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탐정소설을 좋아합니다. 한때 탐정소설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이른바 ‘순수문학’만 읽던 시기입니다. 몇 차례 탐정소설 읽기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탐정소설은 내게 어울리지 않아’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애거서 크리스티가 한몫을 했습니다. 몇 년 전, 탐정소설을 좋아하는 소중한 친구가 내게 크리스티의 작품을 권했습니다. <비뚤어진 집>이었습니다. 못이기는 척 받아들고 읽었지만 그닥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탐정소설은 내게 어울리지 않아...라고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영화로 제작된, 특히 드라마로 제작된 크리스티의 작품을 보면 재미있는데, 왜 원작은 시시할까? 아무리 장르문학이라지만 너무하잖아. 인물의 심리묘사는 빈약하기 그지없고, 문체는 또 왜이래? 도무지 문장을 읽는 맛이 없어. 범인이 누구인지가 중요하다면.... 차라리 90분짜리로 각색된 영화를 보는 게 났겠다. 그래 티비에서 방영한 미스 마플 시리즈는 45분만 투자하면 되는데 책을 읽기 위해 거의 이틀 동안 시간을 낭비해야한단 말이야!!??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에게 독자가 기대하는 것은 탁월한 문체와 삶에 대한 통찰력,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날카로운 눈이 아니라는 걸 이제야 깨달은 거죠. <빛이 있는 동안>은 성공한 밴드의 b-sides 앨범과 같은 작품입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정규 작품집에 묶이지 못한, 혹은 포함되었더라도 끝자리로 밀린 단편들을 모아놓은 작품입니다. 작품집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그저 그렇습니다. ‘탐정소설의 왕언니’라는 명성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평범해집니다. 다만 몇몇 작품에서 크리스티의 다른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 큰 수확일 것 같습니다. ‘칼날’이나 ‘외로운 신’같은 단편은 크리스티의 또 다른 모습을 만날 수 있는 흥미로운 단편입니다. 동시에 ‘여배우’같은 작품은 우리가 알고 있는 크리스티의 솜씨가 제대로 들어난 임팩트 있는 단편입니다. 크리스티를 알고 나니 다소 느슨한 이런 작품집도 재미있군요. 그렇다고 소설을 읽고 즐기는 기준이 관대해진 것이 아닙니다. 소설을 즐기는 다른 방법을 조금씩 배워나가고 있는 거죠. 9년 전과 달리 탐정소설을 좋아하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