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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고코로
누마타 마호카루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1년 1월
평점 :
무엇보다 이 책이 끌렸던 건 이 문구 하나로부터였습니다.
"사람이라면 지녀야 할 안식처가 내겐 없었다.
일생에 걸쳐 가지고 싶었고 알고 싶었던 유리고코로."
강렬하진 않았지만 왠지 깊은 여운이 남았던 이 문구.
이 호기심이 불러일으킨 파장은 소설을 읽고 난 뒤에도 여전히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 작가의 이력 역시도 남달랐습니다.
주부, 승려, CEO 독특한 이력을 소유한 늦깎이 작가
누마타 마호카루 붐의 신호탄이 된 바로 그 소설!
이 작가분이 펼칠 이 소설은 어떨지 기대감을 갖고 읽어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어둠과 슬픔을 건드린 미스터리 스릴러!
『유리고코로』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았으련만...
한꺼번에, 너무 벅차게도 안 좋은 일이 그에게 찾아옵니다.
처음엔 지에의 실종이었습니다.
부모님과 만난 지 채 두 달도 못 되어 느닷없이 가게에 오지 않고, 살던 방에서도 사라진 그녀.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올봄, 아버지가 말기 췌장암이라는 진단을 받게 됩니다.
이제 얼마 안 있어 아버지가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자 하는데 두 달 전 어느 날.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허무하게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때까진 신이나 운명 같은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요즘에는 어떤 악의로 가득 찬 정체 모를 것이 내 주위에 음습한 덫을 쳐놓고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 page 7
어머니가 없는 지금.
병든 아버지를 보러 집으로 향합니다.
한때 3대가 함께 살던 집.
아버지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2년 전에 시작한 하치다카 산기슭에 있는 '샤기 헤드'라는 카페를 운영해야 하기에 일 틈틈이 시간이 나면 아버지를 보러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초인종을 눌러도 현관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기에 어쩔수 없이 열쇠를 꺼내 집으로 들어갑니다.
아버지가 안 계신 걸 알지만 이층에도 가 보고 아버지의 서재에도 들어가봅니다.
그리고는 아래층 부엌에서 잠깐 기다리려고 문을 닫으려는데 방 오른쪽에 있는 옷장 문이 몇 센티미터 가량 열려 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게...
이상하게 마음에 걸려 주인이 없는 틈을 타 잠시 옷장 앞까지 가서 문을 열어보는데...
안에는 크고 작은 먼지투성이 종이 상자가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관심이 생겨 상자 속에 손을 넣어보니 낡은 핸드백이 나왔습니다.
기혼 여성이 들 법한 여름용 흰 가방.
떨리는 손끝으로 가방을 열어보니 속에는 화선지로 싼 작은 꾸러미가 들어 있었고 종이에 '미사코'라고 흐릿하게 먹물로 쓰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종이를 펴자 5, 6센티미터쯤 잘린 한 묶음의 검은 머리가 나타났습니다.
왠지 모를 불길함...
문뜩 오랫동안 완전히 잊고 있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가 네 살쯤 됐을 때니까 지금부터 20년도 더 된 옛날.
폐렴인지 뭔지로 장기간 입원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입니다.
어머니가 바뀌었을 리는 없을거고...
퇴원해서 돌아온 그를 안아주는 어머니의 품 안에서 어색하게 몸을 굳히고 있었던 그.
어린아이의 감각이 뒤죽박죽되어 어머니가 다른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라 여기며 어머니에 대한 위화감은 어느새 죄책감으로 변했고 이를 잊는 데 별다른 노력은 필요 없었습니다.
아이였기에..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시 상자 속을 뒤져보는데 가장 밑바닥에 서류 같은게 들어 있을 법한 갈색 봉투가 있었습니다.
살펴보니 표지 디자인도 두께도 다른 것이 전부 네 권인 노트.
일단 표지에 1이라고 적힌 노트를 골라 읽기 시작했습니다.
'유리고코로'라는 제목이 쓰인 이 노트.
'이건 뭐지! 왜 집에 이런 게 있는 거지.' - page 45
꿈이 아니라면 젊은 시절 재미로 아버지가 쓴 창작물임이 틀림없을 거라고, 얌전한 어머니가 이런 글을 썼을 리 없을 그런 이야기가 적혀있었습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의문이 들끓고 있는 지금.
어머니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유아기의 기억. 그건 정말 사실일까, 아닐까?
만약 사실이라면 바뀌기 전 어머니는 어디로 간 걸까?
그동안 어머니라고 생각했던 그 어머니는 도대체 누구였나?
그 머리카락 뭉치는 뭘 의미하나? - page 47
지금 당장 노트를 종이 상자에 도로 넣고 옷장 문을 닫고 전부 없었던 것으로 하기엔 이미 읽었다는 사실이, 그리고 이것을 끝까지 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에 읽은 후에 불행해지더라도, 후회하더라도 노트를 읽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선 알게 된 사실.
이렇게 '감각적인 안식처' 또는 '인식의 안식처' 혹은 '마음의 안식처'라는 게 없던 이 아이에게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지...
그리고 이 고백 노트를 적은 사람은 누구인지...
소설은 수기와 이를 읽는 주인공 '료스케'가 교차하면서 복잡하고도 미묘한 심리의 변화가, 그리고 안타까움이 읽는 이로 하여금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끔 해 주었습니다.
글쓴이와 당신의 생활은 도대체 어떻게 무너진 걸까?
그들의 나날도, 우리의 나날도, 언젠가 무너지리라는 운명 위에 성립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아무 문제없이 행복하기만 했던 걸까? - page 162
이 소설의 제목인 '유리고코로'가 의미하고자 했던 바는 이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때때로 겁먹은 듯 허공을 바라보고 이유도 없이 울음을 터뜨리는 것은 부서진 의식 어딘가에 꽂혀 있는 기억의 가시가 찌릿, 고통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 page 301
어딘가에 상처로 남아있던 기억의 가시가...
다시금 가시의 존재를 알려주면서 한걸음 나아가길 바라는 누군가의 마음이랄까...
솔직히 처음엔 호기심에, 재미로 읽기 시작하였지만 점점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이름 모를 슬픔이 자라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치 주인공 '료스케'처럼...
그래서 더 몰입을 하면서 읽었었고 마지막엔 작은 탄식이 나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당연하게 느꼈던 감정을 몰랐기에...
그 감정을 제대로 알려준 사람이 없었기에...
그리고 뒤늦게 감정의 의미를 제대로 알려 준 사람을 만났지만 너무나도 늦어버린 타이밍에...
'살인'이 나쁘다는 것은 잘 알지만, 그 죄를 받아야 함은 마땅하지만, 왜 비난보단 동정이 가는 것인지...
참으로 씁쓸하다는 말만 남을 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