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곳의 오우너고 너도 언젠가는 오우너가 될 거다.' - page 10
마포구 서화동에 위치한 프라이빗 키친인 '금귀비 정찬'.
이곳에는 주력 메뉴도 고정 메뉴도 없습니다.
심지어 100% 예약제에다가 최소 일주일 전에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입장이 불가한 불친절한 식당입니다.
위치도 전혀 이점이 없는데, 동네는 지나치게 조용하고 주변 건물은 낡은 것들뿐인, 그야말로 실패하는 자영업 조건이 총망라된 이곳에서 성공 신화를 이룬 식당이 바로 금귀비 정찬입니다.
오롯이 예약자를 위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요리를 만들어내는 이곳의 사장 금귀비는 외동딸인 문망초에게 계약을 제안합니다.
1. 금귀비 정찬 오너가 되기 위해 문망초는 손님 7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아야 한다.
2. 서명을 받기 위해 손님들의 편식을 개선한다.
3. 이는 신체적 알레르기 반응이 아닌 오직 심리적 편식만을 말한다.
4. 이름은 '물망초 식당'으로 하며 100일간 식당의 경영자 겸 총괄 셰프가 된다.
5. 손님은 친구나 친인척이어서는 안 된다.
6. 필요에 따라 금귀비의 조언을 들을 수 있으나 의존해서는 안 된다.
오직 한 명의 손님만을 위한 식사.
당장 첫 번째 손님부터 어떻게 데려올지 머릿속이 하얀 상태였지만...
건강이 나빠지는 엄마를 대신해 가게를 이어받기 위해선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봅니다.
"왜 하필이면 조건이 편식이야?"
벽 간판 속 가게 이름과 엄마를 번갈아 바라보며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엄마 역시 나와 벽 간판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엄마답게 차분한 목소리였다.
"요리하는 사람이라면 사람을 사랑해야 하거든."
그게 편식이랑 무슨 상관이야?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엄마의 말뜻을 알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계약서에 서명했으니 가타부타 따지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아빠가 늘 했었던 말이었으므로 내게는 익숙했다. 어째서 그게 편식과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물망초는 내 이름 문망초에서 그냥 따온 거야?"
"그냥이란 건 없어. 거기에도 이유가 있어."
"이유가 뭔데?"
"물망초의 꽃말이 뭔지 아니?"
"진실한 사랑, 나를 잊지 말아요."
"그래, 그거야. 네 이름에도, 그 식당에도 꼭 필요한 거야." - page 25 ~ 26
첫 손님 '변유현'은 어린 시절 엄한 훈육으로 매운 음식, 특히 김치에 대해 트라우마를 갖고 있었습니다.
"네, 이후로 저는 김치를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수치심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답 없는 제 모습에 부모님도 김치 먹이기는 포기하셨어요. 고작 음식 따위에 마음이 요동친다는 점이 자존심 상합니다. 저를 괴롭혔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어요." - page 36
심리적 편식에 대해 알아보다 의외의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편식이란 음식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기억에 대한 저항이라는 것을.
맛과 식감, 재료 특성에 거부감을 느끼는 게 아니라면 편식자는 음식이 아닌, 그 음식에 얽힌 기억을 거부한다는 것을.
유현은 김치를 향해 표현하는 거부감도 일종의 두려움이었고 이 두려움을 어떻게 없앨지가 관건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피가 두꺼운 찐빵을 사서 친구 동희네에 놀러 가게 됩니다.
망초는 고등학생 때 개에 물린 탓에 개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는데 동희에겐 입양한 말티즈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강아지를 향해 무심코 소리를 지르게 된 망초에게 동희가 겉모습이 개일뿐, 과거에 너를 문 개와는 다르다고 조언하면서 망초 역시도 그저 개라는 이유로 무차별적인 두려움을 품었으며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표출했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또한 피가 두꺼운 찐빵을 통해 겉모습과 본질의 차이를 깨닫게 되면서 유현을 위해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김치만두와 고기만두를 준비합니다.
"겉과 속이 일치하는 게 세상에 얼마나 될까요?" - page 59
그렇게 유현은 김치만두를 맛보게 되면서 수년 만에 김치를 먹게 됩니다.
"이 김치만두는 이제 유현 씨를 괴롭히지 않아요."
"그렇겠죠......"
"하지만 유현 씨가 겁을 낸다면, 언제까지고 괴롭힐 수 있어요. 뒷걸음질 치는 사람은 괴롭히기 쉬우니까요."
...
"딱 한 입 크기네요." - page 60
그를 필두로 이곳을 찾아온 손님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에 맞는 음식 처방을 내리게 됩니다.
손님들은 음식에 대한 트라우마를 조금씩 치유하게 되고 망초 또한 위로를 받게 되면서 완전한 치유, 일방이 아닌 쌍방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잘해야만 한다는, 잘 해내지 못하면 안 된다는 두려움이 봄날의 눈처럼 녹아 사라졌다. 엄마의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에는, 여태껏 내가 갈망했던 답이 모두 담겨 있었다. 퇴근길에 바라보는 하늘이 애틋하기만 했다. 까만 어둠 속 빛나는 별이 유독 환하게 보였다. 아픈 상처가 있는 사람들도 누군가의 애정으로 작은 빛을 찾아낼 수 있다. 요리사는 그들을 치유하는 의사일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당신이 내게 가르쳐준 사랑을 지침 삼아 많은 사람들의 별을 찾아주고 싶다. 우리의 과거가 지난할수록, 더욱 환히 빛날 내일을 위하여. - page 333
트라우마에서 한 발짝 나간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음을 알기에 그야말로 큰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 용기를 건네 줄 단 한 사람만 만나더라도 나아갈 수 있음에.
그리고 그 속에 진정성 있는 사랑이 있다면 치유할 수 있음에.
따스한 감동 한 가득히 받았습니다.
저도 편식이 심한 편인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음식들에 트라우마까지는 없는 것 같은데...
왠지 문망처 정찬에 가 기억 저편에 존재할 트라우마를 치유할 한 그릇의 음식을 맛보고 싶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