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 - 오래된 사물들을 보며 예술을 생각한다
민병일 지음 / 아우라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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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벼룩시장이나 앤틱샵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특별히 골동품을 모으는 취미가 있거나 그들을 바라보는 안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옛 사물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과 진기함에 그저 번번히 유혹을 당하고 마는 것이다. 북적이는 길거리에 펼쳐진 벼룩시장이든 어스름한 가운데 알 수 없는 내음이 깃든 앤틱샵이든 옛 사물들은 분주한 일상을 밀어내고 침잠해 있던 아늑한 시공(時空)을 재현하는데 구애받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 사이를 서성이다보면 삶의 고단함이 사라지고 마치 할머니의 품에 안긴듯 평온한 시간에 잠겨들 수 있다. 옛 사물들을 만나는 또 다른 즐거움은 누군가의 사연이 깃든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물건들과 교감할 수 있다는 점이다. 모서리가 닳고, 빛이 바래고, 반들반들 길들여진 골동품들은 그것에 사람의 흔적이 배어있다는 것만으로도 쉽게 친근해지며 향수라는 강한 감성이 밀려오면서 더욱 특별한 감동을 자아내곤 한다.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은 마치 지면위에 펼쳐진 벼룩시장같은 느낌이다. 여기저기 서성이는 대신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긴다는게 다른점이긴 하지만 옛 물건들과 그에 얽힌 잔잔한 향수가 가져다주는 휴식은 현실의 벼룩시장에서와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골동품'하면 흔히 떠올릴 수 있는 타자기, 시계, LP, 라디오, 꽃병들은 저자의 마음 가득 고인 미술과 음악, 문학 이야기과 어우러져 한층 더 특별한 감성을 자아낸다. 이에 더해 독일을 중심으로한 문화 이야기가 풍성해 어느덧 골동품 하나로 먼 나라의 이국적인 정취까지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사실 이 책을 직접 만나기 전에는 골동품의 미적가치나 감정법에 관한 내용들이 주를 이룰것이라 예상했었다. 예를들어 램프를 볼 때, 아르누보 시대의 미학을 논하면서 램프를 이루는 곡선이나 그려 넣은 그림의 수준, 공예적 기교와 가치에 대한 평을 할 것이라 짐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골동품 전문가의 시각으로 옛 사물을 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예술인으로서 사물에 얽힌 사연와 감동, 그리고 그것을 돋워주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을 접목시켜 사유와 감성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특히 옛 물건들의 시각적 감흥에 곁들여지는 은은한 클래식 음악 이야기는 청각을 불러오고, 가끔씩 와인이나 맥주와 같이 미각과 후각을 자극시키는 주제까지 등장하여 공감각의 세계를 한껏 만끽할 수 있다.


저자가 소장한 옛 물건들은 어딘지 모르게 특별함이 느껴졌다. 물론 그 중에는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 같은 세계 명품도 있고, 파버카스텔(Faber-Castell)사 창립 222주년 기념 색연필(이 회사의 매니저도 처음 본다고 했던)처럼 희소가치가 있는 물건도 있지만 흔히 볼 수 있는 (그러나 오래된) 단추, 다리미, LP레코드, 꽃병, 시계, 몽당연필들에서도 특별함이 느껴지는 까닭은 분명 저자가 가지고 있는 물건에 대한 남다른 애정, 사물에 부여한 아름다운 의미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색색의 몽당연필을 꺼내 줄을 그으면 희미한 기억이 연필심을 따라 나온다.
할머니는 저 연필을 난쟁이로 만들어가며 생의 무엇을 기록했을까?(p.30)

저자는 벼룩시장의 할머니에게서 한 봉지의 몽당연필을 샀다. 하지만 그가 산 것은 색색으로 예뻐보이는 물건으로서의 몽당연필이 아니라 오래된 기억, 생에 대한 감흥이라는 어떤 의미로서의 몽당연필이다. 그가 사물을 바라보고 그것에서 더 풍부한 예술적 감성들을 엮어나가는 것을 보며 김춘수의 시 <꽃>이 떠올랐다. 그는 오래된 물건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꽃으로 피워냈으며, 그것에 예술적 사유화를 통해 햇살과 물을 주어 더욱 만개한 아름드리로 가꿔나갔다.

이 책을 읽다보니 범람하는 소비사회의 사물과 소유자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는 과연 내것으로 만드는 물건들에 어떤 의미를 얼마나 부여하고 있을까? 그리고 지금까지 무심코 '사용'해왔던 물건들에서 '교감'할 수 있는 온정어린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비록 골동품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내가 선택한 물건들에서 가격이나 품질, 디자인 이외의 어떤 다른 의미들이 숨어있는지 다시금 물건이 놓여있는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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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대중문화>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새봄의 책들과 함께 신간평가단 9기 활동 시작합니다!

이번달에는 과거냐 현재냐를 놓고 매우 고심했던 것 같습니다. 저의 관심도서는 대략 예술분야의 역사를 주제로 한 책들과 현대의 동향을 주제로한 책들로 나눌 수 있었는데, 최종 선정은 결국 현대쪽으로 마음이 쏠렸네요. 여기에 예술가 개개인의 색채와 정체성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은, '나는'으로 시작하는 두 권의 책을 나란히 놓아봅니다. 


<테마 현대미술 노트> 

현대미술, 현대미술, 하지만 사실 흔히 접하게 되는 현대미술은 최신 동향이라기 보다 현대미술의 태동에서부터 1990년대초반 포스트모더니즘까지의 미술을 위주로 한다는 점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특히 주요 업적을 가진 거장들을 위주로 소개하다 보니 그밖에 다양한 미술가들의 세계를 접할 기회도 드물었다. 이 책은 비록 서구중심이기는 하지만 바로 '지금' 미술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새로운 미술가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우선 고무적이다. 이에 더해 정체성, 몸, 시간, 장소, 언어, 과학, 영성이라는 테마를 통해 최신동향에 인문학적 해석을 시도하고 있는 점도 무척 기대된다.

 


<우리 시대의 미술가들>
  

전후의 상흔, 이어지는 독재, 군사정권과 같은 암울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치열하게 화단을 지켜왔던 우리나라의 대표미술가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서구의 추상에 동양적 사상을 반영시키고 동양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면서 든든한 우리 미술의 바탕이 되었던 이들 대표자들은 어쩌면 화려함과 재기 넘치는 현대미술의 꽃을 감상하기에 앞서 먼저 살펴봐야 할 뿌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플럭서스 예술혁명>

작년 유독 타계하신 백남준 선생에 관한 책이 2권이나 출간되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때 <백남준 :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를 읽어보지 못해 아쉬웠었는데 이 책이 그 아쉬움을 그나마 달래줄 수 있을 것 같다. 백남준이 자신의 청춘을 고스란히 바친 플럭서스 예술혁명에 대해 읽다보면 백남준을 통해 바라본 플럭서스, 플럭서스를 통해 바라본 백남준이라는 상보적인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며 플럭서스 운동 자체만의 매력에도 보다 심도있게 다가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나는 누구인가> 

삶에 대한 열정, 아니 의지를 미술에 고스란히 쏟아부었던 프리다 칼로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어쩌면 그녀는 렘브란트 만큼이나 많은 자화상을 그린 화가일지도 모르며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 했던 한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수많은 화가들의 자화상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돌이켜보고 이에 대한 답변을 찾아보는데 의미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미지를 통해 '나'를 관찰할 수 있는 다른 어떤 분야의 예술보다도 가장 '나'를 빈번한 주제로 삼았던 분야가 미술인만큼 이번에는 거울보다는 그림을 통해 나를 생각해 보고 싶다. 

 

 
 
<나는 예술가다> 

'예술가, 밖을 보다', '예술가, 안을 보다'라는 단순한 목차와 각각 그 아래에 단정하게 나열된 다섯 작가의 작품,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많은 지식을 강요하기 보다는 조용히 생각을 수렴하게 해줄 것 같다. 난해한 철학, 미술 용어도, 무슨 무슨 사조나 시대구분도 없이 그저 예술가로서의 삶과 창작의 현장만을 오롯이 담은 이 책은 인터뷰를 통해 한 인간으로서의 예술가를 만나볼 수 있는 편안한 시간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밖에도 관심이 있었던 책은 <시네리테르>, <그림 읽는 도서관>, <서양 사진사 32장면>, <건축의 욕망>, <벽화로 꿈꾸다>였는데, <시네리테르>는 문학과 영화의 접목을 통해 사유의 폭을 확대하는 평론집인듯 하다. 여기서 전혀 다른 색채를 가진 이창동 감독의 <시詩>와 박민규의 작품을 통해 한꼭지를 엮은 평론가 백지은의 글이 너무 궁금해 <우리 시대의 미술가들>과 교체할까 매우 고심했던 책. <그림읽는 도서관>은 사실 '그림읽기'류의 입문서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밖으로 고고학을 비롯한 다양한 지식이 담긴 흥미로운 책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술사에 빈번히 등장했던 '바로 그 그림들'이 아닌 새로운 그림들이 너무 아름다와 무척 유혹되기도 했다. <서양 사진사 32장면> 역시 수록된 흑백 사진들이 너무 아름다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역사적 사건을 연대순으로 담은 책이라지만 너무 시(詩)적이라 매우 인상깊었던 책. <건축의 욕망>은 레이트 아방가르드를 다루고 있는 보기 드문 번역서이며 저자가 해외 건축잡지 <Assemblage>의 창간자로 다양한 근/현대 건축가들의 작품집을 출간했던 이력이 있어 섬세한 분석이 기대된다. <벽화로 꿈꾸다>는 벽화 하나만을 집중적으로 음미할 수 있는 좋은 책이고 만나기 힘든 주제라 탐이 났지만 역사분야에 속할 것 같아 추천은 못하겠고 페이퍼를 통해 기억해두기로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하,하, <보이지 않는 용>... 
이 책은 미국 미술평단의 ‘이단아’로 불리며 수잔 손택, 아서 단토에 버금가는 비평가로 주목받는 데이브 히키의 책이다.
로쟈님 서재를 기웃거리다 딱! 눈에 들어온 책인데, 대체 지난 달 나는 왜 이 책을 보지 못했을까? (이는 필시 제목때문?)
<보이지 않는 고릴라>에 의하면 이런 것을 '주의력 착각'이라고 부른다. 눈 앞에 뻔히 보고도 보이지 않는... 
'보이지 않는 고릴라 테스트'를 제대로 통과하지 못했으니 고릴라건 용이건 보이지 않는 수 밖에...
게다가 나를 놀리듯 폴 오스터도 <보이지 않는>으로 한몫 거든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은가보다.
(그러고보니 색깔도 죽이 잘 맞네...이상은 책수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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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는 맨홀 2011-04-02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간 구경 잘하고 갑니다.

탄하 2011-04-03 12:27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댄스는맨홀님의 추천도서는 어떤 것인지도 궁금하네요.
 
보이지 않는 고릴라 - 우리의 일상과 인생을 바꾸는 비밀의 실체
크리스토퍼 차브리스.대니얼 사이먼스 지음, 김명철 옮김 / 김영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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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보이지, 않는다고??!"

정말이지, 눈을 뚱그렇게 뜨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는 실험용 영상으로 찍은 농구경기가 '공식 경기장'에서 진행된 줄 알았기에 그정도 규모에서 고릴라가 지나간다면 패스의 갯수를 세는데 정신이 팔려 못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 영상을 확인해 보니 이건 공식 경기장은 커녕 학교 체육관 규모도 아니고, 거의 실내의 한 구석 수준이다. 여기서 화면의 정 가운데를 거쳐 지나가는 고릴라를 못 봤다면 뭔가 시력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시력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저 착각이라는 인간 심리의 사각지대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넓을 뿐. 이렇게 눈앞에 바로 보면서도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보지 못하는 것을 주의력 착각(illusion of attention)이라고 한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우리의 착각은 주의력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억력, 자신감, 지식, 원인, 잠재력, 직관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부분에서 발생된다. 예를들어 내가 친구에게 가르쳐 준 것을 친구가 마치 자신의 지식인 양 내게 되가르쳐 줄 때, 어떤 일을 너무도 잘 안다고 나서는 사람에게 더 신뢰가 갈 때, 혹은 모차르트 CD가 지적 능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말에 현혹될 때, 빵껍질 무늬에서 성모 마리아 형태를 보고 신의 계시라 생각할 때, 이는 각각 기억력, 자신감, 잠재력, 원인 착각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는 일상에서 종종 발생될 수 있는, 그리고 때론 치명적일 수도 있는 착각의 사례들과 이에 관련된 심리실험, 연구 결과의 신뢰성 여부 검증 등을 통해 그동안 잘 볼 수 없었던 우리 심리의 사각지대를 구석구석 탐색한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고릴라'는 우리의 착각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볼 수 있는데, 이 고릴라는 매우 섬세하면서도 끈질기고 힘이 센 녀석이다. 특히 이것이 상업적 목적으로 섭외될 때는 눈에 확 들어오는 광고 문구나 멋진 스타보다 막강한 효과를 발휘한다. '천재'나 '두뇌향상'이라는 단어로 잠재력에 대한 기대감에 흠뻑 젖게하는 잠재력 착각은 각종 도서, 음반, 학습법, 식품들처럼 주변에서 흔히 찾기 쉬운 것들이며 반론을 제기하는 연구 결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한다니, 남들보다 더 뛰어나려는 인간의 욕망은 보이지 않는 고릴라에게 충실한 먹잇감이 되어주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착각에서 벗어나 세상을 보다 명확하게 보고 싶어하고 착각에 따르는 사소한 다툼, 크게는 분쟁이나 사고를 원하지 않으며 이를 위해 좀 더 주의를 기울이거나 지식을 습득하지만 사각지대와 같은 착각의 서식지는 그리 쉽게 청산될 수 없어 보인다. 게다가 얄궂게도 책 속에 소개된 모든 착각들을 엮은 상당 분량의 실험용 일화(독자들 스스로 읽어보며 착각을 테스트할 수 있도록 만든 이야기)는 이런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다시금 확인시켜줄 뿐,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인간 심리의 한계를 대면하고 발가벗은 본연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그동안 갖은 논리를 내세우며 완벽할 수 있을 것처럼 자부했던 인간의 우월감을 돌아보게 하는 솔직한 충고가 되어준다.

착각이라는 인간 심리의 사각지대는 그저 운전자의 자세가 되어 항상 주의를 기울이는 수밖에 없다. 물론, 주의를 기울인다고 하여 강박적으로 모든 것에 대처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각지대란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부분이므로 그것이 있다는 사실을 항상 인지하고, 사각지대를 만나기 쉬운 상황에서 더욱 조심하며, 자신의 운전 솜씨를 과시하기 보다는 교통 흐름을 살피는 것이 운전자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자세라는 의미이다. 또한 저자가 말하기를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의 아름다움은 비록 고릴라를 볼 수 없었다 할지라도 패스를 정확하게 셌다는데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살면서 착각으로 놓치거나 실수하는 부분이 있다 할지라도 주어진 상황에 대해 최선을 다했다면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유를 갖는 다는 것. 그것이 바로 착각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삶의 미학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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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문학에 취하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그림, 문학에 취하다 - 문학작품으로 본 옛 그림 감상법
고연희 지음 / 아트북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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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들어 난생 처음으로 인터넷 연재소설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최신 트렌드인지 아니면 유명 소설가의 작품이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읽는 연재 소설에는 뜻밖에도 상당한 수준의 일러스트가 삽입되어 있는데, 그림이 어찌나 인상적이면서도 해당 회의 분위기를 적절히 묘사하고 있는지 글 읽는 재미 이상으로 그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러스트 특유의 스타일(그림체)로 주인공의 외모에 선입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림으로 표현된 분위기나 상황 해석이 너무나 인상적이라 오히려 작가와 독자 사이의 교감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그림이 글에 묘사된 이야기 이상의 것을 더할때는 올바른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을까?'. 우연히 읽게 된 인터넷 연재소설로 인해 텍스트와 이미지의 관계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림, 문학에 취하다>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단순히 시(詩) 한 수 곁들여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그림과 마주하려던 이 책에서 '옛 그림 속에 깃든 문학성, 이것이 '문제'다'라는 문구를 본 순간 어떤 '경지'에 오른 옛 선조들은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갔을까에 온통 관심이 모아지면서 은근히 책을 통한 해답도 기대하게 되었다.

책 속에 소개된 작품들을 그림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우리에게 친숙한 김정희의 <세한도>, 안견의 <몽유도원도>, 전기의 <귀거래도> 를 비롯 김이혁, 김홍도, 김득신, 이인문, 윤제홍 등 19세기초 빼어난 화가들이 함께 참여한 12폭 병풍 <고산구곡시화병>과 같은 대작, 그리고 그 밖에도 기행문을 표현한 <만폭동도>, 유교의 가르침을 담은 <누백포호>, 유일한 민화에 해당하는 <구운몽도>까지 다양한 문학의 장르와 조우하는 그림들이 담겨있다.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문학과 그림과의 만남이 일대일 대응으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문학에서도 아름답고 심오한 구절들은 시대를 따라 다른 작품 속에서도 되풀이 되는 경향이 있으며, 비록 그림이 한 편의 글을 택했다 할지라도 이와 관련된 다른 문학작품들을 함께 읽어나가다 보면 그림과 문학이 서로 경쟁하듯 하나의 경지를 향해 달음질쳐 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또한 하나의 문학 작품에 대해서도 여러 화가들이 묘사를 시도해 각각의 기교와 개성을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웠는데, 비평가들에 따라 견해에 차이는 있겠지만 문학의 절정을 이미지의 절정으로 가장 잘 표현한 그림이 최고의 평가를 받는다는 점에서 역시 두 가지 예술이 추구하는 지향점은 동일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짧은 식견으로 결론지어 보건대, 미술이 문학을 취해 그를 좇는다기 보다는 문학과 미술은 궁극의 이상을 향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함께 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북의 <공산무인도>와 소식의 <십팔대아라한송>의 구절 '공산무인 수류화개(빈산에 사람 없고, 물 흐르고 꽃이 피네)'은 문학과 그림이 추구한 특별한 정신적 경지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소식의 <십팔대아라한송>은 부처의 덕을 기리는 게송(찬양가)으로 여기서 시적인 극치라 칭송받는 '공산무인 수류화개'는 깨달음 후에 다시 보는 산수와 자아와의 물아합일이 표현된 구절이다. 최북은 이 깨달음의 경지를 축자적인 이미지에 일치하도록 충실하게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가슴이 탁 풀리는 오묘한 기운 마저 담고 있어 그의 평생 득의작 중 하나라 불러도 좋을 만큼 귀하고 아름답다. 한편 강세황의 <괴석>은 육우의 시(詩)를 원작 이상으로 표현한 그림이다. 사실 육우의 시에서 비롯된 <수석유화>라는 그림은 여러 점이 있고 강세황 또한 <수석유화>를 그리기도 했지만 묘하게도 단순히 <괴석>이라 이름붙인(그러나 <수석유화와 동일한 소재인) 이 그림은 당시 꽃을 그리는 코드를 벗어나 색채 없는 국화를 탄생시키면서까지 은자의 미덕을 표현하고 있어 가히 화가의 품성과 발상이 문학을 넘어섰다 이를 수 있겠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로 손꼽히는 김홍도의 <추성부도>는 중국의 문인 구양수의 <추성부(가을소리)>를 묘사한 그림이다. <추성부도>는 스산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압도하는 매력이 있어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는 작품이었는데, 아마도 이 그림에 대한 특별한 감동은 스러져갈듯 종이를 스치는 붓결과 붓결이 사라진 싸늘한 여백에서 진정 바람소리가 느껴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저자는 소리를 글로 묘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며 그 소리를 그림으로 묘사한다는 것은 더더욱 난이도가 높은 일이라 말하면서 <추성부도>의 경우도 글이 없었다면 쉽게 가을바람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표현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은 소리를 표현한 여타 그림 중에서 최고였다.

 

- <추성부도>의 좌측 반에 해당하는 일부(상)
- 뭉크의 <절규>와 <추성부도>의 우측 부분의 세부도(하)
 


이 책에 소개된 많은 그림들이 대부분 시(詩)를 취하고 있는데 비해 정선의 <만폭동도>와 윤제홍의 <한라산도>는 기행문을 취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그 중에서도 윤제홍의 <한라산도>는 그림의 주변에 병풍을 두른 것처럼 빼곡히 글씨를 채워놓은 점이 눈에 뜨이는데, 사실 정철의 <관동별곡>을 묘사한 <만폭동도>에 비해 명성이나 지명도에 뒤질지는 모르겠지만 당시로서는 가보기 어려운 한라산을 최대한 상세히 묘사하려는 정성은 독특한 표현방식과 함께 어우러져 특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삼강행실도> 중 <누백포호(누백이 호랑이를 잡다)>의 판화도는 백성들의 도덕적 교화를 목적으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문학과 그림의 만남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리고 글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방식에서도 가장 고전적이고 기본적인 단계의 방식을 취하고 있어 예술적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 역시 문학이 그림과 만나는 다양한 범주에 속하므로 이 책에서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는 점이 무척 반가왔다. 우측 하단으로부터 지그재그로 올라가며 읽어야 하는 이 그림은 시간의 경과 묘사가 오늘날의 관점과 다른 것이 인상깊었으며 그 당시 패륜문화가 만연하고 있었다는 것도 비추어 짐작할 수 있다.

 

<그림, 문학에 취하다>는 문학을 표현한 그림을 통해 옛 그림을 감상하는 안목에 깊이를 더해줄 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을 한 편 한 편 실제로 읽어나감을 통해 관련된 종교, 사상, 문화, 풍속 등 다양한 범위의 지식을 접하고 이를 통해 오히려 그림의 감동을 더 진하게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었다. 사실 그동안 옛 그림 속의 문장들은 읽는다기 보다는 그림의 일부로서 서체와 기교에 관한 평이 더 부각되어 언급되곤 했는데, 이제 그 문장들을 유심히 읽어보고 그림을 바라보니 저자의 말대로 문학 작품을 읽고 그림의 '안'으로 들어가 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이나마 경험할 수 있어 무척 즐거웠다. 더불어 문학을 취했던 선조들의 그림처럼 텍스트를 취하는 우리의 이미지에도 궁극을 향한 선의의 도전이 계속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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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읽는 9가지 시선>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예술을 읽는 9가지 시선 - 형태로 이해하는 문화와 예술의 본질
한명식 지음 / 청아출판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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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

시각예술의 세계에서 이 한마디 만큼 형태의 변화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경우가 또 있을까?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이 남긴 이 명제는 근대 산업혁명의 시대를 주도했던 합리주의, 기능주의 사고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오랫동안 형태의 당위성에 대한 진리로 신봉받으면서 지치지 않는 기계들을 통해 장식이 배제되고 규격화된 형태들을 무수히 쏟아냈다. 그 결과 우리는 지난 20세기의 대부분을 획일적이고 각진 형태들과 함께 해왔는데, 이후 포스트모던의 영향으로 형태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면서 이젠 바야흐로 "형태는 감성을 따른다(Form follows emotion)"라는 명제가 더 신뢰있게 들리는 듯 하다.

이처럼 동시대와 가장 가까운 근대의 일부만 살펴본다 해도 우리가 인식하는 형태에는 역사, 과학, 철학을 포함한 여러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시대에 따라 영향력을 미치는 주 요소의 특성으로 인해 형태에도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술을 읽는 9가지 시선>도 동일 선상에서 '문명 이래'라는 보다 폭넓은 시간 간격을 두고 형태에 영향을 미쳐온 주 요소들을 살펴보며, 동서양의 차이, 원근법, 죽음, 진화, 모나드, 기하학, 미술, 디자인, 조형이라는 9가지 요소들을 통해 결국 예술이란 생물학적으로 진화한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예술이 인간 본성이라는 것은 예술 역시 생존이라는 현실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인지심리학자 리처드 니스벳의 실험에 따르면 서양인은 형태를 통해 사물을 인식하고 동양인은 재료를 통해 인식한다는 결론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타 민족들과의 경쟁 속에서 보다 명확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내려야 했던 서양과 통일된 문화를 가지고 서로와의 관계 속에서 삶을 유지해야 했던 동양이 각자의 환경을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사물의 인식에도 차이를 가져왔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영향으로 서양에서는 자연을 존재(being)로 보았기에 인간 문명의 부산물인 건축도 자연과 대등한 존재로서 땅 위에 구축된 형태로 표출되며, 동양에서는 자연을 무(無),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다시 채워짐을 기다리는 비워놓은 자리로 보았기에 건축은 그 빈자리를 찾아 안착된 형태로 표출되며 자연과의 관계를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 비움의 공간이 눈에 뜨인다.


예술을 바라보는 9가지의 시선 중 가장 독특하고 눈길을 끄는 것은 '죽음'이다. 실상 '죽음'을 소재로한 다양한 예술 작품들이 있다는 것도, 죽음이라는 모티브가 중세 예술에서 가장 활발하게 표현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큰 비중을 차지할 만큼 커다란 요소로 작용하고 있음은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표현이지만 죽음은 부활을 통해 끊임없이 생성되면서 현대의 예술, 특히 상업적 성격을 띤 대중문화를 통해 우리와 빈번히 만난다. <가위손>, <배트맨>, <렛미인>과 같이 중세 고딕풍을 재현한 고스(goth) 영화, 이러한 스타일을 패션에 반영한 고스(goth) 족, 록음악이나 할로윈 축제,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인체의 신비 전>까지, 주변을 둘러보면 의외로 우리가 죽음을 바라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죽음이 끊임없이 예술 속에 드러나는 것은 고통스런 현실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우리 마음의 반영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중세말 팔라초 아바텔리스가 그린 <죽음의 승리>와 현대 <인체 신비 전>의 메인인 군터 폰 하겐스의 작품이 너무도 흡사한 모습으로 읽히는 것은 불안으로 가득한 현대 사회의 인간들이 얼마나 현실로부터의 탈피를 염원하는지 표현해주는 암묵적인 메시지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기하학은 형태를 설명하는 가장 직접적이고도 명확한 시선이 일 것이다. 그러나 일반인이 생활에서 접하는 기하학이란 대부분 유클리드 기하학뿐이니 기하학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철학의 진보는 물론 그에 수반된 사고와 형태의 변화에 대해 그리 민감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마치 은빛 구름이 몰려가는 듯한 프랭크 게리의 구겐하임 미술관을 보며 위상 기하학을 떠올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지만 유클리드 기하학에 의해 축조된 파르테논 신전과 나란히 비교해 보면 형태의 상이함은 물론 그것을 만들고 사용하는 사람들의 과학관이나 세계관에 확연한 차이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형태는 그 변화된 모습으로 우리가 무심코 속해있는 동시대의 사고방식에 대해 각성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형태를 통해 바라본 예술의 세계에서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미술이다. 미술사에 나타난 형태의 변화만 해도 이집트 미술의 완전한 형태, 로마 미술의 서사적 형태, 르네상스 미술의 논리적 형태 등 8가지에 달하니 원시시대부터 똑같은 생물학적 두 눈을 가지고도 이토록 시대에 따라 다르게 바라보게끔 만든 사고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다시금 실감할 수 있다. 이 중 바로크는 형태를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 미술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고 할만큼 혁명과도 같은 양식이었는데, 원근법이 사용되었다 할지라도 이전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가 선적이고 평면적이었던 반면 바로크의 회화는 색채와 면, 공간감을 중요시 했기에 훨씬 더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대조는 우리의 시각을 좌우했던 이성과 감성의 대조라고 간략히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이어지는 여덟번째 시선인 근대의 디자인과 추상을 읽으면서 오늘날 포스트 모던에 의해 표출되는 형태와의 차이점을 생각해 본다면 이것 또한 이성과 감성의 대조를 새롭게 조명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생각한다.


<예술을 읽는 9가지 시선>에서의 형태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의미하며 이에 영향을 미쳤던 요소 역시 광범위하여 중요도를 가늠하기 힘들겠지만, 결어에 해당하는 마지막 시선으로 조형을 선택한 것에는 미래의 디자이너들을 향한 저자의 애정이 담겨있다. 형태에서도 가장 고도의 사고와 기술을 요하는 조형은 공간 속에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자연물의 창조와도 비견될 수 있는 형태 표출의 방식이기에 자연을 더 이해하고 자연이 이뤄낸 세상에 더 가깝게 접근하라는 조언은 디자이너는 물론 테크놀러지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우리의 미적 지향점이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교훈으로 작용한다. 

디자인을 위한 조형, 조형을 위한 추상, 이것들은 결국 형태에 의미를 부여함이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이루어 낸 세상의 형태에 더 가까이 접근하려는 의지다. 브랑쿠시가 말하는 추상도 마찬가지다. 인간도 자연이며 그러한 형태에 익숙해진 인간의 본능도 자연이기에.(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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