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직업의 역사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8
이승원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평생 통조림 공장에서 일했고 평생 깡통만 만졌어. 깡통 재질이 변하는 거나 뚜껑 여는 방식이 달라지는 걸 보면서 세상이 점점 살기 편해진다는 걸 느꼈지. 깡통 포장 디자인이 바뀌는 걸 보면서 사람들 취향이 변해가는 걸 알았어. 사람들 입맛이 달라지는 건 새로 통조림이 생기거나 양념 맛이 달라지는 걸로 실감했어. 말하자면 이 깡통으로 세상을 알아 간 셈이야.


편혜영의 단편집 『저녁의 구애』 中 <통조림 공장>, 221쪽


 

산업화와 기계화의 전반부에 태어나 지금까지도 명맥을 이어가는 것을 들어보자면 통조림이 있다. 물론 통조림이 그 때 그 시절처럼 병문안이나 명절선물의 인기품목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통조림 공장에는 통조림을 통해 세상의 변화를 배웠다고 자부할 만큼 오랫동안 일한 사람들이 몇 명쯤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소개하는 전화교환수, 변사, 기생, 전기수 등 9개의 직업에서 일했던 사람들도 소설 속의 공장장과 같은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비록 냉정한 역사가 이 직업들을 필요로 하지 않은 방향으로 발전해 갔고, 직업의 태생 자체도 제약이 많거나 평생을 일할 만큼 안정적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이 힘겨운 직업들 역시 우리에게 들려 줄 세상사가 있다. 근대의 욕망으로 태어났으나 더 큰 욕망으로 힘없이 사라진 9개의 직업들은 일상뿐만 아니라 우리의 문화와 사고방식, 그리고 경제적 메커니즘의 성장통을 밑바닥에서 고스란히 겪어왔기 때문이다.
 

기계와 인간 사이에서...전화수, 물장수, 인력거꾼
근대화에서 눈에 띄게 변화한 것은 '기계'의 출현이다. 기계는 많은 사람들의 직업을 앗아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직업을 생산해 내기도 했고 혹은 직업의 형태를 진화시키기도 했다. 전화수의 경우 기계와 함께 등장한 새로운 직종이었다. 전화기는 처음부터 각 가정의 기계만으로 통화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어서 중간에 연계자가 필요했는데, 송신자와 수신자를 연결해주는 기계 앞에 앉아 자신도 기계의 일부가 되어야 했던 사람들이 바로 전화수들이다. 또한 이들은 피크타임에는 무려 210통화라는 반복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동시에 서비스직으로서 진상같은 고객들까지 감당해야 했던 감정노동의 시조격이기도 하다. 물장수는 힘만 좋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직업 같지만 의외로 까다로운 점이 많았다. 물이란 게 먹거리의 기본이고 보건위생과도 직결되는 부분이 많아 철저한 관리가 필요했고 물을 퍼다 팔 수 있는 급수권, 자리권의 문제를 비롯 독점과 같은 시장의 문제와도 직면해야 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1908년 이후 근대식 수도가 개통되면서 물장수들은 한차례 큰 변화를 겪었는데,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어이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물밀매까지 성행했다. 그렇다면 인력거꾼이라고 평이한 직업의 역사를 가지고 있을까? 인력거꾼도 물장수처럼 힘 좋고 발 빠르면 그만이라 생각하겠지만 단발령에 항의하기도 하고 조합을 만들기도 하며 최하층민의 권리를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뿐만 아니라 가난을 대물림 하지 않겠다고 3천명의 인력거꾼들이 단결한 가운데 박봉을 모아 자식들의 학교를 설립한 일화는 하층민들의 비장한 삶의 의지가 돋보이는 대목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은 점점 더 기계화 되어갔다. 그리고 전화수는 통신 자동화의 속도에, 물장수는 거대한 수도 시스템의 흐름에, 인력거꾼은 희대의 발명품 자동차에게 생존의 수단을 빼앗겼다. 물론 현재는 고객센터 상담원이나 택시운전사 같이 이전 직업의 진화된 형태로 볼 수 있는 새로운 직업들이 생겼지만 이들이 가난과 비인간화에 맞서가며 초석을 놓은 노동자의 권리 투쟁은 기계로 대체할 수 없는 고귀한 결실이었다.
 

강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기생, 유모, 여차장
근대화가 이뤄지면서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바로 여성들의 사회진출이다. 물론 그 당시 여성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그리 많지도 않았고 숫자도 지금보다 훨씬 적었지만 사회적으로 볼 때 커다란 변동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들 중 기생은 사실 고려시대부터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주로 왕이나 고관대작을 상대했으므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매춘부와는 전혀 다른 격이다. 기생에는 여러 층이 있어서 최고의 기생 ‘예기(藝妓)’는 말 그대로 문화예술인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이미 1927년, 전난홍이라는 기생이 '기생도 노동자'라는 주장을 했다고 하니 자부심마저 대단한 듯하다. 여성 직업인으로서 요구되는 자격은 유모에게 있어서도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이는 유모를 두는 가정이 주로 부유층이었고 아이의 교육과도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여차장의 경우 그나마 자격조건이 크게 까다롭지 않은 편이어서(하지만 그 때에도 '어느 정도' 예뻐야 했음은 오늘날과 같다) 경쟁률이 대단했지만 교통사고와 소매치기의 위협, 더 심각하게는 성희롱과 성폭력에 노출되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진출이란 순수한 여권신장을 의미하지 않았다. 자본가들은 여성을 값싼 노동력이나 구색 맞추기의 일환으로 여겼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으로 여성이 진출하기에는 문턱이 너무 높았다. 뿐만 아니라 이전의 부유계층을 통해 주어진 자격들도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격하되어 갔다. 하지만 여성들에게도 꿈이 있었다. 비록 사회의 약자에 해당하는 위치에서 남성들로부터 부당하고 억울한 취급을 받았지만 경제권이라는 비밀의 열쇠를 향해 묵묵하게 인고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여권신장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낮은 곳으로부터 솟는 활력...변사, 전기수, 약장수
유럽을 거닐다 보면 길거리 예술인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들은 악기를 연주하거나 마술쇼, 때론 춤을 선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우리나라 근대 풍경 속에서 이와 유사한 모습을 볼 수 있으니, 이 풍경의 주인공들이 바로 전기수와 약장수이다. 전기수는 한 마디로 책을 읽어주는 사람이다. 해외의 경우 전기수는 노동자들의 위안이 되기도 했으며, 우리나라는 담배가게, 약국, 주막 등을 무대로 낭독연기를 펼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한 때는 이동 도서관의 역할도 했으며 전기수들 여럿이서 무리를 지어다니는 기업의 형태를 띠기도 했다. 약장수들은 악기연주나 서커스로 호객행위를 하며 팍팍했던 시절 일상의 볼거리를 제공하는 엔터테이너 역할을 (본의 아니게) 했다. 그러나 의약품 또한 건강과 직결되는 문제였으므로 이들의 호객행위 보다는 불법 매약행위가 더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의료기관과 약품이 턱없이 부족하던 시절, 가난한 사람들에게 반가운 이동약국이 되어주기 보다는 짝퉁 약품으로 그들을 등쳐먹던(?) 약장수. 그들의 약을 사먹느니 차라리 호객행위만 바라보는 것이 건강에 더 도움이 될 듯싶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무성영화에서 대사를 읊어주는 역할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변사는 마치 오늘날 영화스타에 준할 정도로 인기있는 연예인이었다. 또한 변사의 전성시대에는 각 변사마다 전문적으로 맡아 하는 영화의 장르도 분화되어 있었고, 극장들은 변사 모시기에 열을 올릴 만큼 대단한 위치였다. 하지만 영화산업이 발달하면서 그들의 연기나 막간 엔터테인먼트는 삼류 취급을 받기 시작했으며 영화를 즐기는 지식인들로부터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이처럼 변사의 비중은 영화산업의 발달 가운데 변화를 겪었으며 유성영화, 칼라영화, 3D, 4D로 진화하는 가운데 어느덧 우리 기억에서 잊혀졌다.
 
비록 서민들의 문화생활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묘기요, 음악이었겠지만 이들로 인해 거리가 활력에 넘쳤음에는 틀림이 없다. 지나치다 곁다리로 듣는 음악, 그러다가 둘러보는 짝퉁 물건들, 이것이 거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니던가! 변사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마니아인 지식들이 보기엔 이류, 삼류에 해당하지만 자신의 직업적 본분을 다하기 위해 열정적인 막간연기를 펼치고 사랑과 박수를 얻어내는 모습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흥겨움에 대한 욕망을 충분히 충족시킨다. 이들이 아니었더라면 가난하고 무료하고 지친 삶에 위안이 되어줄 것이 또 무엇이 있었을까!


 

<사라진 직업의 역사>는 근대의 문화와 일상을 대표하는 직업들을 통해 시대상과 사람들의 의식, 경제 메커니즘을 통찰하려 했다. 그리고 기대 이상으로 직업들에 관련된 법률, 노동에 대한 관념, 언론으로부터의 시선, 부작용과 돌발적인 에피소드들을 볼 수 있어 더없이 즐거운 시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관련된 영화와 문학, 사료 등을 통해 이야기의 깊이를 더해갔으며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는 기사들을 제시해 마치 그 날의 신문을 읽는 것처럼 과거의 시간에 푹 빠져들었다. 비록 근대의 수많은 직업들 중에서 거대한 경제의 흐름을 다스리는 선망직업도 아니요, 오직 생활고에 시달리는 하층민들의 9가지 직업이었지만 그 직업에 종사했던 이들의 애환과 치열한 삶, 그리고 그들이 비춰내는 일상을 통해 역사책에 등장하지 않는 이면의 세계를 엿볼 수 있어 유익했다. 역사란, 작은 것들을 밀어낼 수 있지만 삶이란, 그 어떤 큰 것이라도 담아내니 말이다!
 
이 책을 통해 사라진 직업들을 살펴보는 것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무척 의미있는 일이다. 요즘처럼 평생직장의 개념이 흔들리고 이전에 없이 비정규직이 증가하는 시점에서, 직업들의 탄생이 빈번해지고 또 죽음과 변화마저 빈번해지는 상황에서, 직업이란 무엇인지, 거대한 사회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며 어떤 영향을 주고 받는지 진지하게 돌이켜보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이후로 나와 직업을 동일시하는 사고방식이 만연했었다. 물론 이것은 성공지향적인 사회풍조 때문에 더 왜곡되어 두드려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내가 직업이 없거나 내 직업이 사라질 경우 내 존재의 의미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것은 한편으론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라진 직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의 삶이 답해줄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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