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디의 우산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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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도 '황정은'이란 작가의 이름을 듣게 된 건 이 작품으로부터였습니다.

그렇다고 읽어본 건 아니었지만...

이번에 에세이 『일기』를 시작으로 『연년세세』를 읽고 난 뒤 사실 주춤하기도 하였습니다.

음...

무심하게 건넨 이야기는 자꾸만 뒤돌아보게 만들었고 그 무게감이 점점 무겁게 느껴져 쉬이 읽고 넘길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망설여졌는데...

근데 왜 또 궁금한 걸까...?

그래서 저에게 작가의 이름을 알게 해 주었던 이 작품을 읽어보기로 하였습니다.

"모두가 돌아갈 무렵엔 우산이 필요하다"

황정은이 담아낸 우리 시대의 사랑, 우리 시대의 삶

디디의 우산



역시나 이번 작품들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1996년 연세대 사태, 2008년 '명박산성', 2009년 용산참사, 2014년 세월호의 비극, 이윽고 2016~17년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이들의 이야기가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엔 저도 있었기에 이 복잡 미묘한 감정은...

책을 읽고 나선 또다시 방황하고 말았습니다.

책 속엔 두 개의 소설이 있었습니다.

우선 <d>는 연인'dd'의 죽음 이후 자신 또한 죽음과도 같은 날들을 보내던 'd'는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택배를 수집하고 상차하는 일을 하며 하루하루 속으로 침잠합니다.

혼자 지냈고

누구와도 긴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아무것도 기억에 남겨두지 않았고

하루는 그날의 수면으로 끝을 내는

이것이 d의 일상이고 패턴이었습니다.

여소녀가 있었습니다.

사십 년간 전축 수리를 하고 있었는데 잘못 배달된 택배로 d와 말을 섞게 되었고 여소녀의 가게에서 들려온 음악으로부터 d는 조금씩 세상 속으로 발을 딛게 되는데...

사랑하는 이의 부재에 대한 d의 모습이 좀처럼 잊히지 않았던 건 왜일까...

그것들을 고스란히 남겨두고 dd는 잠시 외출한 것 같았다. 어딘가에 틀림없이 있는 것 같았고, 그래서 오늘 저녁이나 내일 아침, 혹은 며칠 뒤, 아무렇지 않게 이 공간으로 돌아올 것 같았다. 그것은 언제일까. 지금은 아니고 아직은 아니지만 다음에서 다음으로 건너가는 지금이자 다음. d는 매 순간 벅차게 그 순간을 실감했고 매 순간 그 실감을 배반당했다. 사물들은 그런 착각을, 나중에 몇 배나 되는 상실감과 배신감으로 돌아오는 기대와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 d는 물건을 버리며 그 기만적인 기대와 거짓된 실감을 버렸다. - page 23

여소녀와 d는 대화 중 d는 1983년 2월 25일에 북한의 공군이었던 이웅평 대위가 러시아제 미그기를 몰고 남한으로 귀순한 일을 떠올리며 이야기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아시나요? 이웅평 대위가 전투기를 몰고 남한으로 넘어온 이유가 환멸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북측에서 해변을 산책하다가 남쪽에서 생산된 라면 봉지를 주웠는데 이런 안내문이 적혀 있었대요. 불량품은 판매처에서 교환이나 환불을 해드립니다. 그것을 읽고 남쪽엔 라면을 쌓아놓고 파는 장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기가 속한 체제에 깊은 환멸을 느끼게 된 나머지 귀순을 결심했다고 하네요. 그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가 부러웠습니다. 두 손으로 조종간을 붙들고 목적지를 향해 전투기를 몰아갔을 그 새끼가 너무 부럽다...... 남쪽의 가요를 방송하는 라디오 채널에 주파수를 맞춰두고 음악이 흐르는 전투기에 실려 북측과 남측의 경계를 향해 날아가던 순간, 그 아득한 허공을 날던 순간의 그가 말입니다. 죽음과는 얇은 금속판 한겹만을 남겨둔 채 체공하고 있었지만 그는 분명히 환멸의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어요. 그는 그것을 가지게 된 거죠. 탈출의 경험을.

내게는 그것이 없어.

나는 내 환멸로부터 탈출하여 향해 갈 곳도 없는데요. - page 113 ~ 114

환멸로부터 벗어나는 것.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자신에게 낙담하는 그의 모습.

그럼에도...

d는 다시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느꼈던 진공을 생각하고, 문득 흐름이 사라진 그 공간과 그 너머, 거기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과 d에게는 같은 것이 거의 없었다. 다른 장소, 다른 삶, 다른 죽음을 겪은 사람들. 그들은 애인을 잃었고 나도 애인을 잃었다. 그들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d는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무엇에 저항하고 있나. 하찮음에 하찮음에. - page 144

우리는 살아간다는 것을.

인간이라는 존재의 하찮음을 껴안고 어떻게든 살아가보겠다는 것이 가엾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그리고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구두회사 직원이자 완성하지 못한 열두 개의 원고를 지닌 작가 '나'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체육대회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서수경과 20년째 함께 살던 그들.

이 두 사람은 고교 졸업 후 이른바 1996년 '연대 사태'가 벌어진 연대 안에서 재회해 인연을 키우게 되면서 동거를 하게 됩니다.

서수경의 생일을 맞아 작은 파티를 계획하던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의 비극을 목격하게 되고 이 두 사람은 광장으로 거리로 나서게 됩니다.

서수경과 나는 방패를 들고 출동을 대기하고 있는 경찰들로 막힌 인도에서 차도로 내려섰고 그 길을 더 올라가 경찰버스들로 봉쇄된 세종대로 사거리에 이르렀다. 그곳에 당도해서야 우리는 우리가 청계광장 쪽에서 목격한 차벽 뒤로 몇겹의 벽이 더 있었음을 알았다. 북쪽과 남쪽을 잇는 세종대로는 두겹의 차벽으로 가로막혀 북쪽으로도 남쪽으로도 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우리는 오가는 차도 행인도 없이 넓은 도로가 깨끗하게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 세종대로 사거리는 두 개의 긴 벽을 사이에 둔 공간이 되어 있었다. 청계광장 쪽에서 차벽에 가로막힌 사람들이 지르는 함성이 들려왔다. 여태 많은 사람이 거기 남아 있는 듯했다. 이제 어떻게 할까.

더 가볼까? - page 290

수백만 촛불의 물결.

많은 사람이 혁명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 그 순간.

헌법재판소 재판관 여덟 사람이 대심판정에 입장하는 광경을 보고 우리도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2016헌나1 대통령 탄핵 사건에 대한 선고가 시작되었고 그 뒤로는 판결문을 낭독하는 목소리뿐이었다. 위배한 것이라고 볼 수 없고...... 부족하고...... 분명하지 아니하고...... 인정할 만한 증거는 없습니다...... 재판관이 판결문을 낭독해갈수록 우리의 얼굴은 빨개졌고 침묵은 무거워졌다. 서수경은 손끝으로 이마를 비볐고 나는 턱을 받친 손으로 입을 가렸으며 김소리는 손으로 눈을 문질렀다. 재판관이 생명권 보호의무에 대한 판결을 읽기 시작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 page 318

끝내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음을...

과연 혁명이었을까......

전에는 알지도 못했던 사회적 문제를 당사자로서 겪고 있는 사람들을 여기에서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은 것이 촛불집회에서 가장 크게 얻은 배움이라는 발언이 있고 얼마 뒤, 누군가의 폭죽이 무슨 이유에선지 점화되었다. 도로에 앉은 사람들의 머리 위로 불꽃이 짧은 꼬리를 달고 퍽, 퍽, 연달아 올라갔다. 사람들은 그쪽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폭죽을 끄라는 웅성거림이 일었다. 폭죽을 쥔 사람은 모직 코트를 입은 남성이었는데 그는 난감하다는 기색으로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흔들어 보이며 한번 점화되면 중간에 끌 수가 없다고, 어쩔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불꽃은 얼마간 그치지 않고 밤하늘을 향해 올라갔고 도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긴장과 걱정으로 침묵하며 그것을 보고 있었다.

서수경과 나는 그 침묵 속에서 함께 침묵하는 동안 평화적 시위를 원하는 사람들의 갈망에서 상처를 보았다. 누군가 다치는 광경을 우리는 너무 보았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누구도 다치게 하지 말라, 우리는 이미 너무 겪었다고. - page 308 ~ 309

이 소설 사이엔 한 문장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돌아갈 무렵엔 우산이 필요하다.

-「디디의 우산」(『파씨의 입문』, 2012)

시대가 주는 환멸과 낙담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던 그들의 모습에서 작가가 우리들에게 건넨 이 우산이 마냥 따스하게만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통해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 나아간다'라는 사실을 각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 어쩌면 다행으로 여겨지곤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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