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열쇠 열린책들 세계문학 265
대실 해밋 지음, 홍성영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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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보일드 장르의 창조자 '대실 '.

사실 그에 대해서도, 그의 작품에 대해서도 만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이번에 똭! 하니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 것! 도!!

'자신 최고 걸작으로 꼽은 작품'


이보다 더 멋진 만남이 있을까...

그렇다면 망설이지 않고 바로 책장을 펼쳐들었습니다.


인간의 욕망과 추악한 정치의 이면을 파헤치는

하드보일드 범죄 소설


유리 열쇠

 


이 소설을 이끌어갈 주인공 '네드 보몬트'.

그에게는 친형처럼 지내는, 합법과 불법, 음지와 양지를 오가며 세력을 넓혀 가는 정치인 '폴 매드빅'이 있었습니다.


매드빅은 애정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으로 네드 보몬트에게 자문을 구하려 합니다.

선거를 앞두고 헨리 상원의원의 재선을 도우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넓히는 것과 동시에 연모하던 상원의원의 딸 '재닛 헨리'와의 결혼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네드 보몬트는 아까부터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로 그에게 나지막이 말을 합니다.


「그가 재선되고 나서도 계속 형과 손잡을 거라 생각해?- page 16


「왜 헨리 의원을 도둑인 양 몰아세우는지 모르겠구나. 그는 점잖은 신사인 데다 -

「물론이지. 『포스트』지에도 미국 정치계에 몇 안 되는 귀족이라고 나오니까. 딸도 마찬가지고. 그들을 만나러 가기 전에 만반의 태세를 갖추라는 것도 그 때문이야. 그렇지 않으면 당할 게 뻔해. 저들은 형을 하등 동물쯤으로 여길 거고, 어떤 규칙도 통하지 않을 테니까. - page 17 ~ 18


사랑에 눈이 멀어 아무런 조언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매드빅.

그의 모습을 쓸쓸히 바라보며 돌아가는 네드 보몬트.


그런데...

차이나가에서 고개가 왼쪽으로 돌아가 도로변을 향하고 있는 죽은 청년의 얼굴이 가로등 불빛에 환하게 드러났습니다.

양쪽을 둘러보고, 길 위쪽으로도 아무도 없는 상황.

두 블록 떨어진 길 아래쪽 건너편의 <로그 캐빈 클럽> 앞에 남자 둘이 자동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우선 이 상황을 매드빅에게 알린 후 경찰에 신고한 네드 보몬트.

알고 보니 상원 의원 아들 '테일러 헨리'가 살해된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

왠지 구린 냄새가 확 풍겨집니다.

그래서 네드 보몬트는 자신이 이 사건에 개입할 수 있도록 매드빅에게 부탁을 하게 되고 사건의 전모를 향해 갈수록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데...


사실 매드빅의 딸인 '오팔'이 테일러와 애인 사이인 것이 탐탁지 않았었고 테일러가 죽기 전 오팔과 함께 있었습니다.

(아마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면 속이 부글부글하겠지요...?!)

그리고 그날 저녁 매드빅은 상원의원의 저녁 초대에 참석했었고 후에 말다툼이 있었다는 사실이...

그래서 사건의 조각들은 단 한 사람을 항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폴 매드빅'.

네드 보몬트는 누군가의 '모함'이라며 진실을 파헤치려 하고... 하지만 사건과 관련된 이들에게 의문의 편지에선 전부 그를 지목하고...

과연 매드빅은 테일러를 죽였을까...?


「말썽쟁이ㅣ 아가씨, 정치는 거친 게임이고, 지금 일어나는 일도 마찬가지야. 『업저버』는 우리 반대편에 섰으니 폴에게 타격을 줄 기사가 진실인지 아닌지 따위 신경 쓰지 않는 거야. 저들은 - - page 150


아무리 시대가 흐르고 강산이 변한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곳이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추악하고 더러운 '정치계'의 이면...

왜 멀쩡한 사람들도 '왕관'의 무게를 짊어지게 되면 변하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의 모습과도 닮은 모습이 소설 속에 그려져서 소름이 끼쳤던 대목이 있었습니다.

 


보스가 잘못을 하더라도 잠시 반란만 있을 뿐...

변하는 것은 없다는 사실이 믿고 싶지 않지만 현실임에 참으로 씁쓸함마저 들곤 하였습니다.


추악한 야망과 본능, 그 끝엔 단 한 발의 총알만이, 비참한 최후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너무 높이 올라가고자 했던 '이카로스'처럼...

남겨진 폴 매드빅에게 전하고픈 노래가 있었습니다.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를 잔잔히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커다란 그대를 향해
작아져만 가는 나이기에
그 무슨 뜻이라해도
조용히 따르리오
어제는 지난 추억을
잊지 못하는 내가 미웠죠
하지만 이제 깨달아요
그대만의 나였음을

 -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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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레베카
케이트 더글러스 위긴 지음, 유기훈 그림, 박상은 옮김 / &(앤드)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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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빨강 머리 앤'

사랑스러운 이 아이를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저도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고 그녀의 따스하고도 긍정의 기운을 받는 것 같아서 책장에도 '앤'의 이야기는 여러 권 가지고 가끔 펼쳐 읽어보기도 합니다.

 

'빨강 머리 앤'보다 5년 먼저 출판된 이 있다는 이 놀라운 사실!

누구일지 궁금하였습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잡게 된 이 소설.

벌써부터 앤에서 받았던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캐나다에 앤이 있다면

미국에는 레베카가 있었다

 

나의 친구 레베카


 

 

검은 머리에 담황색 옥양목 드레스를 입은 아이.

반짝이는 눈에는 열정과 호기심이 가득한, 놀라운 잠재력과 통찰력이 엿보이는 이 아이의 이름은 '레베카'입니다.

이 소녀는 리버버러 벽돌집에 사는 미란다와 제인 소여 자매의 집으로 맡겨지게 됩니다.

 

이모 집으로 향해 가는 길은 콥의 마차를 타고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도 쫑알거리는 레베카의 모습은 정말 앤이 매슈의 마차를 타면서 가는 모습과도 닮아있었습니다.

 



 

미란다와 제인은 사실 레베카보단 언니인 한나가 오기를 바랐었습니다.

하지만 천방지축 같은 레베카가 온다는 사실에 미란다는 우울한 예상을, 제인도 침울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미란다의 경우는 어떻게 '레베카를' 견뎌야 할지를.

제인은 레베카가 어떻게 '그들을' 견딜지를.

이 둘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미란다의 경우는 앤에서 '마릴라 커스버트'가, 제인은 '매튜 커스버트'의 모습과도 닮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레베카는 미란다와 제인 이모와의 동거가 시작되었습니다.

역시나 레베카의 행동 하나하나는 눈에 띌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레베카에게 미란다는 엄격하게 대하는 모습이 종종 보이곤 합니다.

"미란다 이모, 앞으로는 말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될게요. 문을 잠그지 않고 나가는 일도 절대 없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 아빠를 욕하는 건 참을 수가 없어요. 우리 아빠는 완벽하게 좋은 아빠였어요. 아빠를 계집애 같다고 한 건 너무해요!"

"건방지게 말대꾸하지 말거라, 레베카. 네 아빠는 허영심이 강하고 어리석고 무능한 사람이었어. 다른 사람들도 다 나처럼 얘기할 거다. 네 아빠는 네 엄마의 돈을 탕진하고 네 엄마에게 부양해야 할 일곱 명의 아이들을 남겼지."

"착한 아이들 일곱 명을 남긴 것은 대단한 일이에요."

레베카는 흐느끼며 말했다. - page 129

 

너무나도 표현이 서툰 미란다 이모의 가시 같은 말...

속상한 나머지 벽돌집을 나온 레베카는 제리 아저씨네에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합니다.

그동안의 이야기를 펼치고 나니...

마치 비가 갠 하늘처럼 그녀는 다시금 벽돌집으로 돌아갈 용기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저, 떠나지 않기로 했어요, 콥 아저씨. 이곳에 있으면서 벽돌을 받으려고요. 벽돌을 받되, 다시 던지지는 않을 거예요. 미란다 이모가 저를 다시 받아줄지는 모르겠지만, 용기가 생긴 지금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같이 가주시지 않을래요, 콥 아저씨?" - page 142 ~ 144

 

이 사건이 계기가 되었을까...

상처 입고 괴로워하는 어린 레베카에게 모질게 군 것을 속으로 후회하고 자신이 그동안 감춰왔던 진심 어린 애정을 조금씩 표현하기 시작하는 미란다 이모.

그렇게 이들은 서로 맞추어가며 조금씩 닮아가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학창 시절이 끝나고 이제 '졸업'을 맞이하게 된 레베카.

그런데...

점점 무덤 저편의 드넓은 세상으로 건너가는 길목에 서 있는 미란다 이모.

하지만 안 좋은 일은 왜 동시에 오는 건지...

레베카의 엄마도 일을 하다가 다치게 됩니다.

이모는 엄마 병간호를 우선 하라며 레베카를 보내고...

"가엾은, 가엾은 미란다 이모! 미란다 이모는 삶에서 조금의 위안도 얻지 못하고 가셨어요! 저는 이모한테 작별 인사도 하지 못했고요! 홀로 남은 가엾은 제인 이모! 어떻게 하면 좋아요, 엄마? 엄마와 벽돌집 사이에서 둘로 나뉜 기분이에요." - page 420

읽으면서 제일 가슴이 메어졌습니다.

미란다 이모가 레베카에게 진정으로 전하고팠을 말이, 그 진심이 한꺼번에 느껴져서 저는 그만 울컥하고 말았었습니다.

"미란다 이모는 좋은 사람이었어, 레베카. 화를 잘 내고 말을 함부로 해서 그렇지, 늘 옳은 일을 하고 싶어 했고 또 되도록 옳은 일을 해왔어. 나는 미란다 이모가 네게 심한 말을 한 것에 대해 늘 미안해했다고 믿어. 이모는 살아생전에 네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ㅇ모의 행동을 보면 네게 미안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야."

"저는 서니브룩 농장으로 떠나기에 앞서 미란다 이모에게, 미란다 이모가 저를 지금의 저로 만들었다고 말씀드렸어요."

"미란다 이모가 그렇게 만든 게 아니야. 하느님이 그렇게 만드신 거지. 너도 하느님을 도와 열심히 노력했고. 하지만 미란다 이모는 거기에 필요한 자금을 댔고, 그것은 결코 무시할게 못 돼. 특히 자신의 편안함과 즐거움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렇게 했을 때는 말이야. 네게 알려줄 게 있단다, 레베카. 미란다 이모는 이 집을 네게 물려 주었어. 벽돌집과 별채, 가구와 집 주변의 땅 전부를." - page 431

 


 

소설은 이것으로 끝이 났지만...

레베카의 앞날은 그녀의 성격처럼 밝고 활기차게 펼쳐지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 봅니다.

나무는 어느 해부터 한꺼번에 자라요.

조금 초라하다고 우울해하지 마세요.

지금은 뿌리를 내리는 계절이니까요.

실망하지 말아요.

진짜 황금 같은 나날은 시작조차 되지 않았으니까. - page 377

너무나도 닮은 앤과 레베카.

또 한 명의 사랑스러운 소녀를 만나게 되어서, 소녀를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방법을 배울 수 있어서 너무나 좋았습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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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핑 더 벨벳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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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전 세계에서 인정을 받은 영화 <아가씨>.

그 중심엔 우리의 '박찬욱' 감독님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엔 원작 소설 세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가 있었습니다.

관능적이면서도 섬세한...


우선 이 소설이 끌렸던 건 아무래도 박찬욱 감독의 영화의 원작자로 알려진 영국 작가 '세라 워터스'의 작품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사실 『핑거스미스』를 읽어본 것도 아니고 영화 <아가씨>를 보지 않았기에 남들에 비해서는 무지한 상태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세라 워터스의 대담한 데뷔작이자

빅토리아 시대 3부작의 출발점


이 소설을 시작으로 이어지는 빅토리아 시대 3부작을 독파하고자 하였습니다.


티핑 더 벨벳

 


이 제목이 뜻하는 바를 알게 된 순간!


<티핑 더 벨벳TIPPING THE VELVET> 이라는 제목 역시 빅토리아 시대의 은어로 여성 성기를 입술이나 혀로 자극하는 행위를 뜻한다.

- 책소개글 중에서


응?!

순간 정적이 흘렀고... 이 소설이 어떤 주제를 다루고 있을지가 그려졌습니다.

솔직히 이 장르는 처음이라... 조금은 충격을 받은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과연 잘 읽어갈 수 있을까...?'

저의 노파심은 소설의 첫 장을 펼치는 순간 멈추게 되었습니다.


윗스터블 굴을 먹어 본 적이 있는지? 만약 먹어 보았다면 그 맛을 잊지 못하리라. - page 9


소설은 윗스터블의 굴 식당에서 태어난 한 소녀 '낸시'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이 스트리트와 항구 중간에 좁다랗고 물막이 판자를 댄, 파란 칠 여기저기 결이 일어난 집.

그곳에서 <애슬리 굴, 켄트 최고의 맛>을 음미할 수 있는 이곳에 아버지와 어머니, 언니 앨리스와 함께 식당을 운영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 있었는데 말하자면, 연예장의 노래와 그 노래를 부르는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윗스터블에서 기차로 15분 가면 캔터베리에 있는 <캔터베리 연예 궁전>에 가서 공연을 보는 것을 좋아했던 소녀.

캔터베리 궁전에서의 한 공연이 한 소녀의 인생을 바뀌게 할 줄은 아마 그때 그 소녀는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녀의 나이 열여덟 살이 되던 해 여름.

여느 때와 같이 언니 앨리스와 함께 캔터베리 궁전에서 최상층의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사회자 트리키의 진행으로 랜달 가족의 연주를 시작으로 코미디언, 그 다음은 여자 독심술사가 나와 독심술을 펼치고 곡예단이 펼쳐졌습니다.

그 후 트리키가 일어나 망치를 치며 조용히 할 것을 요구하며 외칩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제 여러분에게 자그마한 <즐거움>을 선사해 드리겠습니다. <헬레강스>한 최신 유행 스타일입니다. 혹시 잔에 샴페인을 따라 놓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지금 잔을 높이 올리십시오. 만약 맥주를 가지고 계신다면, 안 될 게 뭡니까? 맥주도 거품이 있잖습니까? 맥주잔도 높이 올리십시오! 무엇보다도 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여러분도 목소리를 높이 올리십시오. 도버의 피닉스 극장 출신으로 우리 켄트의 이름 높은 신사이자 우리 조그만 페버셤의 매셔를 소개합니다...... 키티,

「버틀러!」- page 20


예전에도 궁전에서 남장 배우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키티 버틀러'는 완벽한 웨스트엔드의 신사였고, 정장 차림이었으며 무엇보다 낸시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머리, 짧은 헤어스타일이었습니다.

사내아이처럼 성큼성큼 걸어 손을 바지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 건방진 각도로 고개를 젖히고 사내아이처럼 다리를 활짝 벌리고 서 있는 모습.

노래를 할 때 달콤하면서도 완전히 사내아이 같은 목소리 그대로.

이 두근거림, 아니 심장이 터질듯한 이 느낌은 '사랑'이란 감정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사랑에 빠지면 하루라도 내 눈에 더 담고 싶은 게 정석이겠지요...

매일 그녀의 공연을 찾아가고 매 순간 흠뻑 빠져들게 됩니다.

그러자 키티도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됩니다.


자신을 좋아하는 이는 처음이라 설레고 좋은 감정을 가지던 키티는 조금씩 낸시와 가깝게 지내게 되고 뜻밖의 제안을 하게 됩니다.


「저는 당신더러 저와 함께 가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어요. 런던으로요.

나는 눈을 끔벅였다. 「당신과 함께 간다고요? 하지만 무슨 명목으로요?

「제 의상 담당자로요.」키티가 말했다. 「만약 괜찮다면요. 아니면 제...... 뭘로든지요. 모르겠어요. 블리스 씨와 이야기를 했어요. 처음이니만큼 큰돈을 받지는 못할 거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저와 방을 같이 쓰면 충분할 거예요.

「왜요?」이윽고 내가 말했다. 키티가 눈을 들어 나를 보았다.

「왜냐하면 저는...... 당신이 좋으니까요. 제게 잘해 주었으니까요. 그리고 제게 행운을 가져다주었으니까요. 그리고 런던은 낯선 곳이니까요. 그리고 블리스 씨가 보기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일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테니까요......- page 77


결국 키티와 함께 런던으로 가려는 낸시.

그런 낸시에게 처음에는 막강하게 반대하던 부모님도, 특히 아버지는 마지막에 이런 이야기를 해 저도 읽으면서

'역시... 자식을 위해, 자식의 행복을 위해 부모는 자신의 가슴이 미어져도 차마 붙잡지 못하는구나...'

를 느끼게 되었던 대목.


아버지는 결론 내리길, 그러나 아이들은 부모를 기쁘게 하려고 태어난 게 아니며 딸이 평생 자기 옆에 있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간단히 말해 낸스 네가 곧장 파멸의 구렁텅이로 뛰어들게 된다 할지라도 네 엄마와 나는 네가 슬퍼하며 우리 곁에 머물면서 네 운명을 막은 우리를 미워하게 하느니 기뻐하며 우리 곁을 떠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단다.」이제까지 나는 아버지가 그토록 슬퍼하는 모습을, 그토록 유창하게 말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아버지는 눈가를 적셨고, 눈물을 감추기 위해 눈을 두세 번 정도 깜박였으며 목소리가 가늘어졌다. - page 82


과연 낸시는 키티와의 런던 생활이 행복했을까...? 

 


자신의 모습에 대해 한탄하는 그녀의 이야기가 처절한 무음으로 다가와 가슴이 아려온 대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불쌍하고 혼자이며 아무도 돌봐 줄 이가 없었다. 나는 연인들과 신사들을 좋아하는 도시에 사는 외톨이 여자였다. 여자 혼자 걸으면 눈총만 받을 뿐인 도시에 사는 여자였다.

그날 아침에야 나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키티 옆에서 불렀던 그 모든 노래들을 통해 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다.

한때는 런던의 여러 공연장을 오가며 신사복을 입고 수없이 뻐기며 걷던 내가 이제는 계집애의 수줍음 때문에 거리를 걸으며 두려워해야 하다니! 정말 잔인한 농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남자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진짜 남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 page 249 ~ 250


자신의 성 정체마저도 부정할 만큼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던 낸시의 모습.

절박하고도 간절한 그녀...

그런 낸시에게 손을 내밀어 준 이가 있었으니...

그건 소설을 읽으면서 낸시의 구원을 바라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이 소설은 한 소녀의 성장과정을 그렸습니다.

그것이 '성 정체성'이란 주제를 가지고 있었기에 조금은 관능적이면서 도발적이지만 한편으로 바라보게 되면 그만큼 더 애잔하고 쓸쓸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에게도 이 소설은 성 정체성에 대해... 생각할 여운을 남겨주었습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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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핑 더 벨벳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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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접해본 ‘퀴어 문학‘. 그래서 더 흥미로웠습니다. 다음 이야기 역시도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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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밸런타인데이
정진영 지음 / 북레시피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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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JTBC 금토 드라마 <허쉬>로 인해 이 작가분의 작품이 하나 둘 눈에 띄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중에서 제 눈에 띈 것은 바로 이 소설.

 

겨울이 가면 자연의 섭리처럼 봄이 오듯..

지난 1년 우리를 코로나로 꼼짝 못하게 했다가 이제야 백신이 등장하면서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이 오듯..

조금은 냉랭해졌던 제 가슴에 따스함을 선사하고 싶었기에 이 소설을 읽게 되었습니다.

 

사막 같은 삶 속에서 홀연히 마주한 꽃잎처럼 향기롭고 투명한 사랑

 

다시, 밸런타인데이』 

 

 

소설 속 여주인공 '수연'.

그녀의 초등학교 6학년은 유명한 아이였습니다.

당시 인기를 끌던 아역배우를 닮아 유명했지만 그보다는 1등을 도맡아 하던 아이, 틈만 나면 책상에 앉아 책을 읽던 아이이기에 남자아이들은 수연에게 어떻게든 관심을 끌어보려 애를 썼습니다.

 

그런 수연은 초등학교 졸업 후 인근 여자 중학교에 진학하지만 대전으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선뜻 내키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전한 이 한 마디...

 

"지금처럼 우리 가족이 모두 함께 모여 밥 먹을 날이 앞으로 얼마나 될 거라고 생각해? 몇 년 후에 수연이가 대학 가면 이런 자리도 끝이야. 그다음엔 이런 자리를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어." - page 12

 

화가 나면서도 속상했던 수연.

뜻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죽음에 아버지를 향해 쌓아왔던 원망이 자신에게로 돼 돌아오게 되고 아픔과 후회를 익기 위해 더 공부에 집중을 하게 됩니다.

대학 진학을 핑계로 대전에서 벗어나 하루빨리 서울로 올라와야만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던 지난날.

한국대 입학과 함께 그녀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수연이 입학하게 된 한국대에선 마치 그녀와 인연이 있는 이들의 모임과도 같았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남자아이들, 성대와 대혁.

중학교 동창 정희.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 때 학원에서 알게 된 형우까지.

이들의 풋풋하고도 투명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사랑 앞에 주저하는 수연의 모습.

아니, '사랑'의 의미를 잘 몰랐기에 소극적이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에 대해 수연이 사촌 언니 세연에게 물었을 때 들려온 이야기는 저 역시도 '사랑'과 '정' 사이의 차이를 일러주곤 하였습니다.

 

 

자신에게 '사랑'이란 이름으로 다가온 형우에게 결국 이별을 고하던 수연의 모습은 청춘이기에 가능한 애잔한 슬픔이 묻어나 있었습니다.

 

"네가 어떤 감정으로 그 친구를 만나는지 모르겠지만 괜히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 당장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감정을 억지로 끄집어낼 순 없으니까. 우선 네 감정을 더 깊이 들여다보도록 해. 아까도 말했지만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거든. 무엇을 선택하든 성급하게 선택하지 말고. 사랑을 사랑인 줄 모르고 지나쳐버린 후에야 사랑이란 사실을 깨닫는 것만큼 가슴 아픈 일도 없으니까." - page 142

 

"너는 향한 내 감정이 사랑인지 잘 모르겠어. 아니, 사랑이 아닌 것 같아! 그런데 내가 너의 마음을 받기만 하는 게 옳은 일일까? 그건 너를 속이는 꼴밖에 안 되잖아. 네게 제대로 마음을 주지 못해 너를 외롭게 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네 잘못은 없어. 모두 내 잘못이야. 그러니까...... 우리 그만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 page 162

 

한편으론 수연이 부러웠습니다.

누군가가 오랫동안 한 사람을 사랑해 주었다는 점이...

그래서 오히려 저는 그녀에게 질투 아닌 질투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그녀의 사랑은 그녀와도 닮은, 마음 표현에 서툰 누군가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번 사랑은 이 이야기처럼 되었으면 하는 제 바램도 있었습니다. 


 

장작처럼 오랫동안, 잔잔히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을...

 

조금은 뻔한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이유는 아마도 뻔하기에 더 몰입하며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설 속에 담긴 Book OST.

작가 자신이 만든 음악이었기에 소설의 분위기와 인물들의 심리가 맞아떨어지면서 한 편의 청춘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에 더없이 소설에 흠뻑 빠져들었습니다.

 

누구에게나 간직하고 있는 첫사랑.

그때의 설렘과 아련함이 또다시 심장에 두근거림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이런 봄날을 기다리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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