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 잊혀진 질문 - 절망의 한복판에서 부르는 차동엽 신부의 생의 찬가
차동엽 지음 / 명진출판사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좋은 질문을 한다는 것은 좋은 답변을 찾는 것보다 더 어렵다. 대체적으로 좋은 질문이란 그 출발점에서부터 낯선 세계를 탐색하며 생성되기 때문이다. 익숙한 세계에 대해 '왜?'라고 이유을 묻는 것은 좋은 질문에 속한다. 미지의 무엇이나 가치있는 무엇에 대해 탐색케 하는 질문 역시 그러하다. 그런데 얄궂게도 좋은 질문에 대한 답변은 좀처럼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도 답변의 문은 견고한 듯 잠잠하기만 하다. 그래서 좋은 질문들은 대체적으로 익숙한 삶 가운데 잊혀진다.

 

'잊혀진 질문들'은 결코 의지에 의해 떨쳐진 것이 아니기에 우리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 질문들이 해결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잊혀져 있지만 다시 발굴되게끔 되어있는'(p.10) 질문들인 것이다. 따라서 <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 잊혀진 질문>(이하 <잊혀진 질문>)은 우리가 완결하지 못했던 좋은 질문들을 소환하고 이들과 재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좋은 질문들'이란 개인의 가치와 상황에 따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특히 위기와 불확실성의 시대 속에서 떠올릴만한 질문들과 궁극적인 삶의 목적과 희망을 구하는 질문들을 중심으로 '좋은 질문들'을 구성하였다.

 

사실 <잊혀진 질문>은 故 이병철 회장의 질문 목록에서 시작되었다. 사연인즉, 1987년 이병철 회장이 박희봉 신부에게 보낸 질문지가 적임자로 채택된 정의채 몬시뇰에게 넘겨졌는데, 이병철 회장과 정의채 몬시뇰의 만남이 주선된 상황에서 이 회장이 갑작스레 타계한 것이다. 이후 이 질문지는 오래도록 잊혀졌다가 다시 차동엽 신부(이 책의 저자)에 의해 답변이 시도되고, 그는 故 이병철 회장의 질문들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도움될 수 있도록 약간의 구조조정을 거쳐 새롭게 정리했다.

 

책 속에는 이병철 회장의 질문 원본이 수록되어 있어서 너무도 궁금한 마음에 찬찬히 살펴보았는데, 일단은 정성스레 써 내려간 가지런한 손글씨에 놀랐고, 다음으로는 24개의 문항 모두가 종교에 관한 내용이라는 것에 놀랐다. 세상에서 가질 것은 다 가진 이병철 회장이 무엇이 아쉬워 종교에 대해 이토록 많은 질문을 품었을까? 이런 것을 보면 샐러리맨인 옆집 아저씨나 대기업 회장인 이병철이나 인생의 궁극성 앞에서는 별반 차이 없이 평등한 듯 싶었다. 질문 중에는 '영혼이란 무엇인가?'처럼 상당히 근원적인 질문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누구나 한번쯤은 품어볼만한 신과 종교에 관한 질문들이며 어떤 질문들은 천주교도라면 쉽게 답할 수 있을만큼 간단한 질문들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병철 회장이 그 질문들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면밀히 정리해냈다는 점이며, 이것은 기어이 답변을 찾아보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보인다. 물론 그가 세상에서 쌓은 부와 이에 관한 비리를 생각해 볼 때 일반인들보다 더 절실한 마음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질문에 향한 자세에만 국한해 본다면 그의 치밀함과 결단력은 본받을만 하다.

 

<잊혀진 질문>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이병철 회장의 질문 중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당면문제와 맞닿는 것들을 선택해 새로이 구성한 것이다. 좀 더 간략히 말하면 암울하고 절망적인 시대 속에서 어떻게 희망의 근거를 찾을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이런 주제는 이미 너무 흔하다. 자기계발서뿐만 아니라 심리학, 철학에서도 넘쳐나는 것이 '희망'이나 '위로'인데, 굳이 이병철 회장의 질문까지 곁눈질해 가며 찾을 필요가 있을까? 이에 대해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렇다'이다.

 

이 책은 삶의 목적이나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신(神)'의 지혜를 빌고자 하므로 천주교인이나 기독교인이 아닌 경우 상당히 새로운 시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마인드맵 코치나 심리학자, 철학자가 들려주는 답변과는 다른 종류의 내용일 것이다. 비록 종교적인 색채가 강해 일부 무신론자들에게는 불편한 내용이 될 수도 있지만 부당하고 절망적인 세상에 대해 '왜?'냐고 묻는다면 그저 불평등한게 세상이니까, 확률에 의한 결과이니까라는 체념의 결론을 내리는 것 보다 신을 통해 의미있는 답을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뿐만아니라 신의 존재 여부와 그의 뜻에 대해 가졌던 여러가지 의문에 관해서도 과학과 철학과 말씀(경전)을 아우르는 답변들을 가급적 쉽게 말해주고 있으므로 평소 신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면 간략하게나마 천주교나 기독교의 입장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이 책을 읽어나가는데 있어서 염두에 둘 것은 신의 관점과 세상의 관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은 '죄(罪)'라는 단어를 받아들이는 관점의 차이를 예로 설명할 수 있는데, 우리가 아는 죄는 법이나 도덕적으로 잘못한 것을 의미하지만 천주교가 말하는 죄는 '과녁에서 빗나감'을 의미하며 그 기준은 신, 혹은 신의 말씀이다. 만일 어떤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탈세도 하지 않고, 고용인들을 착취하지도 않으며, 기부까지 하면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업을 한다고 하자. 그가 사업을 통해 대단한 부를 누리는지의 여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어느날 신께서 그에게 공부를 하라고 명하셨다. 하지만 이 사업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공부할 시기는 훌쩍 넘어섰고 너무도 예상치 않았던 것이었기에 실행으로 옮기지 않는다. 이런 경우, 그는 세상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오히려 선하고 존경받을만 하지만 신의 기준으로 보면 죄를 짓는 것이 된다. 이처럼 신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에는 차이가 있으며 역사를 바라볼 때 시대의 눈을 가져야 하는 것 처럼 신을 바라볼 때에도 기준의 조절이 필요하다.

 

차동엽 신부의 스승의 스승이되시는 故 최민순 신부의 자작시는 사랑의 본질과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깨달음을 말하는 시(詩)이지만 이 시를 통해 관점의 변화가 갖는 위대함 또한 설명할 수 있다.

 

꽃을 본다.
꽃의 아름다움을 본다.
꽃의 아름다우심을 본다.(p.216)


현재 자신이 당면한 문제에 대해 절망과 원망의 관점으로 일관한다면 우리는 꽃을 볼 수 없다. 하지만 이 문제를 '싸워야 할 적'이라는 관점으로 바꾼다면 '꽃을 본다'고 할만큼의 제정신은 차릴 수 있다. 더 나아가 마음 속의 분노를 거둬내고 위기를 기회라는 관점으로 바꾼다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행복, 즉 '꽃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대체적으로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의 한계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꽃의 아름다우심'을 볼 수 있는 관점이란 어떤 것일까? 그 답은 이 책 속에 있다. 그리고 저자가 역설하고자 하는 '희망'도 우리가 흔히 말하는 희망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흘러 나오는 새로운 관점의 희망이 될 것이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이라는 이생에서, 우리는 먹고, 마시고, 울고, 웃으며 세월을 보낸다. 그러는 동안 한때 품었던 좋은 질문들은 잊혀지고 결국 마지막 순간 문득 생각나는 것이 후생에 대한 질문인데, 이병철 회장의 예화에서처럼 그 때가 되면 너무 늦을 수도 있다. 이미 철저한 무신론자나 유신론자가 아니라면 <잊혀진 질문>을 통해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신과 그가 주는 생(生)의 의미에 대해. 어떤 결론이 나든지 죽음에 임박해서 구하는 것보다는 낫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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