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익명의 변호사란 소설(장르가 애매하긴 했지만)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은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 연재된 글을 출판한 것이었는데 어느 로펌 사무실에 인턴으로 취업한 한 법대생의 시각에 비친 로펌내의 요지경을 신랄한 필체로 엮어낸 글이었다. 알고보니 저자는 하버드대 로스쿨 출신의 25세 젊은이였다. 블로그활동을 하다가 출판사로부터 출판제의를 받는 경우가 많다고들 한다. 그만큼 인터넷 어법이 먹히는 시대가 되었다. 출판사로선 어떻게 하면 좀더 판매고를 올릴 수 있는 북메이킹 아이디어를 얻을까 늘 노심초사하는 터라 반응이 괜찮고 충격효과가 있으며 거기에 말부리는 재주를 갖춘 블로거라면 능히 접선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이 책의 지은이는 취업의 현장에서 여러차례 실패의 고배를 마시다가 어렵사리 한 회사의 부름을 받고 취업중인 초년 직딩이다. 물론 최근에는 그녀의 후배사원도 입사했다고는 했다. 이 책은 그녀의 고군분투 취업기와 취업초년병으로서의 감상기이다. 날렵한 언어감각으로 다분히 냉소적인(88만원 세대의 자조적인 항변을 상징하는) 어투를 휘날리고 있는 글들은 때로는 당혹감과 지리멸렬감에 휩싸이게 했다가 때로는 먹구름속을 헤치고 맑고 눈부신 태양을 만나는 듯한 상당히 대조적인 기분을 오락가락하게 만든다. 얼마전에 서울 대 치과병원의 진료를 받은 적이 있는 나는 그녀의 치과병원 의사경험기에 이르러 박장대소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케이라는 한마디에서 무려 10가지의 의미분수를 뿌려낼 줄 아니 심각한 망상가이지만 모든 사람의 가려운 부분을 싸릿 긁개로 치듯이 해소해주니 웃음을 참지 못할 수 밖에. 이 경험은 그녀로 하여금 푸꼬의 이론을 3프로, 아들딸, 손자손녀, 남편사위 가리지 않고 의사로 만들려는 대한민국 아주머니들의 마음을 70프로까지 이해하게 해주었다. 일상의 일을 글로 썼지만 교묘하게도 글 속에는 그 글과 관련된 책 한권이 들어간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마르께스의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가 가해자가 모호한 운명의 작동법칙을 설명하는 글에 기반이 되었다. 그녀가 도전하는 스타일은 치졸찬란 좌충우돌이지만 은근히 무시할 수 없는 힘을 보여주는 것은 이런 책읽기의 힘이 그림자로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한다면 이런 스타일은 조금 부담스럽다, 출판사의 의도가 너무 강해서서 작가도 약간의 손실을 보았다면 그럴 것이다. 제목부터그렇고 표지의 검정색 휘장도 도서구매자를 암울하게 만드는 어둠의 음습을 호시탐탐 노린다. 그게 나거든 하고 말한다면 뭐 할말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