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만 가지 죽는 방법 밀리언셀러 클럽 13
로렌스 블록 지음, 김미옥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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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이 난다고요. 신문을 펴 들기만 하면 언제든지 지랄같은 기사를 읽게 되죠. 정말 화가 나요."
"<보드빌 루틴>이 뭔지 아나? '박사님, 이 일을 하면 기분이 나빠요.' '그래, 그렇거든 그 일을 하지 말게!'"
"그래서요?"
"그렇다면 자네가 신문을 보지 말아야겠지."
나는 그를 빤히 쳐다봤다.-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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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만 가지 죽는 방법 밀리언셀러 클럽 13
로렌스 블록 지음, 김미옥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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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너그럽게 봐준다고 해도 <800만 가지 죽는 방법>은 시시한 탐정소설입니다. 정말 시시합니다. 사건도 그렇거니와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도 밋밋하기 그지없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을 빌리자면 ‘엣지’가 없어요. 그럼에도 <800만 가지 죽는 방법>은 무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매트 스커더. 무면허 탐정이자 알콜 중독자인 그에게 빠졌습니다. 그가 사건을 수사하는 방식에 반한 것이 아닙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그의 하루하루가 가슴을 움직인 겁니다. 머리로 이 작품을 읽기 시작한 멍청한 독자를 보기 좋게 골탕 먹인 거죠.

이야기 속 매트 스커더는 인생은 바닥을 찍은 상황입니다. 그는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의 주인공이 늘 그렇듯 비슷한 프로필가지고 있습니다. 전직 경찰이고, 이혼남이며, 경제적 상황은 형편없습니다. 꿈도 없고, 비전도 없을뿐더러 세상을 보는 시선조차 냉소적입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뉴욕)에 환멸을 느끼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매트 스커더는 어쩐지 특별해 보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살아가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하기 때문이죠. 끔찍한 사고 혹은 사건으로 인해 매일같이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뉴욕을 저주하고, 그런 도시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삶도 저주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환멸을 이겨내고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그래서 그를 응원하게 됩니다. 그가 굼뜬 태도로 수사를 해도 전혀 불만스럽지 않습니다. 그로서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니까요.

<800만 가지 죽는 방법>에는 또 다른 매력적인 인물이 나옵니다. 매트 스커더에게 사건을 의뢰하는 챈스라는 흑인입니다. 그의 직업은 포주입니다. 자기가 데리고 있던 창녀가 죽자 매트에게 사건을 의뢰한 거죠. 그는 여느 포주와는 다릅니다. 미술품이나 골통품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는 엘리트입니다. 세련된 스타일을 고수하고, 커피도 늘 최상급으로만 마시죠. 술이나 마약은 전혀 하지 않을뿐더러 섹스에 탐닉하는 부류도 아닙니다. 댄디함마저 느껴지는 이 흑인 포주는 파트너인 창녀들에게도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대합니다. 이런 포주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매트 스커더와는 완전 다른 부류지만 서로 통하는 지점이 있죠. 챈스가 등장할 때마다 어쩐지 레니 크라비츠라는 흑인 기타리스트가 떠오르더군요. 이미지가요.

‘800만 가지 죽는 방법’이라는 제목은 이 작품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제목입니다. 이 제목은 매트 스커더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고, 거대 도시 뉴욕을 이야기하고 있고, 동시에 이 작품을 읽는 이가 살고 있는 세상을 이야기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매트 스커더는 살기 위해 노력한다는 겁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정도로 세상과 자신에 환멸을 느끼고 있지만 말입니다.
바꿔 말하면, ‘800만 가지 죽는 방법’은 ‘800만 가지 살아가는 방법’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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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8-21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알콜 중독자가 나오는 탐정 소설이네요.알콜 중독자라니 갑자기 옛날 자유추리에서 나온 주정꾼 탐정이 생각나네요.과연 누가 더 주정꾼일까요 ^^

lazydevil 2009-08-21 10:28   좋아요 0 | URL
ㅎㅎ 제목이 주정꾼 탐정인가보죠?
이 작품은 수사일지라기보다 알콜중독 재활일기에 가깝습니다.^^

카스피 2009-08-23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제목 자체가 주정꾼 탐정입니다.아마 탐정이름이 커트 캐넌일겁니다.그 유명한 87분서 시리즈의 에드 맥베인이 지은 단편집인데,아쉽게도 단편집 한권으로 끝났지요.참 개성있고 매력적인 인물인데 말이죠.

lazydevil 2009-08-24 09:29   좋아요 0 | URL
오호~ 에드 맥베인 작품이군요. 더욱 궁금해지네요^^
 
최악 - 개정판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북스토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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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은 오쿠다 히데오가 쓴 진짜 소설입니다. <최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진짜입니다. 그들이 겪는 사건도 진짜입니다. 디테일도 진짜입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결말 역시 진짜입니다. 이번만큼은 진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쿠다 히데오는 작정하고 <최악>을 쓴 것 같습니다. 이번만큼은 진짜 이야기를 쓰겠다.

오쿠다 히데오의 탁월한 대중성은 가벼움에 있습니다. 이 사람은 무엇이든 살랑살랑 가볍게 이야기하는 재주가 있습니다. 적어도 앞서 읽은 작품들의 공통점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심각한 상황도 피식 웃음이 터지는 해프닝으로 보입니다.

인물들도 그렇습니다. 평범한 인물의 한 면을 부각시키고 과장합니다. 그 결과 인물은 평범함을 벗어던집니다. 특이하고 황당한 캐릭터가 되는 거죠. 이들이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면 특이하고 황당하게 과장된 일면만 적극 반응합니다. 그래서 남들과 다르게 행동을 하는 거죠. 그래서 이야기는 엉뚱하고 재미있게 흘러갑니다.

<최악>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적인 인물들이 현실적인 문제로 시달립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세 인물은 너무나 평범합니다. 스무 살 내기 양아치, 이십대 중반의 여자 은행원, 콩알만 한 공장을 운영하는 사십대 사장. 이들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독자가 알고 있는 양아치와 여자 은행원, 사장님을 대입해도 무방합니다. 그들이 겪는 사건들도 결코 새롭지 않습니다. 각 분야(?)에서 겪을 만한 그렇고 그런 문제일 뿐입니다. 그런데 왜 ‘최악’일까요?

그들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쓰나미가 아닙니다. 뜻하지 않은 만루 홈런을 맞고 역전을 허용한 투수의 상황이 아니라, 볼넷과 실책, 빗맞은 안타가 계속되며 매 이닝이 점수를 빼앗기며 힘겹게 경기를 이끌어가는 투수의 상황입니다. 이닝을  거듭할 수록 점수 차는 더욱 벌어집니다. 전세를 역전시킬 희망은 점점 멀어지는 거죠. 한계 투구수는 진작 넘었지만 교체할 투수도 없기에 마운드를 지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깨에도 이상 징후가 느껴지는군요.

아...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라는 작품에서 70이닝을 던진 선댄스 키드라는 투수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포수 부치 캐시디에게 한 말이 떠오르는군요.
“팔이 없어져 버렸어... 눈이 안보여... 60회쯤부터는 부치 소리가 나는 곳으로 던졌어. 부치 이 시합 어떻게 돼 가고 있지? 도중까지는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내가 말한 건 정말로 일어난 일일까?”
최악입니다.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시련은 인간을 도리어 강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도전 정신을 자극하는 거죠. 반면 작지만 거듭되는 일상적인 테러가 더욱 견디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조금씩 조금씩 잠식당하는 것, 이것이 바로 최악으로 가는 상황인 거죠.
<최악>을 읽는 동안 줄곧 생각했습니다. 나는 지금 최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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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09-08-13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데빌님 리뷰읽는게 책을 직접 읽는 것보다 재미있는 것 같아요 ㅎㅎ

저 평소에 최악이란 말 자주 쓰는데.. 으악 완전 최악이야!!!
(아시겠지만 제가 좀 오바 잘하잖아요 ㅋㅋ)
그에 비해 최고란 말도 비슷한 빈도로 쓰는 것 같네요. 주로 대박이란 단어를 사용해요 ㅋㅋ
최악과 대박의 반복인 일상이랄까~~
최악만 반복된다면 정말로 최악이겠네요. 휴-

lazydevil 2009-08-14 01:23   좋아요 0 | URL
최악이란 말, 무서운 말입니다. 주로 대박이란 말만 쓰시길 바래요~~
 
빛이 있는 동안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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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탐정소설을 좋아합니다.
한때 탐정소설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이른바 ‘순수문학’만 읽던 시기입니다. 몇 차례 탐정소설 읽기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탐정소설은 내게 어울리지 않아’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애거서 크리스티가 한몫을 했습니다.

몇 년 전, 탐정소설을 좋아하는 소중한 친구가 내게 크리스티의 작품을 권했습니다. <비뚤어진 집>이었습니다. 못이기는 척 받아들고 읽었지만 그닥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탐정소설은 내게 어울리지 않아...라고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영화로 제작된, 특히 드라마로 제작된 크리스티의 작품을 보면 재미있는데, 왜 원작은 시시할까? 아무리 장르문학이라지만 너무하잖아. 인물의 심리묘사는 빈약하기 그지없고, 문체는 또 왜이래? 도무지 문장을 읽는 맛이 없어. 범인이 누구인지가 중요하다면.... 차라리 90분짜리로 각색된 영화를 보는 게 났겠다. 그래 티비에서 방영한 미스 마플 시리즈는 45분만 투자하면 되는데 책을 읽기 위해 거의 이틀 동안 시간을 낭비해야한단 말이야!!??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에게 독자가 기대하는 것은 탁월한 문체와 삶에 대한 통찰력,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날카로운 눈이 아니라는 걸 이제야 깨달은 거죠.

<빛이 있는 동안>은 성공한 밴드의 b-sides 앨범과 같은 작품입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정규 작품집에 묶이지 못한, 혹은 포함되었더라도 끝자리로 밀린 단편들을 모아놓은 작품입니다.

작품집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그저 그렇습니다. ‘탐정소설의 왕언니’라는 명성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평범해집니다. 다만 몇몇 작품에서 크리스티의 다른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 큰 수확일 것 같습니다. ‘칼날’이나 ‘외로운 신’같은 단편은 크리스티의 또 다른 모습을 만날 수 있는 흥미로운 단편입니다. 동시에 ‘여배우’같은 작품은 우리가 알고 있는 크리스티의 솜씨가 제대로 들어난 임팩트 있는 단편입니다.

크리스티를 알고 나니 다소 느슨한 이런 작품집도 재미있군요. 그렇다고 소설을 읽고 즐기는 기준이 관대해진 것이 아닙니다. 소설을 즐기는 다른 방법을 조금씩 배워나가고 있는 거죠. 9년 전과 달리 탐정소설을 좋아하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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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8-12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이거 추리 단편집이었군요.해문 판본에 이런 제목의 책이 없어 전 크리스티 초창기의 로맨스 소설인줄 알았네요 ^^;;;

lazydevil 2009-08-12 13:48   좋아요 0 | URL
로맨스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작품이 여럿 등장합니다^^
열혈팬에게는 좋은 선물, 일반 독자에게는 상술... 정도로 보이지 않을까요?^^;

Forgettable. 2009-08-12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 그 자체만으로도 재미있는 소설이 있는가 하면
좋아하는 작가에 좋아하는 타입의 소설임에도 재미없는 작품이 있는데..

이 리뷰를 읽으며 소설을 즐기는 다른 방법을 배우는 태도가 중요하단걸 배우고 갑니다.ㅎㅎ

lazydevil 2009-08-12 13:49   좋아요 0 | URL
저도 배우고 있습니다...^^;
 
스퀴즈 플레이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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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퀴즈 플레이>를 다시 읽었습니다. 초판이 2000년 8월에 발행되었고, 곧바로 구입하여 읽었으니 거의 만 9년 만에 다시 읽은 셈입니다. 벌써... 9년입니다.

9년 전, 그러니까 <스퀴즈 플레이>을 읽던 그 시절, 폴 오스터에 빠져 있었습니다. 앞서 출간된 <문 팰리스(달의 궁전)>을 시작으로 <리바이어던(거대한 괴물)> <미스터 버티고(공중곡예사)> <뉴욕 삼부작> 등의 작품에 완전히 매료되었던 시기입니다. 이후 <동행>은 기대만큼 못했지만 <우연의 음악>은 좋았고요. 산문집인 <굶기의 예술>도 흥미로웠습니다. 그래서 <스퀴즈 플레이>를 집어 드는데 주저하지 않았죠. 좋아하는 작가의 습작소설을 읽는 것마저 즐거워했던 시절이었던 거죠.

9년 전 <스퀴즈 플레이>를 읽은 때는 폴 오스터를 기대하고 읽었지만 탐정소설이 보였습니다. 탐정소설은 물론 하드보일드 소설에서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던 때입니다. 그런데도 기억에 남는 것은 주인공 맥스 클라인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온갖 위협을 무릅쓰고 동분서주하던 것과 살인사건을 둘러싼 트릭이었습니다.
한 가지 더. 그간 수차례 탐정소설 읽기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악연을 <스퀴즈 플레이>가 끊어주었던 겁니다. 엉뚱하게도 폴 오스터의 습작을 읽으며 ‘탐정소설도 재미있을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비로소 하게 된 거죠.

다시 <스퀴즈 플레이>를 읽을 때는 하드보일드 소설을 기대하고 읽었지만 오히려 폴 오스터가 또렷하게 보이더군요. 그러니까 하드보일드 소설 특유의 정서보다는, 예기치 않게 탐정소설을 쓰게 된 무명작가 폴 오스터의 고단한 삶이 더 잘 읽혔습니다.
이 작품을 쓸 당시 폴 오스터는 생활고와 싸우던 무명작가였습니다. 주인공 맥스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은 돈벌이를 목적으로 <스퀴즈 플레이>를 쓴 폴 벤저민(폴 오스터의 필명)과 고스란히 겹치더군요.

이혼한 아내와의 가슴 아픈 사연과 아들 캐시에 대한 애정은 작가의 현재를 이야기하고 있거나, 다가올 미래를 예언하고 있는 듯합니다. 폴 오스터의 실제 사생활과 주인공 맥스의 사생활이 얼마나 겹치는지 따위의 가십거리를 캐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는 하드보일드 탐정소설답지 않게 탐정의 사생활이 절절하게 소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건수사와 하등에 필요 없는 부분인데도 말입니다.

맥스 클라인은 분명히 필립 맬로우나 루 아처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들보다 훨씬 자기연민에 빠진 인물입니다. 맥스 클라인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사건을 수사하고, 사건 속에 자신의 내면을 투영하고, 여러 인물들과의 만남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사건해결은 단지 빌미일 뿐입니다. 맥스가 목숨을 걸고 사건에 달려드는 것은 가학적인 존재확인법인 셈입니다.
폴 오스터가 <스퀴즈 플레이>를 출판업자에게 건냈을 때 “탐정소설적 요소만 빼면 뛰어난 심리 스릴러가 될” 거라는 반응이 나온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일 겁니다. 감추기 힘든 문학적 상피성이 드러난 것이죠. 다른 탐정소설과 ‘조금은’ 달랐고, 탐정소설을 좋아하지 않던 그 시절에도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습니다.

폴 오스터는 <빵굽는 타자기>에서 <스퀴즈 플레이>를 두고 “이 장르 소설로서는 그동안 내가 읽어온 수많은 작품보다 나쁘지 않아보였고, 몇몇 작품보다는 훨씬 좋아보였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동의합니다. <스퀴즈 플레이>는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을 흉내 낸 꽤 괜찮은 폴 오스터의 습작입니다. 하지만 <스퀴즈 플레이>는 큰돈을 벌어다주지 못했습니다. 크고 작은 난관을 겪은 끝에 겨우 출판되었고, 그 결과 폴 오스터의 손에 쥐어진 돈은 9백 달러가 고작이었으니까요.

탐정소설을 좋아하게 된 지금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스퀴즈 플레이>가 성공하였다면 폴 오스터의 인생을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그는 장르소설 전문 작가의 길로 접어들어 아직도 맥스 클라인 시리즈를 쓰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뉴욕 삼부작>이나 <문 팰리스>같은 작품을 쓰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군요.
그럼 폴 오스터가 <뉴욕 삼부작>과 <문 팰리스>를 쓰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9년전 <스퀴즈 플레이>를 읽지 않았을 겁니다. 아니 폴 오스터를 읽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또한 폴 오스터 덕분에 탐정소설을 읽게 된 것은 아니지만 폴 오스터 덕분에 탐정소설의 재미를 일러준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독자인 저도 많은 것이 바뀌게 되었겠죠. 많은 것이 말이죠.
아무튼 저는 지금 탐정소설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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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8-09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퀴즈 플레이가 성공했다면 폴 오스터는 아마 유명한 추리 소설가가 되었겠지요.미국은 국내와 달리 미스터리 소설에 대한 편견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의 문학적 재능이라면 <뉴욕 삼부작>과 <문 팰리스>와 같은 작품 역시 나왔을 거라고 생각되네요^^

lazydevil 2009-08-09 23:54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폴 벤저민이라는 필명으로 맥스 클라인 시리즈를 쓰는 한편 폴 오스터란 이름을 또 다른 작품 세계를 펼쳤을 거 같아요. 마치 로맹 가리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