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 잊혀진 질문 - 절망의 한복판에서 부르는 차동엽 신부의 생의 찬가
차동엽 지음 / 명진출판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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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질문을 한다는 것은 좋은 답변을 찾는 것보다 더 어렵다. 대체적으로 좋은 질문이란 그 출발점에서부터 낯선 세계를 탐색하며 생성되기 때문이다. 익숙한 세계에 대해 '왜?'라고 이유을 묻는 것은 좋은 질문에 속한다. 미지의 무엇이나 가치있는 무엇에 대해 탐색케 하는 질문 역시 그러하다. 그런데 얄궂게도 좋은 질문에 대한 답변은 좀처럼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도 답변의 문은 견고한 듯 잠잠하기만 하다. 그래서 좋은 질문들은 대체적으로 익숙한 삶 가운데 잊혀진다.

 

'잊혀진 질문들'은 결코 의지에 의해 떨쳐진 것이 아니기에 우리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 질문들이 해결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잊혀져 있지만 다시 발굴되게끔 되어있는'(p.10) 질문들인 것이다. 따라서 <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 잊혀진 질문>(이하 <잊혀진 질문>)은 우리가 완결하지 못했던 좋은 질문들을 소환하고 이들과 재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좋은 질문들'이란 개인의 가치와 상황에 따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특히 위기와 불확실성의 시대 속에서 떠올릴만한 질문들과 궁극적인 삶의 목적과 희망을 구하는 질문들을 중심으로 '좋은 질문들'을 구성하였다.

 

사실 <잊혀진 질문>은 故 이병철 회장의 질문 목록에서 시작되었다. 사연인즉, 1987년 이병철 회장이 박희봉 신부에게 보낸 질문지가 적임자로 채택된 정의채 몬시뇰에게 넘겨졌는데, 이병철 회장과 정의채 몬시뇰의 만남이 주선된 상황에서 이 회장이 갑작스레 타계한 것이다. 이후 이 질문지는 오래도록 잊혀졌다가 다시 차동엽 신부(이 책의 저자)에 의해 답변이 시도되고, 그는 故 이병철 회장의 질문들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도움될 수 있도록 약간의 구조조정을 거쳐 새롭게 정리했다.

 

책 속에는 이병철 회장의 질문 원본이 수록되어 있어서 너무도 궁금한 마음에 찬찬히 살펴보았는데, 일단은 정성스레 써 내려간 가지런한 손글씨에 놀랐고, 다음으로는 24개의 문항 모두가 종교에 관한 내용이라는 것에 놀랐다. 세상에서 가질 것은 다 가진 이병철 회장이 무엇이 아쉬워 종교에 대해 이토록 많은 질문을 품었을까? 이런 것을 보면 샐러리맨인 옆집 아저씨나 대기업 회장인 이병철이나 인생의 궁극성 앞에서는 별반 차이 없이 평등한 듯 싶었다. 질문 중에는 '영혼이란 무엇인가?'처럼 상당히 근원적인 질문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누구나 한번쯤은 품어볼만한 신과 종교에 관한 질문들이며 어떤 질문들은 천주교도라면 쉽게 답할 수 있을만큼 간단한 질문들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병철 회장이 그 질문들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면밀히 정리해냈다는 점이며, 이것은 기어이 답변을 찾아보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보인다. 물론 그가 세상에서 쌓은 부와 이에 관한 비리를 생각해 볼 때 일반인들보다 더 절실한 마음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질문에 향한 자세에만 국한해 본다면 그의 치밀함과 결단력은 본받을만 하다.

 

<잊혀진 질문>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이병철 회장의 질문 중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당면문제와 맞닿는 것들을 선택해 새로이 구성한 것이다. 좀 더 간략히 말하면 암울하고 절망적인 시대 속에서 어떻게 희망의 근거를 찾을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이런 주제는 이미 너무 흔하다. 자기계발서뿐만 아니라 심리학, 철학에서도 넘쳐나는 것이 '희망'이나 '위로'인데, 굳이 이병철 회장의 질문까지 곁눈질해 가며 찾을 필요가 있을까? 이에 대해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렇다'이다.

 

이 책은 삶의 목적이나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신(神)'의 지혜를 빌고자 하므로 천주교인이나 기독교인이 아닌 경우 상당히 새로운 시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마인드맵 코치나 심리학자, 철학자가 들려주는 답변과는 다른 종류의 내용일 것이다. 비록 종교적인 색채가 강해 일부 무신론자들에게는 불편한 내용이 될 수도 있지만 부당하고 절망적인 세상에 대해 '왜?'냐고 묻는다면 그저 불평등한게 세상이니까, 확률에 의한 결과이니까라는 체념의 결론을 내리는 것 보다 신을 통해 의미있는 답을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뿐만아니라 신의 존재 여부와 그의 뜻에 대해 가졌던 여러가지 의문에 관해서도 과학과 철학과 말씀(경전)을 아우르는 답변들을 가급적 쉽게 말해주고 있으므로 평소 신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면 간략하게나마 천주교나 기독교의 입장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이 책을 읽어나가는데 있어서 염두에 둘 것은 신의 관점과 세상의 관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은 '죄(罪)'라는 단어를 받아들이는 관점의 차이를 예로 설명할 수 있는데, 우리가 아는 죄는 법이나 도덕적으로 잘못한 것을 의미하지만 천주교가 말하는 죄는 '과녁에서 빗나감'을 의미하며 그 기준은 신, 혹은 신의 말씀이다. 만일 어떤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탈세도 하지 않고, 고용인들을 착취하지도 않으며, 기부까지 하면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업을 한다고 하자. 그가 사업을 통해 대단한 부를 누리는지의 여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어느날 신께서 그에게 공부를 하라고 명하셨다. 하지만 이 사업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공부할 시기는 훌쩍 넘어섰고 너무도 예상치 않았던 것이었기에 실행으로 옮기지 않는다. 이런 경우, 그는 세상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오히려 선하고 존경받을만 하지만 신의 기준으로 보면 죄를 짓는 것이 된다. 이처럼 신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에는 차이가 있으며 역사를 바라볼 때 시대의 눈을 가져야 하는 것 처럼 신을 바라볼 때에도 기준의 조절이 필요하다.

 

차동엽 신부의 스승의 스승이되시는 故 최민순 신부의 자작시는 사랑의 본질과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깨달음을 말하는 시(詩)이지만 이 시를 통해 관점의 변화가 갖는 위대함 또한 설명할 수 있다.

 

꽃을 본다.
꽃의 아름다움을 본다.
꽃의 아름다우심을 본다.(p.216)


현재 자신이 당면한 문제에 대해 절망과 원망의 관점으로 일관한다면 우리는 꽃을 볼 수 없다. 하지만 이 문제를 '싸워야 할 적'이라는 관점으로 바꾼다면 '꽃을 본다'고 할만큼의 제정신은 차릴 수 있다. 더 나아가 마음 속의 분노를 거둬내고 위기를 기회라는 관점으로 바꾼다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행복, 즉 '꽃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대체적으로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의 한계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꽃의 아름다우심'을 볼 수 있는 관점이란 어떤 것일까? 그 답은 이 책 속에 있다. 그리고 저자가 역설하고자 하는 '희망'도 우리가 흔히 말하는 희망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흘러 나오는 새로운 관점의 희망이 될 것이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이라는 이생에서, 우리는 먹고, 마시고, 울고, 웃으며 세월을 보낸다. 그러는 동안 한때 품었던 좋은 질문들은 잊혀지고 결국 마지막 순간 문득 생각나는 것이 후생에 대한 질문인데, 이병철 회장의 예화에서처럼 그 때가 되면 너무 늦을 수도 있다. 이미 철저한 무신론자나 유신론자가 아니라면 <잊혀진 질문>을 통해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신과 그가 주는 생(生)의 의미에 대해. 어떤 결론이 나든지 죽음에 임박해서 구하는 것보다는 낫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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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 -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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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허기질 땐 바다로 간다. 끊어질 듯 주린 창자를 움켜쥐고, 갈라질 듯 마른 입술을 앙다물고. 그리고는 무한히 넘실대는 바다의 잔을 온 몸으로 들이키며, 벌건 육즙이 뚝뚝 듣는 일출까지 기다렸다가 게걸스레 삼켜버린다. 아침이 되면 바다는 조금도 줄지 않았고 태양은 날쌔게 하늘 위로 솟아 있는데 어째서 포만감은 이리도 충만한 것일까! 모래 사장에 남겨진 빈 소주 한 병은 아무런 단서도 되지 않는다.

 

허기진 인생에 대해 바다는 늘 이런 식으로 채워주곤 했다. 그래서 바다는 마르지 않는 신비의 충전소라 생각했으며, 고독의 순도를 높여 절망에 탁해지지 않는 법을 연마하는 훈련소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바닷가에 나갔더니 변했더라. 이제는 나와 독대하지 말고 좀 더 윤택하게 허기를 다독이라고 말하더라. 바로 21세기형 자산어보라 부르는 이 책을 통해.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가 알려주는 일차적인 해법은 진정으로 먹는 것이다. 먹거리에는 숭어의 위(위장), 군소, 거북손, 노래미처럼 평소 뭍에서는 쉬 먹을 수 없는 해산물들도 있고, 삼치, 참돔, 홍합처럼 흔히 먹을 수 있는 해산물들도 있는데, 다들 어찌나 신선해 보이는지 생기의 광채가 유난히 밝다. 투명하고 먈먈한 살갗을 빛내며 가지런히 누워있는 회는 두 말 할 것도 없고, 찜통 뚜껑을 막 열었을 때의 '훅~'하는 바다내음이 나는 삶은 해산물과 얼큰하게 바글거리는 생선탕까지, 지지고, 볶고, 무치고, 구워도 생기는 끝내 가시지 않는다. 천 만번을 부서져도 다시 일어나는 파도처럼 해산물의 생기는 그 어떤 양념과 조리법에도 끄떡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타고 올라 더욱 생생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가장 원초적인 바다내음을 품은 성게알을 밥에다가 썩썩 비벼먹고, 병어회에 구수한 된장을 구성지게 찍어 입 안으로 집어 넣는데, 니들이 고등어를 아느냐! 섬에서 먹는 고등어는 뭍것들과 격이 다르니라 하며 고등어가 의기양양하게 끼어든다. 뭍에서 겪었던 비릿한 시간들일랑 잊으라고, 그것은 너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라고 일러주는 듯했다. 오! 즐거운 날것들의 향연이여, 맛 뿐만 아니라 가르침마저도 훌륭하구나!

 

그러나 연이어 펼쳐지는 해산물 잔치는 단순히 미식기행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만일 그랬다면 이 책은 <허기질 때 바다에 가라>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인생'의 허기에 대한 본격적인 해법은 날 것과 맨 손과의 만남, 그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제 손으로 낚시줄과 그물을 드리워 기다리고 끌어 올려 생명의 꿈틀거림을 촉각으로 각인시키고 아가미의 마지막 한 호흡을 숨죽여 바라보며 상하지 않은 또렷한 눈동자를 맞받아 응시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바다의 생기를 나의 감각으로부터 삼키우고 '쌩(生)'의 의미로 마음을 떠먹이는 인생 허기해소법의 시작이다. 그런가하면 잡아 올린 날것들을 제 손으로 손질하는 과정 또한 만만치 않게 배부른 명상이다. 유선형의 세계에 담긴 오묘한 생명의 지형도를 따라 경건한 손길로 비늘을 긁어내고, 배를 갈라 필요한 내장과 필요치 않은 내장을 가려내며, 가시와 살점을 구분해 한치의 오차도 없이 깨끗하게 도려내는 것. 이것은 뭍 세계의 시름을 잊고 오직 날 것이 내게 준 소우주에 몰입하는 경지를 지나게 한다. 이 책은 그 순수하고 아름다운 노동의 과정을 생계형 낚시라는 저자만의 방식으로 몸소 보여주었는데, 숙련된 손놀림이며 해산물에 대한 지식이 어찌나 대단하던지 이 사람이 정말 소설가인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허기에 대한 또 하나의 해법은 바다에서 눈을 돌려 마을로 향해가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삶의 의욕이 없을 때 시장에 나가 현장에 부딪히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북적거림을 음미하는 것과도 같다. 물론 여기서 한 마디 참견하며 떠들썩한 사투리의 정겨움에 자신의 정을 섞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것이 어렵다면 여수시 삼선면 거문도에서 태어나 일곱 살에 낚시를, 아홉 살에 해녀들 틈에서 잠수하는 법을 배웠던 저자의 바다마을 살이를 슬며시 참고로 해본다. 돌담에 줄을 맞춰 김을 널고, 여름 갈치 시즌을 맞아 신나게 배를 띄우며, 할머니들께서 옹기종기 모여 홍합을 손질하시는, 고독이란게 비집고 들어올 틈 없이 삶에 충실히 몰두하는 그 모습들을 말이다.

 

바다에서 태어났으나 뭍 세상에서 떠돌다 뼛속까지 굶주렸던 저자는 바다에 올 때마다 그 허기를 채우고 다시 힘을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 헛헛한 삶에 마침표를 찍고 아예 고향으로 돌아와 글을 쓰고 있는데, 바다가 주는 포만감의 내공이 만만치 않은 것 같다. 비록 이 책이 그의 소설작품은 아니지만 곳곳에 배어있는 바다와 생명에 대한 사색이 뭉클할 정도로 두터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쩐지 '두터웠다'고 표현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바다에 대한 저자의 우정이 글 속에 내재해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는 생선 손질을 할 때 지느러미를 잘라내지 않는다.[...]서양요리의 아스파라거스는 이를테면 분향소의 흰 국화와 같은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죽인 생명의 명복을 비는 의미에서 아스파라거스를 접시 위에 올렸단다. 따로 올릴 것이 없는 나는 본 모습을 망가지지 않게 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것이다.(p.108-109)

 

나는 잡은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버릇이 있다. 거쳐온 이력을 알고 싶은 것이다.(p.281)


 

고독과 이상의 상징이었던 바다는 여전히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먼 발치에서 가르침을 하사하는 스승으로서의 바다라 할지라도 인생의 허기를 채워줄 만한 충만함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맛깔스런 음식과 날것의 촉감, 사람살이의 정을 통해 차오르는 포만감에는 수평적인 우정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인생을 두텁게 감싸준다는 것을 이 책에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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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비상시대 - 석유 없는 세상, 그리고 우리 세대에 닥칠 여러 위기들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 지음, 이한중 옮김 / 갈라파고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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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으며 커다란 고철덩어리가 되어버린 미래의 세상을 떠올렸다. 제아무리 인간의 의지가 스위치를 올린다 할지라도 얼마 후면 기계화된 세상을 움직여 줄 석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석유가 없다면 원시적인 톱니바퀴부터 최첨단의 정교한 부품들까지 단 한 바퀴도 굴러가지 않는다. 우리들의 세상은 지브리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기계들이 아닌지라 고철덩어리가 자유의지로 움직여주길 기대할 수는 없다. 남은 것은 그저 멈춰서서 부식되고 녹슬 날을 기다리는 것 뿐. 앞으로 100년도 아니고, 50년도 아닌, 37년 후...지구상엔 단 한 방울의 석유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 그러나 석유종말의 위기가 드러나고 비상 시스템을 가동할 시점까지 고려해 본다면 석유를 마음놓고 쓸 수 있는 날은 37년보다 훨씬 적게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일상은 모든 것이 석유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일단 주변에 있는 모든 물건들이 어떻게 수송되어 왔는지 생각해 보면 된다. 그러나 옷을 입고,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스마트폰으로 통화하는 동안 석유를 떠올리는 사람은 흔치 않다. 이처럼 생활과 밀접한 석유에 대해 우리는 어째서 무심한 것일까? 클레이 셰키가 인터넷 시대를 맞은 대중들의 잉여 시간을 '많아지면 달라진다'는 논리로 풀어갔다면 석유에 대해서는 '멀어지면 달라진다'라는 논리쯤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기본적으로 대량소비에 부합할 만한 산유국은 전 세계 국가 중 몇 개국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우리나라와 같이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는 생산과 관리의 측면에서 한 발치 멀어진다. 풍성한 매장량을 자랑하는 산유국이라 할지라도 석유는 국가와 기업차원에서 관리되며 일반인이 제 집 앞마당에서 우물을 퍼올리 듯 마음대로 시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석유의 실태에 관해 멀어진다. 뿐만아니라 석유를 통해 생산되는 플라스틱, 섬유 등과 같은 제품들은 주변에 넘쳐나지만 화학공학의 공정과정을 거친 이후라 우리에게 석유로서 인식되는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눈앞에 있지만 보이지 않는 형태의 석유는 이렇게 눈속임을 하며 또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것이다.

 

석유의 보유, 생산, 관리, 제조, 응용 면에서 모두 멀어진 대중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한대로 여겨질 만큼 쉬지않고 공급되는 석유를 '소비'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맘 편히 석유를 소비하는 동안 석유를 가진 자들과 이에 관여된 자들만이 진실을 공유한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에릭 데이비스라는 학자는 '합의된 최면상태'라고 불렀는데, 위에서 언급한 '멀어지면 달라지는' 결과를 매우 정확히 말해 주는 듯하다. 석유 매장량에 대한 여러 학자들이나 기관의 수치 중 어떤 것이 진실일까? 석유를 대체할 만한 에너지는 미래를 보장할 만큼 그 연구성과가 긍정적일까? 각종 미디어를 통해 석유와 미래 에너지에 관한 낙관적인 견해와 회의적인 견해가 들려오지만 관련 직종의 종사자가 아닌 이상 무엇이 '진실'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내 집 앞의 우물과 저 먼 나라의 시추지와의 차이는 이렇게 어마어마한 것이다.

 

낙관론과 회의론 중 그 어느 것도 확인할 길은 없으나 회의론의 입장인 <장기비상시대>의 주장 가운데는 몇 가지 주목할만 점들이 있다. 먼저 그동안 소비해 왔던 석유는 가장 얻어내기 쉽고 질이 좋은 액체 석유였지만 남은 석유는 얻어내기 어렵고 질 나쁜 액체 석유, 그리고 반고체 및 고체 상태인 석유라는 사실이다. 어떤 경우는 시추작업에 드는 에너지와 퍼 올릴 수 있는 석유를 비교해 볼 때 차라리 시추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은 상황도 벌어진다. 다음으로는 석유소비율과 인구증가율이 만들어 내는 부정적 시너지 효과이다. 저자에 따르면 석유 소비가 정점을 지난 후(이미 70년대에 지났다) 남은 양은 매년 2~6퍼센트 정도씩 고갈되어갈 것인데, 그 사이에도 세계의 인구는 한동안 늘어날 것이라 전망한다. 농업에 있어서도 지구온난화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간 천연가스로 만든 비료나 석유로 만든 농약, 탄화수소를 동력으로 한 관계 덕분에 곡물 생산량을 250퍼센트나 증가시켰던 것을 생각해 보면 석유를 비롯한 화석연료의 조력 없이 현상을 유지해 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장기비상 시대에는 석유와 늘어난 인구 문제도 모자라 식량난까지 겪게 된다는 의미가 아닌가! 또한 저자의 시나리오처럼 석유 보유량에 따라 세계의 패권이 재배치되고 심지어 약탈전쟁까지 일어나게 된다면 미국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무척 암담하다.

 

우리가 가진 유일한 희망이라곤 석유를 대체할 에너지를 개발하고 그에 관련된 시스템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대체 에너지의 미래 역시 그리 밝아보이지는 않는다.

 

재생 가능 에너지는 석유나 가스를 기반으로 하는 시스템을 이용하면서 석유나 가스를 대체할 수 없을 것이다...(중략)...그런데 우리 시대의 많은 '환경주의자'나 '녹색 운동가'는 투입되는 에너지를 바꾸어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은 석유나 가스로 생산한 전기를 이용하는 미국 휴스턴의 그 많은 에어컨을 전부 풍력이나 태양광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중략)...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재생 가능 에너지를 이용하여 계속해서 거대한 시스템을 거대한 규모로 운영하고 싶다는 염원이야 말로 우리가 태양광이나 풍력이나 수력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의 본질이다.(p.166)

 

이밖에도 합성연료, 중합체 해체(TDP), 바이오 매스, 영점 에너지(ZPE) 등과 같은 최신 기술의 연료 역시 성공적인 활용에 있어서는 불투명한 상태다. 대체에너지에 관한 주장에 저자의 동의하지 않는(혹은 동의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나의 경우는 어느 정도 동의하는 편이다. 한창 휴대폰과 노트북의 시대를 예견하던 90년대 초반 무렵 물로 가는 자동차와 태양열 주택에 관한 기사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는데, 현재 휴대폰과 노트북에 대한 예견은 그대로 재현된 반면 대체에너지의 활용은 재현은 커녕 크게 진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이 가장 무서운 것이었고, 대체 에너지에 대해 너무 낙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으며 <장기비상시대>를 눈여겨 볼 수밖에 없었다.

 

석유 없는 '장기비상시대'를 대처할 방안으로 저자는 '규모축소화(downscaling)'를 제안한다. 말 그대로 석유를 투입해 대규모로 운영하던 모든 것들을 소규모로, 지역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 책에는 미국의 교외도시에 대한 비판이 적잖이 등장하는데, 석유를 다량으로 소비하는 자동차 기반의 출퇴근과 생활 물자 수송, 도로건설의 면에서 현재 교외도시를 중심으로한 도시계획이 얼마나 미래에 부적합한 것인지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저자가 역설하는 소도시의 부활 또한 생태도시와 같은 맥락에서 깊이있게 고려해볼만한 견해이다. 현재 많은 도시에서 시도하고 있는 생태도시란 단지 환경오염이 적고 녹지가 많은 쾌적한 도시를 의미하지 않는다. 생태도시의 개념에는 지역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도시, 자생 가능한 도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고, 이것이 소도시 규모로 추진될 경우 더욱 순조롭게 확산될 수 있을 듯하다. 물론, 우리가 불편함을 감수하고 장기비상시대의 위험성에 대해 충분히 인지한다면 말이다.

 

<장기비상시대>는 석유에 관한 모든 내용을 담고 있다. 석유 하나에 이렇게 많은 혜택과 문제점이 연관되어 있었는지 새삼 놀랄만큼, 우리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사항들까지 다뤄나간다. 장기비상시대에 관한 저자의 비관적인 미래 시나리오는 차치하고라도 석유를 둘러싼 패권 다툼과 석유에 관련된 산업들의 전망, 그밖에 기후, 의학, 인구 등에 관한 면밀한 분석은 석유를 태우며 돌아가는 거대한 기계 세상을 실감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며, 최면에 걸린 듯 무의식적으로 석유를 소비하는 대중들에게 이제 깨어날 시간이라고 알려주는 최면해제의 신호음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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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짓는 법 - 한옥시공 길라잡이
김종남 지음 / 돌베개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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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을 옮겨놓은 것 같다. 진작 나와야 했을 책, 넘겨보고만 있어도 좋아서 웃음이 나오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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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미술관 - 그림이 즐거워지는 이주헌의 미술 키워드 30 이주헌 미술관 시리즈
이주헌 지음 / 아트북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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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이란 참 독특한 건물이다. 덩치는 크지만 내부는 대부분 텅 비어있고 모든 공간은 흐름을 전제로 존재한다. 이는 밀집과 머묾을 기본으로 하는 일상의 아파트, 학교, 사무용 빌딩과는 확연히 다른 유형의 공간이다. 오죽하면 어떤 건축가는 미술관을 가리켜 '텅 빈 상자의 연속'이라고 불렀을까! 그러나 미술관의 텅 빈 공간에도 엄연한 점유자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빛이다. 빛은 미술관 곳곳으로 스며들어 주인장의 이름으로 잠들어 있는 신화를 깨우고, 역사에게 이야기를 재잘거리게 하며, 인물들의 눈동자를 반짝이게 한다. 그리고 때론 우리의 머리와 가슴을 통해 내부로 흘러 들어와 미적체험의 순간을 선사하기도 하는데, 바로 이 순간이 물리적 흐름을 떠나 감상자로서 예술적 흐름으로 편입하는 교차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림으로부터 충격을 받아 전율하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오랫동안 떠날 수 없는 극적인 경험들을 예술과 만나는 순간, 즉 예술의 흐름속에 빠지는 순간이라 생각하지만 이것은 심미안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에게 해당될 뿐, 다수의 사람들이 경험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다수의 범인들은 어떻게 미술을 감상해야 할까? 이에 대해 저자가 강조하는 것이 '지식'이다. 심미안은 선천적인 재능과도 같아서 노력한다고 반드시 얻을 수 있는 능력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식을 갖추고 사유하기에 힘쓴다면 그림을 보는 눈이 조금씩 열리기를 기대할 수 있다. 한편 심미안을 가진 사람이라도 지식이 없다면 직관으로 얻은 감동을 하나의 탁월한 가치로 승화시키거나 재구성할 수 없다. 이렇게 미술감상에서의 지식의 역할과 심미안(직관)의 역할을 구분해 보는 것은 이 책을 읽어나가는 출발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저자는 직관을 실에, 지식을 구슬에 비유하고 있는데, <지식의 미술관>은 우리들에게 구슬을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심미안을 갖게 해준다는 허황된 약속은 하지 않는다. 다만 지식이 미적체험을 더 풍부하게 해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지식을 통해 사유를 확장해 나가는 가이드 역할을 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매우 솔직한 면이 마음에 드는 책이었다.

 

지식은 낱낱의 정보 한 톨로부터 시작된다. 개별적으로는 별 것 아닌 것 같고, 이를 통해 대단한 깨달음이 오는 것은 아니지만 점점 쌓이다 보면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는 눈송이처럼 부지불식간에 모여 커다란 힘의 근원이 된다. 이 책에도 정보형 지식이 상당히 담겨있는데, 키아스쿠로, 데칼코마니아, 디 소토 인수와 같은 용어를 비롯해 인상파와 튜브물감, 위작, 스탕달 신드롬 처럼 흥미를 유발하는 곁다리 이야기들이 가미되어 소소한 정보와 함께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보들은 그림에 얽힌 역사, 종교, 문화에 관한 이야기들로, 결코 가볍게 읽어 넘길 수 없다. 뿐만아니라 <지식의 미술관>에는 18세기 이전의 명화들이 상당수 소개되기에 그림을 통해 시대를 읽는 힘 또한 기를 수 있다.예술가의 방, 혹은 경이의 방을 뜻하는 쿤스트카머는 유명화가의 걸작에 속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역사적 지식을 통해 읽어낼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은 그림이다. 온갖 진귀한 것을 모아놓은 이 수집품들은 당시 서구인들의 지적 호기심을 나타내는 척도였으며, 단순히 특산물이나 외국의 풍경, 진귀한 동물들을 백과사전식으로 모아놓은 것 같아도 이면에는 경험주의 철학의 등장과 기득권자들의 특권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배경이 흐르고 있다.

 

 

 

<지식의 미술관>에서 가장 눈여겨볼만한 부분은 '알레고리'에 관한 작품들이다. 알레고리란 '다른 이야기'라는 뜻으로 겉으로 보여주는 이야기 외에 다른 이야기가 내포되있는 것을 의미하는데, 아마도 알레고리를 해독하는 재미가 16~18세기의 명화들을 감상하는데 큰 몫을 차지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알레고리'하면 빈번히 등장하는 '미와 사랑의 알레고리'부터 신앙의 알레고리, 바니타스 알레고리, 문법의 알레고리 등 상징을 통해 그림을 읽어나가는 방법과 이들을 통해 총체적으로 가치를 통합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이 책의 곳곳에 등장하는 알레고리를 보면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말한 '인생이란 초콜렛 상자와 같다'라는 대사가 생각난다. 마치 예측할 수 없는 초콜렛을 꺼내는 것처럼 그림속에 숨어있는 상징들을 발견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초콜렛을 다 꺼내 먹어야 한 상자가 어떤 맛의 컨셉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림도 모든 상징들을 다 발견해야 전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음미할 것은 한 병의 포도주와 같은 지식들이다. 포도주는 생포도를 원료로 하지만 알콜과 배합되고 숙성되어 전혀 다른 물질로 변형(transform)된 음료인 것처럼 지식에서도 하위지식(정보)을 원료로 전혀 다른 경지의 맛을 이끌어 낼 수 있다. 특별히 낱알같은 사소한 지식에서 한 묶음의 초콜렛 같은 지식, 그리고 차원을 달리하는 포도주같은 지식으로 확장되며 진행하는 책은 아니지만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대를 오가며 새로운 시각을 접목시키고 숙성시켜 나간 흔적은 책 속에서 빈번히 접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의 창작법인 데페이즈망(낯설게 하기)에서 비즈니스 세계의 데페이즈망을 연관시키기도 하고, 오감도(五感圖)가 성행했던 시대적 배경에서 여성 누드화와의 관계를 찾아내기도 한다. 클림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키스>는 남성 안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이 화해한다는 깊이있는 해석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통해 남녀 평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배우게 된다.

 

가부장 사회에서는 성 역할을 엄격히 구분하기 때무에 남성에게도 여성성이 있고 여성에게도 남성성이 있다는 사실은 결코 인정되지 않는다...(중략)...따라서 남성 안의 여성성과 여성 안의 남성성은 시종일관 억압된다. 여성 억압이 남성 억압이기도 한 것은 그것이 남성 안의 여성성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남녀 화해란 남성과 여성의 화해를 넘어 이렇듯 남성 안의 여성성과 여성 안의 남성성이 그 반대의 정체성과도 화해를 하는 것이다.(p.129~130)


<지식의 미술관>은 미술 입문서라고 부르기엔 조금 특별한 책이었던 것 같다. 일단 시대나 사조별로 그림을 나누거나 몇 가지 주제를 통해 쉽고 간단하게 설명하려는 책이 아니었던 까닭도 있고, 키워드를 중심으로 다양한 지식을 종횡무진 하며 사고를 확장해 가는 것이 신선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아니라면 '빅토리안 페인팅과 영화', '반달리즘과 미술'같은 주제의 글을 만나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미술의 중심 키워드라 여기기엔 조금 부족한 사냥감 그림, 트롱푀이유, 미술품 약탈(엘기니즘) 등의 이야기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는 점인데, 역시 다른 책에서는 진지하게 살펴볼 기회가 흔치 않으므로 이 책을 통해 읽어보는 것도 유용할 것이다.저자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통념에 100% 동의하지는 않는다. 위에서 언급했듯 뛰어난 심미안이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혜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적인 감식안을 가지고 큐레이터나 비평가가 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미술에 대한 지식만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유익한 감상의 시간을 즐길 수 있다. 그림이 얼마나 훌륭한지 알아볼 수 있는 능력도 좋지만 어떤 그림에서든 자기만의 생각을 확장해 나간다는 것이 더 즐거운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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