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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타워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0년 3월
평점 :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분.
'에쿠니 가오리'
그녀와의 첫 인연은 『냉정과 열정사이』였습니다.
때는 벌써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대학생 때 유럽 배낭여행을 준비하면서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탈리아 피렌체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던......
그리고 서로의 비밀과 오해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연인이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던 그곳, 피렌체 두오모 성당.
참으로 애틋하면서도 아련히 진한 여운을 남겼기에 배낭여행에선 소설책을 지니고 다니면서 이탈리아를 기억하고 또 새기곤 하였습니다.
그녀의 문체가 좋았습니다.
담담하기에 더없이 진한 여운을 남기는, 마치 에스프레소와 같다고 할까......
그래서 그녀의 작품을 하나 둘 찾아 읽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읽게 된 이 책.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읽어보진 않았었습니다.
매번 읽어야지 다짐만 하다가 넘겨졌었나 봅니다.
그래서 이제야 만나게 되었습니다.
국내에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며 꾸준히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는 작품.
『도쿄 타워』
세상에서 가장 슬픈 풍경은 비에 젖은 도쿄 타워이다.
트렁크 팬티에 흰 셔츠만 걸치고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면서, 코지마 토오루는 생각한다.
어째서일까. 젖어 있는 도쿄 타워를 보고 있으면 슬프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릴 때부터 쭉 그렇다. - page 9
돈, 자기 소유의 가게, 그리고 남편.
무엇이든 갖고 있는 엄마 친구 '시후미'.
그녀를 알게 된 건 2년 전, 토오루가 열일곱 살 때였습니다.
날씬한 팔다리에 풍성한 검은머리.
이국적인 외모를 지닌 그녀를 토오루는 사랑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를 보고 싶다고 만나고 싶다고 언제든 만날 수 있지는 않습니다.
그녀의 남편 몰래, 어머니 몰래 만나야했고 시후미의 시간이 날 때 기다려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기다림이 오히려 토오루에게는 행복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어머니가 읽다 내버려 둔 주부잡지를 훌훌 넘겨보면서, 토오루는 생각한다. 기다리는 것은 힘들지만, 기다리지 않는 시간보다 훨씬 행복하다. 시후미와 연결된 시간. 이곳에 시후미는 없지만 자신이 시후미에게 감싸여 있다고 느낀다. 지배당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 page 122
언제나 그녀의 뒤에 있는 토오루.
용기를 내어 시후미에게 말을 건넵니다.
"함께 생활하지 않고 함께 살아간다는 조건,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토오루는 애써 느긋하게, 단어가 만족스럽게 울릴 수 있도록 신경 쓰며 그렇게 말했다. 시후미는 금세 눈썹을 치켜올린다.
"조건 같은 거 내세운 적 없어."
"아, 미안해요." - page 298
토오루의 학창시절 친구이자 그와는 정반대인, 적극적이고 활발한 성격의 '코우지'도 등장합니다.
그 역시도 연상인 여인 '키미코'와 사귀지만 토오루와 달리 동갑인 '유리'와도 사귑니다.
토오루는 키미코를 사랑하지만 오로지 그녀와의 잠자리에 더 초점을 맞추는, 그래서 언젠가 이 사랑이 끝날 거라고 알지만......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부족한 사랑을 채우는 코우지의 모습은 활발한 성격이 더없이 가엾어 보이곤 하였습니다.
버리는 것은 이쪽이다, 라고 정해 놓았다. 그러나, 버리는 것은 언제나 아픔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코우지는 자기 방바닥에 드러우눠, 열린 창문으로 스며 들어오는 주택가 특유의 점심 냄새를 성가시게 느꼈다. - page 315
이들의 사랑......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았습니다.
끝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기에, 언젠간 상처로 남을 것임을 알기에......
"누구든 태어난 순간에는 상처 입는 일이 없어. 나, 그 점에 대해 생각해 봤는데, 예를 들어 어딘가 불편한 몸으로 태어나거나, 병약하거나, 몹쓸 부모를 만난다 해도, 녀석이 태어난 순간에는 아무 상처도 입지 않아. 인간이란 모두 완벽하게 상처 없이 태어나지, 굉장하지 않아? 그런데, 그 다음은 말야, 상처뿐이라고 할까, 죽을 때까지 상처는 늘어날 뿐이잖아, 누구라도."
토오루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처 주는 게 좋은 건 아니잖아."
코우지는 다시 입 끝을 움직여 웃었다. 그 웃음이 토오루는 어쩐지 딱해 보였다. 상처를 늘리고 있는 것은 코우지 쪽인 양. 코우지는 세 잔째 맥주를 주문한다.
"상처 주어도 좋다는 말이 아니잖아.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거야."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다.
"누구든 상처 입을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도 상처 입는 것에 저항하는 거야, 여자들은." - page 348 ~ 349
토오루와 코우지.
그들의 모습은 마치 야경에 비에 젖은 도쿄 타워와도 같았습니다.
스무 살 소년들의 연상의 연인과의 위태로웠던 사랑 이야기.
결국 그 사랑의 모습은 이 문장과도 닮았습니다.
함께 살아가기에 행복하다는 이 말이 구슬프게 들려오는 것은 사랑 앞에 한없이 나약해지고 비참해진 그들의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왠지 비 내리는 어둑어둑해진 해질 무렵.
창밖에 초라하게 서 있을 빨간 도쿄 타워를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과 함께 바라보게 될 때면 그들이 전한 이야기가 다시금 생각날 듯 합니다.
아련하게......그리고 애틋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