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는 이미 끊어져 있었다. 테스의 아빠는 늘 정신없이 갑작스럽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마치 경찰이 도청을 하고 있어 위치를파악하기 전에 황급히 전화를 끊어야 하는 범죄자 같았다. 아빠는5년 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시드니와는 정반대에 있는 서부로 옮겨가선 작고 평평하고 나무도 없는 곳에서 살았다.
세실리아는 테스처럼 신비롭고 우아한사람들에겐 대책 없이 끌렸다. 세실리아의 친구들은 대부분 수다쟁이였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 목소리엔 늘 절망이 덧씌워져 있었다.
세실리아는 가끔 정말 중요한 일을 경험하고 싶다. 는 생각을 했다. 가끔은 자신의 인생이 너무나도 보잘것없게 느껴졌다.
지금 나, 재앙을 원하는 거야?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알고 싶어서 이 도시를 가르는 장벽이 생기길바라는 거야? 아니면 레이첼 크롤리 같은 비극을 겪고 싶은 거야?
정말 그런 걸 원해, 세실리아? 엄청나게 진지하고 흥미로운 비극 말이야? 물론 그렇진 않았다.
"모든 게 너무 힘들 게 느껴졌거든, 영원히 잠드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았어." 존 폴은 그렇게 대답했다.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옳지 않은 일을 해야 할 때도 있는 거다. 세실리아에겐 비윤리적인 일을 할 윤리적인 의무가 있다. 두 악 중에 작은 악을 행하는 거다. 세실리아에겐명분이 있다.
자니 크롤리 언니가, 레이첼의 따님이 저한테 다가왔어요. 언니는저를 일으켜세우고는 제 등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줬어요. 그리고제 귀에 대고 조용히 별일 아니야. 그냥 바보 같은 행진일 뿐이야 라고 해줬어요."
세실리아가 보기에 사람들에겐등이 굽거나 몸이 떨리기 전에 한때 믿었던 자기 몸을 더는 믿지못하는 시기가 오는 것 같았다.
"우리 아이들은 사내아이일 거 같아. 그리고 가장 친한 친구가될 거야." 메리가 말했다. "글쎄, 서로 죽이겠다고 덤빌 확률이 더 크지." 루시가 말했다.
코너는 에드와 악수를 하고 레이첼에게 차가운 뺨을 댔다. 레이첼에게코너는 악몽이었다. 시체가 든 관처럼 비현실적이고 잘못됐다. 몇달 뒤에 레이첼은 두 아이가 함께 있는 사진을 찾았다. 코너는 무슨 말인가 하고 있는 자니를 보고 웃고 있었다.
사람들은 보통 비극을 겪은 사람은 자동적으로 훨씬 높고 고상한 차원으로 올라간다고 믿지만, 레이첼이 보기엔 그 반대였다. 비극은 사람을 옹졸하고 편협하게 만든다. 위대한 지식이나 영감을 주는 일 따윈 없다.
레이첼은 그런 에드를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은 남편의 슬픔과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으면 했다. 절대 남편의 슬픔을 알고 싶지도, 느끼고 싶지도, 함께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의 슬픔만으로도 충분했다. 도대체 어떻게 남편의 슬픔까지 감당하란 말인가?
하지만 이제 레이첼은 궁금했다. 어째서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면서 함께 슬픔을 나누려고 하지 않았을까?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다. 하지만 자니가 죽었을 때 두 사람은 상대방이 우는 모습을 참아내지 못했다.
세실리아는 지금까지 수도 없이 분노해왔다고 생각했지만, 이제야 정말로 분노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았다. 순수한 진짜최대 분노 말이다. 진짜 분노는 미칠 것 같고 광포해지고 경이로운 느낌이었다. 세실리아는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악마처럼 서재를 날아서 날카로운 손톱으로 존 폴의 얼굴을 피범벅으로만들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살인 희생자는 언제나정확하게 살인 희생자처럼 보였다. 그런 운명이 미리 예정된 것처럼 모두 아름답고 순진하고 불운했다.
세실리아의 마음은 절대로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에 부딪친 것처럼 오싹하고 무시무시한 변하지 않는 사실로 돌아왔다.
"그건 마치 내 마음속에 괴물을 가두고 있는 것과 같아." 존 폴이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 괴물이 가끔 풀려나서 마구 날뛰는 거야. 그러면 난 다시그 녀석에게 잡혀야 해, 다시 사슬에 묶이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러다 당신을 만났지. 난 당신에게서 특별한 걸 느꼈어. 뼛속까지 선한 감정 말이야. 난 그 선함을 사랑하게 됐어. 마치 아름다. 운 호수를 보는 것 같았어. 당신이 날 정화시켜줄 수 있다고 믿은거야." 세실리아는 오싹해졌다. 난 선하지 않아. 마리화나를 피운 적도있다고, 우린 함께 술도 마셨잖아. 세상에, 난 당신이 내 모습을사랑한 줄 알았어, 선함이 아니라 번쩍이는 재치를, 유머 감각을사랑하는 줄 알았다고,
존 폴은 계속 말했다. 끝이 없었다. 세실리아는 몸속에 이상한벌레가 산다는 도시 괴담이 떠올랐다. 이 벌레를 없애는 유일한방법은 죽기 직전까지 굶은 뒤에 아주 맛있는 음식을 입에 물고벌레가 음식 냄새를 맡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음식 냄새를맡으면 벌레는 식도를 타고 올라와 입안으로 들어온다. 존 폴의목소리가 그 벌레처럼 들렸다. 끝도 없이 끔찍한 이야기가 그 입에서 흘러나왔다.
자기는 정말 보이스카우트 같아." 연인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윌은 그렇게 말했다. 영화를보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고, 어두운 거리에서 윌이 차 열쇠를 떨어뜨리자 테스가 가방에서 작은 손전등을 꺼냈을 때였다.
"무인도에 떨어져도 테스의 핸드백만 있으면 우린 충분히 살수 있어." 펠리시티가 말했다. 당연히 그 밤에, 펠리시티도 두 사람과 함께 있었다. 도대체 펠리시티가 없는 순간은 언제인 거야?
수십년동안 레이첼은 자니를 위해 무언가 해주고 싶었다. 여전히 자니의 엄마이고 싶었고, 자니를 위해 사소한 일들을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니에게해줄 수 있는 일을 찾았다. 내가 범인을 잡아줄게, 조금만 기다려,자니
테스는 윌과 펠리시티를 생각했다. 차가운 커피를 얼굴에 들이부었을 때 두 사람이 보였던 절실하고도 슬픈 얼굴이 떠올랐다. 펠리시티는 새로 산 눈처럼 하얀 실크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커피 얼룩은 절대로 빠지지 않을 거다.
베를린 장벽에 관한 책을 읽는 건세실리아가 정말로 생각하고 있는 걸 생각하지 않는 척하는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엄마는 이상하게 꼭 행복하면 울더라." 에스터가 말했다. "그러게." 세실리아가 대답했다. 행복한 결말은 언제나 세실리아를 울렸다.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이게 문제였다. 이제 존 폴의 모든 결점이 너무나도 크게 보였다. 그건 법을 준수하는 온화한 남편이자 아버지에게 결점이 있는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불편할 때에만 나타나는 특별한 고집, 역시 불편할 때만 가끔씩 나타나는 우울함, 말다툼을 할 때면 드러나는 참을 수 없는 가혹함, 단정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물건을 잃어버리는 경솔함 등의 결점은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그 때문에 평범하게 느껴져서 좋기도 했다.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생각을 한다. 생각은 위험하다.
잠시 테스는 기이하게 부적절한 행복이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슬픔의 골짜기에 둘러싸인 좁은 틈새 위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약간만 잘못 생각하면 그대로 굴러떨어질 수도 있었다.
테스는 언제나 부모님이 이혼했기 때문에 무언가 잘못되었다. 는 느낌을 받았다. 어렸을 땐 부모님이 함께 살았다면 자신이 훨씬 나은 삶을 살았을 거라고 공상하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결혼은 실패하기 마련이고, 아이들은 살아남는다. 테스도 살아남았다. 소위 말해 아이들이 받는다는 ‘상처‘는모두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아빠가 보내온 물건은 나무로 만든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나침반이었다. "정말 독특한 사람이라니까." 테스의 엄마가 곳방귀를 뀌었다. 테스는 나침반을 들어올렸다. 상자 밑엔 노란 포스트잇에 쓴 편지가 붙어 있었다. 테스가 편지를 읽었다.
☆사랑하는 테스, 이게 여자애들에겐 적절한 선물이 아닌 거 알아, 너에게 어떤 선물을 해야 하는지 한 번도 제대로 알았던 적이 없구나 하지만 길을 잃었을 것 같은 너에게필요한 게 뭐일지 고민해봤단다. 나는 길을 잃는 느낌이 어떤 건지 생생하게기억하고 있어. 정말 끔찍한 느낌이지. 하지만 내겐 언제나 네가 있었어. 너의길을 찾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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