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라의 비밀 약방
사라 페너 지음, 이미정 옮김 / 하빌리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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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좋아하는 요소들이었습니다.

연쇄 독살사건, 복수, 반전.

지나칠 수 없기에 읽어보았습니다.

오직 여자들에게만 열린다는 그 약방의 문.

조심스레 열어봅니다.


"그곳엔 여자들만 살 수 있는

독약이 있대"

18세기 연쇄 독살사건을 둘러싼 세 여자의 은밀한 모험


넬라의 비밀 약방



1791년 2월 3일


런던의 뒷골목 백 엘리 3번지에 숨겨진 약방.

문을 닫은 것처럼 보이는 텅 빈 가게 안에는 낡은 곡물통 하나만 덜렁 있을 뿐이지만 여자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 곡물통에 의뢰 편지를 두는 순간!

오래된 복수의 욕망이 실현될 수 있음을.


오늘.

아직 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의 편지가 넬라의 손안에 있었습니다.

2월 4일 새벽, 주인마님의 남편, 아침식사

그리고 독약을 받아 가기 위해 넬라를 찾아온 이는 여주인의 심부름을 온 열두 살 소녀 '엘리자'.


"엘리자, 이건 재미로 하는 게 아냐. 위장이 그 목적이지. 위장은 뭔가를 숨기는 일이야. 누구나 독약을 살 수 있지만 독약 알갱이를 스크램블드에그에 그냥 떨어뜨려 넣을 수는 없어. 그랬다가는 누군가 쓰레기 더미에서 독약의 잔여물이나 독약 상자를 찾아낼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아무도 추적하지 못할 정도로 교모하게 위장을 하는 거란다. 낡은 가게 안에 또 다른 가게를 위장해 넣은 것처럼 달걀 안에 독을 숨겨 넣는 거야. 그런 위장 덕분에 미리 약속하고 온 사람이 아니면 십중팔구 돌아서서 떠나고 말지. 저 앞쪽 약방은 날 보호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어." - page 57


호기심이 많은 이 아이.

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독약 약방에 잠시나마 유쾌한 분위기를 가져다준 엘리자.

하지만 이 만남은 예상치 못한 사건을 일으키는데...


현재, 월요일.

결혼 10주년을 맞아 런던으로 기념 여행을 오려고 했던 '캐롤라인'은 인생을 뒤바꿔 놓을 결정을 앞둔 채 슬픔과 분노, 시차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여행 전날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홀로 오게 된 런던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방황하다 '올드 플리트'라는 술집 입구가 보여 용기 내어 들어가려던 찰나.

인도에서 스쳐 지나친 훤칠하게 생긴 남자가 얼룩진 카키색 옷차림에 클립보드를 든 채 손짓으로 그녀를 불러 세웁니다.


"환상적인 '머드라킹(mudlarking)'에 참가하시겠어요?" - page 15


썩 내키지 않았는데...


"빅토리아 시대 작가들은 진흙 뒤지는 사람들에 관한 모든 것을 글로 썼어요. 오래되고 가치 있는 뭔가를 찾아 강가를 뒤지는 수많은 영혼들에 관한 이야기죠. 신발은 좀 젖을지 몰라도 과거에 몰입하는 방법 중에서는 진흙 뒤지기만 한 게 없어요. 조수가 밀려들었다가 빠져나갈 때마다 새로운 뭔가가 나오니까요. 진흙 뒤지기 투어에 참가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첫 체험은 항상 무료예요. 저기 보이는 벽돌 건물 반대편으로 오면 되니까......" - page 16


결국 템스강으로 가서 진흙 뒤지기 체험에 참가하게 됩니다.


"저기 죄송한데요, 실은 진흙 뒤지기가 뭔지 전혀 모르겠어요. 뭘 찾는 건가요?"

알프가 나를 쳐다보고는 배를 움켜쥐고 껄껄 웃었다. "이런, 제가 그걸 말해주지 않았군요! 자, 알아둬야 할 게 뭐냐면 말이죠, 템스강은 런던시를 관통해서 길게 흐르고 있어요. 그래서 이곳에서 오랫동안 진흙을 뒤지다 보면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의 잔재들을 찾을 수 있거든요. 오래전 진흙을 뒤졌던 사람들은 옛날 동전과 반지, 도자기를 찾아내서 팔았어요. 그게 빅토리아 시대 작가들이 썼던 이야죠. 먹을 빵을 사려고 진흙을 뒤졌던 가난한 아이들 이야기요.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냥 좋아서 진흙을 뒤져요. 자기가 찾아낸 건 자기가 갖는 게 원칙이에요. 자, 봐요." - page 44


그러던 중 그녀는 작은 곰 그림이 그려진 약병을 발견하게 되고 결혼과 함께 포기했던, 역사학 전공자로서의 10년 전 캐롤라인으로 돌아가 약병의 비밀을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곰'과 '약병'이라는 키워드로 찾다 보니 200년 전 약제사 살인사건을 접하게 되는데...


18세기와 현재의 런던이 교차되면서 펼쳐지는 세 명의 여주인공들의 이야기.

시간을 초월한 그들의 고통과 잃어버린 꿈과 탐색의 과정.

묘한 이끌림과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어느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 약병은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어느 한 탐구의 종말과 또 다른 탐구의 시작을 가져다주었다. 이 약병은 갈림길에 서서 진실 혹은 마법을 받아들이는 대신, 고통과 비밀을 던져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동화처럼 저항할 수 없는 매혹적인 마법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 page 403


누군가에게 '독약'으로 작용했지만 누군가에겐 '치료약'이었다는 것을.

여자들이 원하는 것을 주고 그들의 비밀도 지켜주고 그들의 짐을 다 받아낸 넬라.

하지만 정작 그녀는


"영원히 이렇게 살 수는 없겠지. 오래전에는 남에게 고통을 안겨주면 내 고통이 가라앉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어. 내 고통은 점점 더 악화되기만 했거든. 한주 한주가 지나면서 내 뼈마디가 붓고 아프기 시작하더구나. 이런 독약을 파니까 내 안이 망가져 가는 게 분명해.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무너뜨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야. 클라렌스 부인의 말을 너도 들었겠지만...... 내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거든." - page 187


결국 넬라는 우리에게 이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 고통을 없애주는 약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어." - page 187


참 씁쓸하게 다가왔었습니다.


오직 '여자'들에게만 약방의 문이 열렸다는 것이...

소설을 읽기 전과 읽고 난 후 만감이 교차하곤 하였습니다.

'독약'처럼 짜릿했던 만큼 긴 여운이 남았던 이 소설.

소설 속 두 여인이 저 역시도 아련히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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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지머지는 우리가 중세‘라고 부르는 아주 먼 옛날에 처음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지금은 부케‘라고 부르는 꽃다발이 바로그것입니다. 세균과 미생물을 죽이는 힘이 있는 허브로 만든 터지머지는 ‘병을 쫓는 약‘, 즉 예방약으로 쓰였습니다. 마력이깃들어 있다고 여긴 허브로 만든 터지머지는 ‘악령 퇴치용 약‘으로 마녀들이 만들어 썼습니다." - P32

"터지머지는 ‘꽃다발 편지‘라고도 불립니다. 편지 대신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러브 레터대신에 사용하면 효과가있습니다."
- P34

마음을 전하고 싶은 상대에게어울리는 꽃이나 허브를 준비합니다. 그리고 순서대로 원을 그리듯이 묶습니다. 가장 바깥쪽에는 레이스나 커다란 잎으로 테두리를 만듭니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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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집배원 아저씨는 즐거운 듯이 윙크를 했어요.
"바로 그거란다. 마법처럼 보이겠지만, 그건 정원 가꾸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아는 상식이야. 캐모마일은 ‘식물들의 의사 선생님‘이거든."
"식물들의 의사 선생님?"
식물의 의사 선생님, 그것은다른 식물을 도와주는 힘을 가진 식물이라는 뜻이랍니다. 캐모마일은 약해진 식물 옆에 심어 주기만 해도 그 식물을 건강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신비한허브였어요.
- P78

치코가 놀라서 자렛을 쳐다보았어요.
"이번에는 어떤 약인데? 역시 캐모마일을 사용하는 거야?"
"아니야, 치코, 약이 아니야. 더 중요한 것이 있었어."
편지를 가슴에 품고 꼭 쥐며 말했어요.
"고마워요, 바보아 할머니, 덕분에 겨울 요정이 잠들 방법이떠올랐어요. 그리고 이 캐모마일도 나에게 중요한 걸 가르쳐주었어요."
자렛은 다시 정원에 쭈그리고 앉아서 화단의 허브들을 건강하게 해 준 캐모마일을 살짝 쓰다듬었어요.
"도대체 어떤 방법을 쓸 건데, 자렛?"
궁금해하는 새끼 고양이들에게 자켓이 대답했어요.
"겨울 요정의 옆에 있어 주려고, 이 캐모마일처럼."
- P81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캐모마일이에요.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누군가를 건강하게 만드는 ‘마법의 힘‘을 쓸 수 있어요.
정말 멋지지 않나요?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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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의 우산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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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도 '황정은'이란 작가의 이름을 듣게 된 건 이 작품으로부터였습니다.

그렇다고 읽어본 건 아니었지만...

이번에 에세이 『일기』를 시작으로 『연년세세』를 읽고 난 뒤 사실 주춤하기도 하였습니다.

음...

무심하게 건넨 이야기는 자꾸만 뒤돌아보게 만들었고 그 무게감이 점점 무겁게 느껴져 쉬이 읽고 넘길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망설여졌는데...

근데 왜 또 궁금한 걸까...?

그래서 저에게 작가의 이름을 알게 해 주었던 이 작품을 읽어보기로 하였습니다.

"모두가 돌아갈 무렵엔 우산이 필요하다"

황정은이 담아낸 우리 시대의 사랑, 우리 시대의 삶

디디의 우산



역시나 이번 작품들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1996년 연세대 사태, 2008년 '명박산성', 2009년 용산참사, 2014년 세월호의 비극, 이윽고 2016~17년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이들의 이야기가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엔 저도 있었기에 이 복잡 미묘한 감정은...

책을 읽고 나선 또다시 방황하고 말았습니다.

책 속엔 두 개의 소설이 있었습니다.

우선 <d>는 연인'dd'의 죽음 이후 자신 또한 죽음과도 같은 날들을 보내던 'd'는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택배를 수집하고 상차하는 일을 하며 하루하루 속으로 침잠합니다.

혼자 지냈고

누구와도 긴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아무것도 기억에 남겨두지 않았고

하루는 그날의 수면으로 끝을 내는

이것이 d의 일상이고 패턴이었습니다.

여소녀가 있었습니다.

사십 년간 전축 수리를 하고 있었는데 잘못 배달된 택배로 d와 말을 섞게 되었고 여소녀의 가게에서 들려온 음악으로부터 d는 조금씩 세상 속으로 발을 딛게 되는데...

사랑하는 이의 부재에 대한 d의 모습이 좀처럼 잊히지 않았던 건 왜일까...

그것들을 고스란히 남겨두고 dd는 잠시 외출한 것 같았다. 어딘가에 틀림없이 있는 것 같았고, 그래서 오늘 저녁이나 내일 아침, 혹은 며칠 뒤, 아무렇지 않게 이 공간으로 돌아올 것 같았다. 그것은 언제일까. 지금은 아니고 아직은 아니지만 다음에서 다음으로 건너가는 지금이자 다음. d는 매 순간 벅차게 그 순간을 실감했고 매 순간 그 실감을 배반당했다. 사물들은 그런 착각을, 나중에 몇 배나 되는 상실감과 배신감으로 돌아오는 기대와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 d는 물건을 버리며 그 기만적인 기대와 거짓된 실감을 버렸다. - page 23

여소녀와 d는 대화 중 d는 1983년 2월 25일에 북한의 공군이었던 이웅평 대위가 러시아제 미그기를 몰고 남한으로 귀순한 일을 떠올리며 이야기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아시나요? 이웅평 대위가 전투기를 몰고 남한으로 넘어온 이유가 환멸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북측에서 해변을 산책하다가 남쪽에서 생산된 라면 봉지를 주웠는데 이런 안내문이 적혀 있었대요. 불량품은 판매처에서 교환이나 환불을 해드립니다. 그것을 읽고 남쪽엔 라면을 쌓아놓고 파는 장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기가 속한 체제에 깊은 환멸을 느끼게 된 나머지 귀순을 결심했다고 하네요. 그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가 부러웠습니다. 두 손으로 조종간을 붙들고 목적지를 향해 전투기를 몰아갔을 그 새끼가 너무 부럽다...... 남쪽의 가요를 방송하는 라디오 채널에 주파수를 맞춰두고 음악이 흐르는 전투기에 실려 북측과 남측의 경계를 향해 날아가던 순간, 그 아득한 허공을 날던 순간의 그가 말입니다. 죽음과는 얇은 금속판 한겹만을 남겨둔 채 체공하고 있었지만 그는 분명히 환멸의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어요. 그는 그것을 가지게 된 거죠. 탈출의 경험을.

내게는 그것이 없어.

나는 내 환멸로부터 탈출하여 향해 갈 곳도 없는데요. - page 113 ~ 114

환멸로부터 벗어나는 것.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자신에게 낙담하는 그의 모습.

그럼에도...

d는 다시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느꼈던 진공을 생각하고, 문득 흐름이 사라진 그 공간과 그 너머, 거기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과 d에게는 같은 것이 거의 없었다. 다른 장소, 다른 삶, 다른 죽음을 겪은 사람들. 그들은 애인을 잃었고 나도 애인을 잃었다. 그들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d는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무엇에 저항하고 있나. 하찮음에 하찮음에. - page 144

우리는 살아간다는 것을.

인간이라는 존재의 하찮음을 껴안고 어떻게든 살아가보겠다는 것이 가엾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그리고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구두회사 직원이자 완성하지 못한 열두 개의 원고를 지닌 작가 '나'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체육대회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서수경과 20년째 함께 살던 그들.

이 두 사람은 고교 졸업 후 이른바 1996년 '연대 사태'가 벌어진 연대 안에서 재회해 인연을 키우게 되면서 동거를 하게 됩니다.

서수경의 생일을 맞아 작은 파티를 계획하던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의 비극을 목격하게 되고 이 두 사람은 광장으로 거리로 나서게 됩니다.

서수경과 나는 방패를 들고 출동을 대기하고 있는 경찰들로 막힌 인도에서 차도로 내려섰고 그 길을 더 올라가 경찰버스들로 봉쇄된 세종대로 사거리에 이르렀다. 그곳에 당도해서야 우리는 우리가 청계광장 쪽에서 목격한 차벽 뒤로 몇겹의 벽이 더 있었음을 알았다. 북쪽과 남쪽을 잇는 세종대로는 두겹의 차벽으로 가로막혀 북쪽으로도 남쪽으로도 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우리는 오가는 차도 행인도 없이 넓은 도로가 깨끗하게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 세종대로 사거리는 두 개의 긴 벽을 사이에 둔 공간이 되어 있었다. 청계광장 쪽에서 차벽에 가로막힌 사람들이 지르는 함성이 들려왔다. 여태 많은 사람이 거기 남아 있는 듯했다. 이제 어떻게 할까.

더 가볼까? - page 290

수백만 촛불의 물결.

많은 사람이 혁명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 그 순간.

헌법재판소 재판관 여덟 사람이 대심판정에 입장하는 광경을 보고 우리도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2016헌나1 대통령 탄핵 사건에 대한 선고가 시작되었고 그 뒤로는 판결문을 낭독하는 목소리뿐이었다. 위배한 것이라고 볼 수 없고...... 부족하고...... 분명하지 아니하고...... 인정할 만한 증거는 없습니다...... 재판관이 판결문을 낭독해갈수록 우리의 얼굴은 빨개졌고 침묵은 무거워졌다. 서수경은 손끝으로 이마를 비볐고 나는 턱을 받친 손으로 입을 가렸으며 김소리는 손으로 눈을 문질렀다. 재판관이 생명권 보호의무에 대한 판결을 읽기 시작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 page 318

끝내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음을...

과연 혁명이었을까......

전에는 알지도 못했던 사회적 문제를 당사자로서 겪고 있는 사람들을 여기에서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은 것이 촛불집회에서 가장 크게 얻은 배움이라는 발언이 있고 얼마 뒤, 누군가의 폭죽이 무슨 이유에선지 점화되었다. 도로에 앉은 사람들의 머리 위로 불꽃이 짧은 꼬리를 달고 퍽, 퍽, 연달아 올라갔다. 사람들은 그쪽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폭죽을 끄라는 웅성거림이 일었다. 폭죽을 쥔 사람은 모직 코트를 입은 남성이었는데 그는 난감하다는 기색으로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흔들어 보이며 한번 점화되면 중간에 끌 수가 없다고, 어쩔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불꽃은 얼마간 그치지 않고 밤하늘을 향해 올라갔고 도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긴장과 걱정으로 침묵하며 그것을 보고 있었다.

서수경과 나는 그 침묵 속에서 함께 침묵하는 동안 평화적 시위를 원하는 사람들의 갈망에서 상처를 보았다. 누군가 다치는 광경을 우리는 너무 보았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누구도 다치게 하지 말라, 우리는 이미 너무 겪었다고. - page 308 ~ 309

이 소설 사이엔 한 문장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돌아갈 무렵엔 우산이 필요하다.

-「디디의 우산」(『파씨의 입문』, 2012)

시대가 주는 환멸과 낙담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던 그들의 모습에서 작가가 우리들에게 건넨 이 우산이 마냥 따스하게만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통해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 나아간다'라는 사실을 각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 어쩌면 다행으로 여겨지곤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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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여신 인안나 - INANNA, THE FIRST GODDESS
김산해 지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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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신화'라 하면 '그리스 로마 신화'가 떠오릅니다.

대중매체에서도 많이 언급되었고 서점가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기에 친숙(?) 하다고 할까.

최근에 다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으면서 너무나 흥미롭고 재미있었기에 이 기분 연장해서 어떤 걸 읽어볼까 기웃거리다가...


저에겐 너무나도 낯선, 생소한 이름이었습니다.

4,000여 년 전 수메르와 함께 인간의 기억에서 잊힌 여신이었다고 했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이 여신과 여신의 신성은 이름과 모습을 바꿔가며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집트, 그리스 문명권, 아라비아를 넘어 인더스강 유역까지 퍼져나갔다고 합니다.

여기까지 들었어도 크게 끌리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는데...


그는 악카드의 이쉬타르, 가나안의 아스타르테, 히브리의 아스다롯, 그리스의 아프로디테, 아테나, 헤라 등 사랑·전쟁·지혜·풍요·다산·아름다움·금성(金星) 등으로 상징화된 모든 여신의 원형은 바로 수메르의 인안나였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그리스의 아프로디테, 아테나, 헤라 등 여신의 원형이 그녀였다는 사실에 호기심이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이 책은 그 어떤 신들보다 더 신령스럽고, 용감하고, 강력한 '최초의 여신' 인안나를 입체적이고 완벽하게 복원해냈으며, 그 어떤 신화보다 스펙터클한 여신의 서사시를 펼쳐냈다고 하니 벌써부터 기대감이 뿜뿜!

인안나를 만나러 가 보겠습니다.


거룩하고 위대한 최초의 여신

인안나의 사랑과 죽음, 부활의 서사시


최초의 여신 인안나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더라도 신들의 대부분은 '남성'이었고 여신들의 활약은 미비하였습니다.

그렇게 세상은 한 남신의 천국으로 변했고 유일신의 지배지가 되고 말았었는데 ...


인류 문명의 모체 수메르가 케케묵은 먼지로 뒤덮여 있던 베일을 벗어던졌다. 최초의 수메르 신들이 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활짝 켰다. 안·엔키·엔릴·난나·우투 같은 남신들과 함께 시원(始原)의 여신 남마도 되살아났고, 창조의 모신(母神) 닌후르쌍도 되살아났으며, 땅의 여신 키도 되살아났고, 저승의 여왕 에레쉬키갈도 되살아났고, 인안나도 되살아났다. 그랬다. 이 세상에 존재해왔던 수많은 신의 조상신들이 모조리 되살아났다. 3,600이나 되는 신들은 다시금 만신전의 문을 열어젖히고 신명(神命)을 내렸다. 그리고 유일무이했던 한 남신은 물러갔다. - page 10


그렇게 위대한 여신-하늘과 땅의 여왕, 전쟁, 풍요, 다산, 완전하고 다양한 여성성, 여성적인 삶의 원리, 여성들의 수호천사, 품위 있고 당당한 부인, 수많은 도시와 왕들의 수호신, 금성(金星) 등으로 상징화된 여신들의 본바탕에 자리잡고 있던-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인안나'.


본문에 들어가기 앞서 책 속에 나오는 신들, 가게도, 도시와 신전들에 대해 정리가 되어있었습니다.

역시나 신화엔 많은 신들이 존재를 하고 족보를 따지다 보면 머리가 복잡해지고...

낯선 이름들에 책을 읽으면서도 자꾸만 넘겨보게 된 이 페이지들.

없었다면 중도에 포기할 수도 있었을 뻔했지만 덕분에 초반의 방황은 후반엔 이름들이 친숙하게 다가왔습니다.




세상천지의 기운을 몽땅 손아귀에 넣고도 성이 차지 않았던, 권세와 부귀를 모조리 누려도 만족스럽지 못했던 인안나.

사랑과 질투로 몸부림치고, 전쟁과 복수로 핏발이 서고, 하늘과 땅의 신령스런 기운으로 기세등등한 그녀였지만 저승까지 차지한다면,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누릴지도 모를 최고신(最高神)의 영광이 될꺼라 생각한 그녀.

그러나 저승은 그녀에게 볼모지나 다름없었습니다.

하지만 인안나는 자신의 힘을 굳게 믿고 가장 큰 욕망 덩어리를 심장 깊은 곳에 숨긴 채 저승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여기서 인안나의 ''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메'의 본질은 신성한 권능이고, 삼라만사의 총체적인 질서이며, 지혜의 정수입니다.

'메'를 통해서 문명이 일어났고, 문화가 형성되었으며, 미개와 무질서가 사라졌습니다.

도시가 생겼고, 신전과 가옥이 높고 튼튼하게 올라갔으며, 길이 넓혀졌고, 재물이 쌓였고, 직업이 늘어났고, 강의 물줄기가 잡혔으며, 단단한 그릇을 빚어냈고, 멋진 옷을 지어 입었고, 좋은 음식을 만들어 먹은 것은 '메'로부터 얻은 혜택이었습니다.

규칙과 규범이 세워졌고, 사회가 정비되었으며, 경제의 체계가 잡혔고, 왕권과 왕위가 확립되었고, 언어와 문자가 사용된 건 '메'에서 나온 기운이었습니다.

기쁨과 슬픔의 춤을 추었고, 악기를 치고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고, 향기로운 술을 마셨고, 달콤한 우유를 들이켰고, 배에 올라 먼 곳을 여행했고, 사랑다운 사랑을 즐길 수 있었던 건 '메'가 가져다준 운명이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메'로부터 나오게 되는데 이 '메'의 집행자인 엔키로부터 쟁취하게 됩니다.

'메'를 손에 넣은 인안나는 저승을 향해 당당히 떠나는데...

저승으로 떠난 인안나 앞에 놓인 운명은 장차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



와~!

우선 감탄이 나왔습니다.

왜 이제서야 그녀를 알게 되었을까!

읽으면서 비슷한 이야기가 떠오르게 되는데 이것이 '원형'이었다는 사실을!

특히나 <인안나의 저승 여행>이라는 점토판으로 남아있는 400여 행의 짧은 서사시가 지금 우리 앞에 생동감 있게 다가와 너무나 감탄스러웠습니다.

모든 여신의 원형인 인안나.

이젠 그녀의 이름을 새겨보겠습니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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