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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 - 오래된 사물들을 보며 예술을 생각한다
민병일 지음 / 아우라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길을 가다가 벼룩시장이나 앤틱샵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특별히 골동품을 모으는 취미가 있거나 그들을 바라보는 안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옛 사물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과 진기함에 그저 번번히 유혹을 당하고 마는 것이다. 북적이는 길거리에 펼쳐진 벼룩시장이든 어스름한 가운데 알 수 없는 내음이 깃든 앤틱샵이든 옛 사물들은 분주한 일상을 밀어내고 침잠해 있던 아늑한 시공(時空)을 재현하는데 구애받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 사이를 서성이다보면 삶의 고단함이 사라지고 마치 할머니의 품에 안긴듯 평온한 시간에 잠겨들 수 있다. 옛 사물들을 만나는 또 다른 즐거움은 누군가의 사연이 깃든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물건들과 교감할 수 있다는 점이다. 모서리가 닳고, 빛이 바래고, 반들반들 길들여진 골동품들은 그것에 사람의 흔적이 배어있다는 것만으로도 쉽게 친근해지며 향수라는 강한 감성이 밀려오면서 더욱 특별한 감동을 자아내곤 한다.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은 마치 지면위에 펼쳐진 벼룩시장같은 느낌이다. 여기저기 서성이는 대신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긴다는게 다른점이긴 하지만 옛 물건들과 그에 얽힌 잔잔한 향수가 가져다주는 휴식은 현실의 벼룩시장에서와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골동품'하면 흔히 떠올릴 수 있는 타자기, 시계, LP, 라디오, 꽃병들은 저자의 마음 가득 고인 미술과 음악, 문학 이야기과 어우러져 한층 더 특별한 감성을 자아낸다. 이에 더해 독일을 중심으로한 문화 이야기가 풍성해 어느덧 골동품 하나로 먼 나라의 이국적인 정취까지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사실 이 책을 직접 만나기 전에는 골동품의 미적가치나 감정법에 관한 내용들이 주를 이룰것이라 예상했었다. 예를들어 램프를 볼 때, 아르누보 시대의 미학을 논하면서 램프를 이루는 곡선이나 그려 넣은 그림의 수준, 공예적 기교와 가치에 대한 평을 할 것이라 짐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골동품 전문가의 시각으로 옛 사물을 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예술인으로서 사물에 얽힌 사연와 감동, 그리고 그것을 돋워주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을 접목시켜 사유와 감성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특히 옛 물건들의 시각적 감흥에 곁들여지는 은은한 클래식 음악 이야기는 청각을 불러오고, 가끔씩 와인이나 맥주와 같이 미각과 후각을 자극시키는 주제까지 등장하여 공감각의 세계를 한껏 만끽할 수 있다.


저자가 소장한 옛 물건들은 어딘지 모르게 특별함이 느껴졌다. 물론 그 중에는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 같은 세계 명품도 있고, 파버카스텔(Faber-Castell)사 창립 222주년 기념 색연필(이 회사의 매니저도 처음 본다고 했던)처럼 희소가치가 있는 물건도 있지만 흔히 볼 수 있는 (그러나 오래된) 단추, 다리미, LP레코드, 꽃병, 시계, 몽당연필들에서도 특별함이 느껴지는 까닭은 분명 저자가 가지고 있는 물건에 대한 남다른 애정, 사물에 부여한 아름다운 의미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색색의 몽당연필을 꺼내 줄을 그으면 희미한 기억이 연필심을 따라 나온다.
할머니는 저 연필을 난쟁이로 만들어가며 생의 무엇을 기록했을까?(p.30)

저자는 벼룩시장의 할머니에게서 한 봉지의 몽당연필을 샀다. 하지만 그가 산 것은 색색으로 예뻐보이는 물건으로서의 몽당연필이 아니라 오래된 기억, 생에 대한 감흥이라는 어떤 의미로서의 몽당연필이다. 그가 사물을 바라보고 그것에서 더 풍부한 예술적 감성들을 엮어나가는 것을 보며 김춘수의 시 <꽃>이 떠올랐다. 그는 오래된 물건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꽃으로 피워냈으며, 그것에 예술적 사유화를 통해 햇살과 물을 주어 더욱 만개한 아름드리로 가꿔나갔다.

이 책을 읽다보니 범람하는 소비사회의 사물과 소유자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는 과연 내것으로 만드는 물건들에 어떤 의미를 얼마나 부여하고 있을까? 그리고 지금까지 무심코 '사용'해왔던 물건들에서 '교감'할 수 있는 온정어린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비록 골동품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내가 선택한 물건들에서 가격이나 품질, 디자인 이외의 어떤 다른 의미들이 숨어있는지 다시금 물건이 놓여있는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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