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1956년 여름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해 여름, 당시 그곳은 너무 외진 곳이라 도로는 곳곳이 바위투성이로 거칠었고 그 덕분에 그곳을 찾는 관광객도 거의 드물었던 유타주의 아치스 국립공원에서 공원 관리원으로 일한 그.
대부분의 시간을 하늘의 구름을 쳐다보거나 잠깐 스쳐 지나가는 호우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또는 숨겨진 자연의 경이를 찾아 협곡을 탐험하면서 일기를 썼다고 하였습니다.
고독한 생활 속에서 야생동물 , 책, 꽃, 새, 생각, 느낌 등 자신의 경험담을 기록했지만 이는 단순히 한 개인의 경험담에 그치지 않고, 아름답고 자유롭지만 동시에 잔인하고 고립된, 역설로서의 사막과 인간의 고독에 대한 성찰로 가득한 '철학적 회고록'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소로의 『월든』과는 사뭇 느낌이 달랐던 이 책.
마음이 평온해지기보다는 야생의 날것을 온전히 느낄 수 있어 고독함과 갈증으로 쉬이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황야'라는 단어가 이토록 매력적일 줄이야...
하지만 우리는 어떠한가...
황야라는 말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우리 조상들이 알았던 잃어버린 아메리카에 대한 감상적인 향수만은 아니다. 황야라는 말은 과거와 미지의 세계, 우리 모두의 고향인 대지의 자궁을 암시한다. 그것은 잃어버렸으면서 아직 있는 어떤 것, 외지면서도 동시에 아주 가까이 있는 어떤 것, 우리 피와 신경에 묻힌 어떤 것, 우리를 초월한 무한한 어떤 것을 뜻한다. 우리가 흘려버려서는 안 될 낭만을 뜻하기도 한다. 낭만적 관점이 전적으로 진실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진실의 필요한 일부인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황야에 대한 사랑은 도달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갈증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또한 지구에 대한 충성심의 표현이기도 하다. 지구는 우리를 낳아 주었고 길러 준, 우리가 알게 될 유일한 고향이며 우리가 필요로 하는 유일한 낙원이다. 원죄, 진정한 원죄는 탐욕 때문에 우리 주위의 자연이란 낙원을 맹목적으로 파괴하는 것이다. - page 277
황야는 인간의 영혼에 꼭 필요한 필수품이며 문명이 얼마 남지 않은 야생의 세계, 원시의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생명의 원천과의 고리를 끊어 버리는 것이며 문명 자체의 원칙을 배반하는 것이며 이로써 인류는 결국 지구로부터 추방된 망명자가 될 것이라 외치는 그.
숙연해졌습니다.
저 너머 나의 고향,
이제 생각이 나네.
먼 산을 볼 때마다
나는 우네.
나는 우네.
고향을 생각하며.
- 지아족 인디언들이 부른 향수의 노래
읽으면서 저 역시도 그곳의 풍경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하나의 바위, 하나의 나무처럼 사막 속에 어느새 나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볼 계기도 되었고...
그 느낌이 딱 이 이야기와도 닮았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밖의 생활을 즐긴다고 다른 형태의 격리, 마음의 고독한 감금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고. 트레일러 안에서 저녁을 먹으려고 식탁 앞에 앉았을 때 불현듯 내가 혼자라는 느낌이 다가오는 고약한 순간들이 있다. 이런 순간은 이곳 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 특히 자주 찾아왔었다. 식탁 맞은편에 아무도 없다는 것, 혼자라는 인식은 외로움이 되었고 그 느낌은 고독보다 더 좋은 것, 고독보다 더 좋은 유일한 것이 사람들과의 교유라는 사실을 나에게 상기시켜 줄 만큼 강했다. - page 175
항상 시작이 있다면 그 끝도 있는 법.
쌉싸름한 아쉬움으로 마침표보단 말 줄임표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