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가족
공선옥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공선옥의 연작 소설 『유랑가족』은 짠하고 짠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다섯 편의 소설은 '유랑'이라는 주제로 묶인다. 한곳에 정착하지 못한고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녀야 하는 고단한 삶을 그린다. 공선옥은 소설의 유행에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문학 세계를 펼친다. 가난하고 아프고 힘든 사람들의 일상을 가감 없이 표현한다. 작위적이지 않으며 서사를 중심으로 소설을 꾸려 나간다. 소설을 읽는 동안 지나온 순간이 스쳐 지나가면서 자주 한숨을 쉬었다. 『유랑가족』은 나를 과거로 데려간다.

현실에서 그때를 이야기하기란 지난한 일이다. 좋지도 않은 그때를 귀 기울여 들어줄 이를 쉽게 찾기도 힘들뿐더러 이제는 잊고 싶기 때문이다. 『유랑가족』은 누구라도 읽으면 좋을 소설이다. 그때가 힘들었을 이에게는 이제는 괜찮다고 말해준다.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는 한이 찾아간 그곳에는 집을 나간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이들이 있고 두고 온 고향에 가지 못하고 애달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주지 못하는 것은 지독한 가난으로 마음이 헐었기 때문이다. 사는 게 고달파서. 나의 마음조차 다스릴 수 없어서.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떠난 이들은 고향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 손에 뭐라도 쥐고 가야 체면이 서는 것이다. 그럼에도 두고 온 것 때문에 매일매일이 눈물이다. 소설은 연작 형태로 하나의 이야기로 모아진다. 한 편의 이야기는 다음으로 이어지면서 궁금했던 사람의 사연을 들려준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온 명화의 사연을 다룬 「가리봉 연가」를 읽고 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소설이라서 이렇게까지 비극의 결말로 밀고 나간 것인가. 소설이니 일말의 희망이라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공선옥의 소설은 이야기의 힘이 크다. 생생한 입말과 다양한 세대를 대표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 소설을 장악한다. 개발에 밀리고 마을에 댐이 생겨 사는 곳을 떠나야 하는 막막함이 『유랑가족』에 담겨 있다. 가난은 사람을 위축되고 눈치를 보게 만든다. 그럼에도 소설 속 그들은 누구를 탓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를 챙긴다. 아픈 이가 있으면 죽지 않게 보초를 서 가며 안위를 걱정하고 없는 돈에도 아이에게 닭튀김을 시켜 준다. 떠돌이 가족이지만 떠돌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현실에 기반한 연작 소설이라 공감이 간다. 읽다가 더 못 읽을 것 같은 순간이 찾아오기도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혼자가 된 영주의 이야기를 그린 「남쪽 나라 푸른 바다」가 그러했다. 친척을 찾으러 가서 만난 암담한 풍경. 영주의 행복한 내일을 빌었건만 사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다. 아직도 이런 소재로 소설을 쓰는가, 의문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은 좋아진 척을 할 뿐이다. 과거는 단절된 것이 아닌 채 현재와 연결된다. 『유랑가족』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 진행형의 지금을 그리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위화의 대표작 『인생』을 이제야 읽었다. 『허삼관 매혈기』를 처음 읽었고 이후에는 산문집을 주로 읽었다. 책은 작년에 미리 사두었다. 자고로 책은 사두고 잊어버리는 맛이 있다. 성공에 필요한 건 운이라고 밝힌 위화는 어느 날 시골 슈퍼에 갔다가 자신의 책 『인생』이 꽂혀 있는 걸 본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인생』 덕분에 위화의 인생은 다르게 펼쳐진다. 『인생』은 위화가 세계적인 작가로 도약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책을 읽고 영화도 봤는데 영화는 원작과는 다른 결말로 끝난다. 소설 안에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 부분을 걸러 내었다. 관객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 배려 같기도 하다.

촌에서 민요를 수집하는 '나'는 소를 데리고 밭을 가는 노인 '푸구이'를 만난다. 그가 소를 부르는 여러 이름에 호기심을 느껴 대화를 시작한다. 『인생』은 대지주의 아들 푸구이의 인생 전체를 들려준다. 푸구이 자신이 직접 말해주는 그의 인생을 따라가다 보면 눈물과 한숨, 어쩔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까지 우리를 다양한 감정의 바다로 데리고 간다. 도박에 빠져 집안의 가산을 날린 푸구이는 직접 농사를 짓고 일을 하는 노동자로 살아간다. 체념과 좌절, 절망에 빠질 만도 한데 그의 곁에는 착한 사람들이 있어 묵묵히 운명을 받아들인다.

서문에서 위화가 밝혔듯이 『인생』은 개인과 운명의 대결을 그린 작품이다. 중국의 현대사를 끄집어 내지 않아도 인간 푸구이의 인생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역사가 아닌 한 인간의 일대기를 이해하는 데는 우리가 가진 공감 능력만 있으면 충분하다. 푸구이의 역경, 고난, 고독을 들어주는 한가로운 시간을 가지고 있으면 된다. 집과 땅을 잃은 푸구이는 겨우 땅을 얻어 농사를 짓는다. 아픈 어머니를 위해 의원을 데리고 갔다가 엉겁결에 전쟁에 휩쓸린다. 그곳에서도 푸구이는 살아남는다.

가족과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최고임을 깨닫는다. 가난 때문에 그의 딸 펑샤를 남의 집에 보내고 눈물을 흘리고 아들이 공부를 잘 하기를 바라는 보통의 아빠로 살아간다. 딸이 울면서 집에 남기를 원하자 그는 다시 집으로 데리고 온다. 아들 유칭이 현장 부인의 수혈을 위해 어이없이 죽었을 때에는 내가 다 눈물이 나려고 했다. 한 인간의 삶에 드리운 비극에는 그처럼 어이없는 상황이 존재하는 것이다. 항시 현재의 삶에는 과거에 했던 일의 후회가 따른다. 푸구이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곳에 가지 않았더라면의 후회.

여러 이름을 가진 늙은 소만이 푸구이의 현재에 남아 있다. 『인생』은 우리의 삶이란 누군가를 만나고 떠나보내는 것의 반복이라고 말하는 소설이다. '닭들이 자라면 거위가 되고, 거위는 자라서 양이 되고, 양은 또 소가 된단다. 우리는 그렇게 점점 부자가 되는 거지.' 푸구이는 그의 손자 쿠건에게 이렇게 말한다. 성장을 지켜보고 그 곁에 함께 있어주는 것. 사랑하는 이들이 떠나고 남은 자리에 추억과 회한이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살아주는 것. 소설 『인생』의 결말은 마음이 아픈 것이었다.

왜 동화의 결말이 해피 엔딩으로만 끝나는 것인지 이해가 될 정도였다. 어린이들이 삶에 희망과 긍정을 가질 수 있는 배려인 것이다. 어차피 자라면서 알게 될 것이니까. 삶에는 마냥 좋은 행복만이 있는 것이 아님을. 영화 『인생』의 마지막은 새로운 푸구이 세대를 지켜볼 수 있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소설 『인생』은……. 『인생』을 읽으며 떠나간 사람들을 추억해 보았다. 역경을 헤쳐왔다고는 말 못 하겠다. 어려움이 있었다면 피하지 않으려 했었다는 정도이다. 숲속의 바람을 느끼고 새소리를 들으며 해가 지는 풍경을 좋아하는 인생이면 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
장강명 외 지음 / 황금가지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곽재식의 『지상 최대의 내기』를 읽은 김에 『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를 펼쳤다. 무슨 연관이 있냐 하면 SF 소설이라는 관련. SF 소설의 분위기가 어떤지 감을 조금 잡았기 때문에 전에 사두고 읽지 않은 히어로가 나오는 판타스틱 한 이야기를 읽을 용기가 생겼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방식을 좋아한다. 한 작가가 맘에 들면 전작을 구해서 읽거나 추천 책을 읽는다는 방식. 결정적으로 『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를 읽은 이유는 곽재식의 단편이 들어 있어서. 훗.

첫 번째 소설인 장강명의 「알골」은 잘 쓰인 소설이다. 깜짝이야. 자신의 능력을 숨기고 살다가 적절한 순간에 짜잔 하고 드러내는 방식의 구성이다. 찾아보니 장강명은 SF 소설도 쓰는 그 세계에서 나름대로 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최근에 SF 소설집도 출간했다. 곧 읽어 보겠다. 표제작이기도 한 「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는 어느 날 능력을 가진 이들이 위험에 닥친 사람들의 콜을 받고 행동 개시를 하는 히어로가 등장한다. 앱의 별점 평가에 신경 쓰는 히어로들이라니 발상이 재미있다.

공간 이동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하는 「저격수와 감적수의 관계」의 세계관도 흥미롭다. 『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에 나오는 몇 편의 소설은 비슷한 주제로 전에 출간한 『이웃집 슈퍼 히어로』의 이야기와 연결된다. 곧 이 책도 읽어 보겠다. 구병모는 SF도 잘 쓰는구나를 느끼게 해준 「웨이큰」. 말이 필요 없는 소설이다. 곽재식의 「영웅도전」은 신라 시대를 배경으로 위정자들의 정치 현실을 풍자한다. 듀나의 「캘리번」은 적사병이 출몰한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동감 있게 표현한다.

술만 먹으면 힘이 세지는 여자친구를 둔 남자의 이야기 「주폭천사괄라전」은 읽는 재미가 있다. 독특한 문체를 가지고 있다, dcdc는. 김보영의 「로그스 갤러리, 종로」는 나중에 영화화될 것 같다. 장면 하나하나가 생생하다. 특히 서리와 번개의 대결 장면에서는 통쾌함까지 느껴진다. 요드에 활약에 박수를 보낸다. 여덟 편의 소설은 우리에게 영웅이 필요할까라는 의문으로 쓰였다. 초능력을 가진 이들이 위급 상황에 시민을 도와주는 설정과 능력을 가진 그들이 힘을 잘못 발휘하는 상황 설정은 소설로써 답을 하기 위함이다.

한 번 생각해 보았다. 나에게 초능력이 주어진다면 어떤 것이 좋을까. 힘이 세지거나 암기를 잘하거나 미래를 예지하거나 순간 이동을 하는 것? 자동차에 깔린 아이를 위해 시민들이 힘을 모아 차를 들어 올려 아이를 구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들은 능력을 숨긴 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일까. 구해줘요, 슈퍼맨. 아이가 외치자 세탁소에 맡겨 놓은 히어로 유니폼을 급하게 찾아 입고 날아온 것일까.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지는 아이를 받아 내고 온라인으로 주문한 생수 무더기를 우리 집 앞에 놓아주는 히어로.

그들은 능력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제대로 발휘해서 세계를 지켜내고 버티고 있다. 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다. 24시간 불을 밝히고 있는 편의점에서 혹은 뜨거운 공깃밥 그릇을 척척 상 위에 올려주면서 살아가고 있다. 내가 가지고 싶은 능력이란 하루하루를 소중히 생각하며 보낼 수 있는 마음이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바람을 느끼고 구름의 느린 이동을 보는 것. 서로에게 영웅이 되어 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도 빛 보다 빠른 오토바이를 타고 밤을 가르며 우리의 주린 배를 달래주러 오는 순간 이동 능력자 님들에게 감사 인사를 보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상 최대의 내기
곽재식 지음 / 아작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곽재식의 소설집 『지상 최대의 내기』를 읽으며 아, 재미있다, 계속 읽고 싶다를 연발했다. 읽고 싶은 책을 오랜만에 읽어서일까. 심심한 유머가 섞인 소설은 시간을 잊게 했다. 매달 한 편씩 소설을 쓰는 곽재식에게 소설집의 제목을 살짝 비틀어 '지상 최대의 이야기꾼'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고 싶다. 『지상 최대의 내기』에 실린 열한 편의 이야기는 요약서 결론 쓰기, 사랑에 빠진 남자, 로봇 사기의 어려움, 소행성 충돌 가능성의 재고, SF 소설을 읽는 직업, 불시착한 우주선에서 내려온 황제 폐하의 우는 아이 달래기, 노인 인구의 절감을 위한 대책 없는 제안서, 인류의 미래를 로봇에게 내맡기기, 공포 프로그램의 도시 괴담, 출산 인구 급증을 위해 멧돼지의 몸 빌리기, 지구 종말 안내 서비스의 재미난 소재를 다룬다.

어떤가. 읽고 싶지 않은가. 황당하고 무계한 사건도 곽재식의 손에 들어가면 이해가 가면서 납득이 된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정신을 잃고 소설을 읽고 있는 당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전자책으로 나오길 기다렸다가 나오자마자 잽싸게 읽었다. 한 편 한 편이 우습고 진지하다. 사실 그러기가 쉽지 않은데 말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재미난 이야기를 꼽으라면…. 전부라고 말하겠다. 어떤 이야기는 신나고 즐겁다가도 슬프다. 애처롭고 짠해서 등장인물을 끌어안아주고 싶다. SF 소설은 진입 장벽이 높은 편이다, 나에게 있어서.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행성이 어떻고 달과 화성, 인공지능과 로봇, 대체 기술, 공간 이동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 거부감이 들었다. 곽재식은 이러한 소재를 무리 없이 끌어와 이곳의 이야기를 한다. 고아 소년이 <수사반장>이라는 무료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로봇을 사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로봇 살 돈 모으기」는 미래의 일이 아닌 지금의 일을 그린다. 소행성 충돌 시점과 제거 방법을 놓고 촌각을 다투어야 할 시기에 체육대회 행사에 참여하느냐 마느냐로 김 박사를 괴롭히는 「체육대회 묵시록」도 가까운 회사에서 일어나고 있을 것만 같다.

SF 소설만을 읽는 직장이 있다! 그 직장의 존속을 위해 산업 스파이를 등장시키고 경쟁 업체와 짜고 경쟁을 하는 「다람쥐전자 SF팀의 대리와 팀장」은 작가의 말에서 밝히듯 실제 있는 일이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다. 현실은 알 수 없는 일로 가득하고 곽재식은 오늘도 그러한 일을 모아 한 달에 한 편씩(소설 기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야 말 정도로) 소설로 쓴다. 무서운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납량특집 프로그램의 공포」의 마지막 3음절은 기어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야 만다. 무섭다.

시작하자마자 이야기로 바로 직진하는 소설을 좋아한다. 곽재식의 소설이 그렇다. 풋풋한 연애 이야기도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무서운 이야기도 거대한 농담 같은 이야기도 능수능란하게 쓴다. 올여름 무더위를 잊게 해줄 단 한 권의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지상 최대의 내기』를 고르겠다. 인류의 미래를 지능화된 컴퓨터에게 맡기는 멍청한 인간이 나오는 소설이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행복한 결말이 있고 보듬어 주고 싶은 외계인과 지구인이 나오는 소설 『지상 최대의 내기』를 선물한다.

그나저나 한 달에 한 편이라니. 굉장하네요. 소설 끝에 보면 소설을 쓴 시간과 공간이 나오던데 고속버스터미널이라는 곳이 흥미로웠습니다. 그곳에서 소설을 완성하는 걸까요. 시작하는 걸까요. 아니면 소설을 구상하는 걸까요. 어찌 됐든 이 소설집의 제목은 『지상 최대의 내기』가 되었습니다. 시간 여행에 관한 소설을 쓰신다면 기꺼이 재미있게 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지금 충청북도 충주에 있는 도넛 가게로 가서 소설이 재미있다는 것과 제목이 훌륭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듣고 계시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상의 마지막 오랑캐
이영산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 전 한국 사람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성격이 급해서 뭐든지 뚝딱뚝딱. 건물도 빨리 지어 버리고 느린 인터넷 속도로 참을 수 없어 광랜으로 깔아 버리고. 좁은 땅덩어리임에도 인재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도 많다고. 간혹 이상한 사람도 있지만 대체로 성정이 순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다혈질이면서 은근히 정이 있는. 머리가 좋아서 세계 무슨 타이틀이 붙은 시합이나 올림피아드 대회에 나가서 우승해 버리는. 세계 어디를 가도 완벽 적응해 버려서 현지인 보다 더 현지인 같은 능란한 처세술을 가지고 있어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이야기의 끝을 맺었다.

여기 이곳이 그런대로 살만하다고 의료 보험도 잘 돼 있고 기후도 온화하고 치안도 좋은. 간혹 참혹한 사건이 생겨 이 나라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가방을 싸서 국경을 가뿐히 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한 여기 이곳. 친절한 이도 얼굴에 불만이 가득한 이도 여러 성격과 내력을 가진 사람이 모여 사는 여기가 아직은 좋다. 떠날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부러운 건 있다. 외국을 드나들며 한국 사람이 아닌 다른 국가의 사람과 친구를 사귀는 일이다. 언어와 인종이 달라도 만난 지 몇 시간 만에 친구가 되는 일. 살아온 환경이 달라 생각도 습관도 다른 이와 만나는 문명이 충돌하는 변화의 순간을 맞는 일.

이영산의 『지상의 마지막 오랑캐』는 한 사람을 만나 웃고 떠들고 슬퍼한 흔적이 기록이 담긴 책이다. 몽골에서 만난오리앙카이의 즉, '칭기즈칸의 정복전쟁 시대부터 청나라와의 독립전쟁까지 활약한 몽골 기마병 중에서도 가장 용맹했던 부족의 후예'라고 자신을 소개한 두게르잡 비지아의 만남을 다루고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야만인이라고 몽땅 칭해서 불러버리는 종족인 오랑캐, 진짜 오랑캐족을 만난 것이다. 비지아는 자신을 '지상의 마지막 오랑캐'라고 스스럼없이 부른다.

여행은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만든다. 기존에 알고 있던 상식을 파괴하고 더 넓은 시야를 간직한 사람으로 말이다. 비지아를 만나 오랑캐라는 말의 진짜 의미를 알면서 여행은 시작된다. 『지상의 마지막 오랑캐』는 결국 친구가 된 비지아의 일대기를 그린다. 같은 해에 태어났지만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사람은 가이드와 여행자로 만나 서로의 생을 들려주는 사이가 된다. 여행이 아니라면 가능하지 않을 이야기다.

진짜 오랑캐 진짜 유목민 비지아는 어렸을 때부터 양을 치고 말을 훈련하고 타르박이라고 하는 야생 쥐를 사냥하며 자란다. 할머니의 긴 옛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하고 한 권뿐인 책을 읽는 것을 즐긴다. '사내의 행복은 초원에 있다'라는 명언을 입에 달고 살면서 초원에 살아간 시절을 회상한다. 『지상의 마지막 오랑캐』는 비지아의 한 세계를 충실히 기록한다. 어린 시절과 학교를 다니면서 겪은 이야기는 결코 끝나지 않을 오리앙카이족의 '토올'이 된다.

한 번 시작하면 열흘이고 계속되는 노래로 부르는 서사시 토올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무한한 시간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자라면 그 자리에서 끝없이 듣고 싶은 마력을 지녔다. 비지아의 이야기가 그렇다. 다른 세계의 하나의 이야기. 조드(자연재해)를 피해 동물을 챙기고 가족을 데리고 이동하는 유목민의 진짜 서사를 어디에서 들을 수 있단 말인가. 익숙한 것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나 같은 한심한 자는 이렇게 『지상의 마지막 오랑캐』를 읽으며 역사가 뒤집히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손님을 우선시하고 여행자라도 지나가는 눈치가 보이면 먼 곳에서도 그 좋은 시력으로 발견하고 말을 타고 와 인사를 건네는 인류. 죽은 이의 장례에 어린아이들은 오지 못하게 하고 풍장으로 죽음을 가볍게 보내는 우리가 쓰는 언어와 한 뿌리를 나눠 가진 형제.

알타이산이 가지는 또 다른 의미는 사라짐이다. 고향을 바람 속에 묻어둔다는 것이다. 살아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고향이다 유목민들은 조상의 묘를 찾아, 부모의 고향을 찾아 천 리 길을 떠나지 않는다. 그들에게 과거는 지나간 시간에 불과하다. 과거는 흘러갔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초지를 찾고, 새로운 방목을 시작해야 한다. 삶도 죽음도 전쟁의 승리도 실패도 모두 그렇다.
(이영산, 『지상의 마지막 오랑캐』中에서)

삶의 허무도 불안도 죽음마저도 두고 다녀야 한다. 비지아를 통해 배운 삶의 잠언은 이렇다. 많은 것을 잃어버릴 것! 오랑캐 말에는 '묻다, 장례하다'라는 표현 대신 '잃어버리다'라는 말이 있다. 죽음도 잃어버리고 살아야 그들은 한평생을 척박한 기후와 결코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한국에서 살아가야 하기에 한국 사람의 좋은 점을 늘어놓았지만 이는 무의미한 일이기도 하다. 어디 국적의 사람이 아닌 그저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한 여행은 지금부터 시작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