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 -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생이 허기질 땐 바다로 간다. 끊어질 듯 주린 창자를 움켜쥐고, 갈라질 듯 마른 입술을 앙다물고. 그리고는 무한히 넘실대는 바다의 잔을 온 몸으로 들이키며, 벌건 육즙이 뚝뚝 듣는 일출까지 기다렸다가 게걸스레 삼켜버린다. 아침이 되면 바다는 조금도 줄지 않았고 태양은 날쌔게 하늘 위로 솟아 있는데 어째서 포만감은 이리도 충만한 것일까! 모래 사장에 남겨진 빈 소주 한 병은 아무런 단서도 되지 않는다.

 

허기진 인생에 대해 바다는 늘 이런 식으로 채워주곤 했다. 그래서 바다는 마르지 않는 신비의 충전소라 생각했으며, 고독의 순도를 높여 절망에 탁해지지 않는 법을 연마하는 훈련소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바닷가에 나갔더니 변했더라. 이제는 나와 독대하지 말고 좀 더 윤택하게 허기를 다독이라고 말하더라. 바로 21세기형 자산어보라 부르는 이 책을 통해.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가 알려주는 일차적인 해법은 진정으로 먹는 것이다. 먹거리에는 숭어의 위(위장), 군소, 거북손, 노래미처럼 평소 뭍에서는 쉬 먹을 수 없는 해산물들도 있고, 삼치, 참돔, 홍합처럼 흔히 먹을 수 있는 해산물들도 있는데, 다들 어찌나 신선해 보이는지 생기의 광채가 유난히 밝다. 투명하고 먈먈한 살갗을 빛내며 가지런히 누워있는 회는 두 말 할 것도 없고, 찜통 뚜껑을 막 열었을 때의 '훅~'하는 바다내음이 나는 삶은 해산물과 얼큰하게 바글거리는 생선탕까지, 지지고, 볶고, 무치고, 구워도 생기는 끝내 가시지 않는다. 천 만번을 부서져도 다시 일어나는 파도처럼 해산물의 생기는 그 어떤 양념과 조리법에도 끄떡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타고 올라 더욱 생생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가장 원초적인 바다내음을 품은 성게알을 밥에다가 썩썩 비벼먹고, 병어회에 구수한 된장을 구성지게 찍어 입 안으로 집어 넣는데, 니들이 고등어를 아느냐! 섬에서 먹는 고등어는 뭍것들과 격이 다르니라 하며 고등어가 의기양양하게 끼어든다. 뭍에서 겪었던 비릿한 시간들일랑 잊으라고, 그것은 너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라고 일러주는 듯했다. 오! 즐거운 날것들의 향연이여, 맛 뿐만 아니라 가르침마저도 훌륭하구나!

 

그러나 연이어 펼쳐지는 해산물 잔치는 단순히 미식기행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만일 그랬다면 이 책은 <허기질 때 바다에 가라>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인생'의 허기에 대한 본격적인 해법은 날 것과 맨 손과의 만남, 그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제 손으로 낚시줄과 그물을 드리워 기다리고 끌어 올려 생명의 꿈틀거림을 촉각으로 각인시키고 아가미의 마지막 한 호흡을 숨죽여 바라보며 상하지 않은 또렷한 눈동자를 맞받아 응시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바다의 생기를 나의 감각으로부터 삼키우고 '쌩(生)'의 의미로 마음을 떠먹이는 인생 허기해소법의 시작이다. 그런가하면 잡아 올린 날것들을 제 손으로 손질하는 과정 또한 만만치 않게 배부른 명상이다. 유선형의 세계에 담긴 오묘한 생명의 지형도를 따라 경건한 손길로 비늘을 긁어내고, 배를 갈라 필요한 내장과 필요치 않은 내장을 가려내며, 가시와 살점을 구분해 한치의 오차도 없이 깨끗하게 도려내는 것. 이것은 뭍 세계의 시름을 잊고 오직 날 것이 내게 준 소우주에 몰입하는 경지를 지나게 한다. 이 책은 그 순수하고 아름다운 노동의 과정을 생계형 낚시라는 저자만의 방식으로 몸소 보여주었는데, 숙련된 손놀림이며 해산물에 대한 지식이 어찌나 대단하던지 이 사람이 정말 소설가인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허기에 대한 또 하나의 해법은 바다에서 눈을 돌려 마을로 향해가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삶의 의욕이 없을 때 시장에 나가 현장에 부딪히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북적거림을 음미하는 것과도 같다. 물론 여기서 한 마디 참견하며 떠들썩한 사투리의 정겨움에 자신의 정을 섞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것이 어렵다면 여수시 삼선면 거문도에서 태어나 일곱 살에 낚시를, 아홉 살에 해녀들 틈에서 잠수하는 법을 배웠던 저자의 바다마을 살이를 슬며시 참고로 해본다. 돌담에 줄을 맞춰 김을 널고, 여름 갈치 시즌을 맞아 신나게 배를 띄우며, 할머니들께서 옹기종기 모여 홍합을 손질하시는, 고독이란게 비집고 들어올 틈 없이 삶에 충실히 몰두하는 그 모습들을 말이다.

 

바다에서 태어났으나 뭍 세상에서 떠돌다 뼛속까지 굶주렸던 저자는 바다에 올 때마다 그 허기를 채우고 다시 힘을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 헛헛한 삶에 마침표를 찍고 아예 고향으로 돌아와 글을 쓰고 있는데, 바다가 주는 포만감의 내공이 만만치 않은 것 같다. 비록 이 책이 그의 소설작품은 아니지만 곳곳에 배어있는 바다와 생명에 대한 사색이 뭉클할 정도로 두터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쩐지 '두터웠다'고 표현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바다에 대한 저자의 우정이 글 속에 내재해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는 생선 손질을 할 때 지느러미를 잘라내지 않는다.[...]서양요리의 아스파라거스는 이를테면 분향소의 흰 국화와 같은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죽인 생명의 명복을 비는 의미에서 아스파라거스를 접시 위에 올렸단다. 따로 올릴 것이 없는 나는 본 모습을 망가지지 않게 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것이다.(p.108-109)

 

나는 잡은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버릇이 있다. 거쳐온 이력을 알고 싶은 것이다.(p.281)


 

고독과 이상의 상징이었던 바다는 여전히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먼 발치에서 가르침을 하사하는 스승으로서의 바다라 할지라도 인생의 허기를 채워줄 만한 충만함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맛깔스런 음식과 날것의 촉감, 사람살이의 정을 통해 차오르는 포만감에는 수평적인 우정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인생을 두텁게 감싸준다는 것을 이 책에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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