이 내가 밟아야 할 귀환점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들 모두는 시간을 초대해 놓고 있었다. 어쩌면 우린 너무 서두르기 때문에 매번 늦는 게 아닐까. 전릭 질주하는 문명의 아찔한 속도 안에서 필요한 것은 혹시 이런 게 아닐까.
게으름 피울 수 있는권리, 최선이라는 말에 쫓기지 않을 권리, 주저하고 때로는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도 있는 권리.
잠시 스쳐 지났던 이 이국의 도시에서 늘 서두르기만 하는 나그네는 모처럼의 평안을 얻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충분했다. 어차피 여행에서 얻는 것은 학습이라기보다는 휴식이고 각성이라기보다는 추억일 테니.
봄의 판타지와 가을의 리얼리티. 떠나온 봄과 떠나갈 가을, 흘러가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시간 속을 우리가 흘러가는 것이다.
우울한일요일 filtomy Sunday‘ 을 뜻하는 영화 〈글루미 선데이>의 부제는 ‘사랑과 죽음의 노래‘ 였다. ‘사랑‘과 ‘죽음‘과 ‘노래‘, 음울하면서도 감상적인 사랑 영화에 이 세 가지 외 무엇이 더 필요할까.
남자는 어떤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 힌 그녀와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이아닐 때, 행복은 종종 무의미해진다.
일로나가 안드라스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난 다음날, 둘을 만난 사보는 말한다. "완전히 잃느니 한 부분이라도 가지겠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