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10월 7일 일요일.
막스 플랑크와 마리에 플랑크 부부는 베를린 그루네발트의 대저택에서 이웃에 사는 하인리히 루벤스와 마리에 루벤스 부부를 맞이하게 됩니다.
아내들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남편들은 물리학 얘기를 하고 있는데 물리기술제국연구소 실험실에서 최근에 측정한 곡선이 지금까지의 공식과 일치하지 않음에 플랑크의 머리에서 몇 년째 이리저리 떠돌던 퍼즐 조각들이 새로운 패턴으로 맞춰지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빠가 뉴턴에 버금가는 아주 중요한 걸 발견했단다."
19세기 물리학자들의 난제 중 하나였던 '흑체복사곡선'에 대해 자신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던 방법론까지 동원해가며 흑체복사선에 대한 연구를 한 끝에 12월 14일 금요일 오후 5시, 물리학 학회에서 '정규 스펙트럼의 에너지 분포 법칙 이론'을 발표하게 됩니다.
"이것이 전체 계산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데, 우리는 에너지가 매우 특정한 수의 유한한 등가성 알갱이로 구성되었다고 보고, 자연상수 h = 6.55·10^-27 erg/sec를 사용합니다." 양자는 세상에 존재한다. 다만 아무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 page 28
이 발표는 후대 물리학자들로부터 "양자물리학의 탄생 시간"이라 불리게 됩니다.
또한 그가 말했던 '알갱이'는 양자 개념으로 플랑크의 양자가설은 이후 아인슈타인의 광양자가설에도 영감을 주게 됩니다.
1903년 파리에서 마리 퀴리는 베크렐의 우라늄선에 매료되어 이후 '유라늄선' 대신 방사성 관선'이라 부르며 연구를 하였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방사성 원소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당시 과학 지식에서는 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원자'에 대해
화학자들은 더는 쪼개지지 않고 변하지 않으며, 화학반응으로 연결이 끊어지기도 하고 다시 연결되기도 하는 최소 구성 성분으로
물리학자들은 작은 당구공처럼 진공상태를 떠다니며 충돌하여 기체의 압력과 열을 생산하는 것으로
철학자들은 데모크리토스 이후로 세계를 구성하는 불멸의 성분으로
이론적으론 연관성이 없지만 똑같이 '원자'라 불린 것을 마리 퀴리는 원자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주장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연구는
별이 빛나는 밤하늘 아래에서 피에르가 조끼 주머니에서 라듐브로마이드가 든 유리병을 꺼냈다. 유리병에서 빛이 나와 그들의 얼굴을 비췄다. 술기운에 붉어진 편안한 얼굴, 그리고 화상으로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인 피에르의 손가락. 그것은 언젠가 마리를 죽게 할 방사능 질병의 전조이자, 그들이 쫓고 있는 지식의 무게를 알려주는 첫 번째 암시였다. - page 41
그들이 쫓고 있는 지식의 무게가 훗날 핵물리학으로 발전하게 될 과학의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인물은 1905년 베른에서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베른 특허청의 3등급 시사관이었던 그는 1905년의 물리학자들을 괴롭히기 시작하면서 이런 주장을 하게 됩니다.
빛, 즉 모든 전자기선은 파동이 아니라 일종의 입자인 양자로 구성되었다! - page 48
이를 필두로 고전물리학의 한계를 타파하고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으로 대표되는 현대물리학의 태동에서부터 황금기에 이르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상대의 이론을 접하며 논쟁하며 그렇게 새로운 과학의 토대를 쌓아가는 모습이 생생히 그려져 읽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1927년 하이젠베르크는 계속해서 철학 안개 속을 헤매는 보어와의 토론에서
"과학은 대화에서 발생한다"
고 즐겨 말하곤 하였지만 종종 절망 속에 토론을 마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보어가 이의 제기를 하는 소리를 듣게 되고 예전 여름 아인슈타인이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에 반대하며 안개상자 - 흔적 얘기했을 때 아인슈타인이
"자신이 실제로 관찰한 것을 기억하는 것은 가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칙의 관점에서 볼 때, 관찰 가능한 수치만을 토대로 하려는 이론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현실에서는 정확히 그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관찰할 수 있을지를 이론이 먼저 결정합니다." - page 282
이 말을 곱씹으며 그동안 양자역학의 핵심으로 통했던 위치와 운동의 불확정성에 직면하게 됩니다.
"불확정성의 원리"
다른 물리학자들은 불확정성 원리의 의미를 가늠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인과성은 이미 1년 전에 보른에 의해 폐기되었다고, 일부 이론가들은 말하고, 일부 실험가들은 불확정성 원리를, 정교한 장비로 양자 현상의 더 선명한 그림을 얻으려는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 이해했다. 세계는 그저 불확실하게 보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실제로 불확실하다! "세계와 우리의 언어가 맞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하이젠베르크가 말한다. - page 288
그리하여 이 책의 제목처럼 1900년에서 1945년 '불확실성의 시대'로 명명한 이유였습니다.
특히나 이 시기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과학의 양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과학자들의 핵분열 연구는 나치의 손에서 위험하게 쓰일 수 있음을 경계해 이를 미국 대통령이었던 루스벨트에게 알리게 되고 미국은 '맨해튼 프로젝트'로 원자폭탄을 개발해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참혹한 재앙을 일으키게 되는데...
1945년 8월 14일에 하이젠베르크는 동료 포로들 앞에서 강연을 했다. 그는 폭탄의 임계 반경이 6.2~13.7센티미터라고 계산했다. 폭탄 표면은 폭발할 때 태양보다 2,000배 더 밝게 빛난다. "가시광선 압력이 과연 물체를 쓰러뜨릴 수 있을지, 흥미롭네요." 하이젠베르크가 강연을 끝맺었다. 그는 다시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과학자의 영토에 있다. 한참 뒤에 그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25년 동안 함께 겪었던 원자물리학의 진보가 수십만 명이 훨씬 넘는 사람을 죽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직시해야만 했다." - page 477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했고 세계는 불확실해졌으며 그야말로 오랫동안 확신했고 익숙했던 윤곽들이 흐릿하게 지워지게 되었습니다.
불확실성의 시대...
100년 전에 세워진 그들의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굳건히 서 있었습니다.
그들이 겨뤘던 논쟁들도 여전히 중심에 있듯 그 역사는 지속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바라보며 앞으로 우리의 시대는 어찌 될지 관심을 가져야 함을 느끼며 물리학의 매력에 흠뻑 매료된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