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마지막 오랑캐
이영산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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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국 사람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성격이 급해서 뭐든지 뚝딱뚝딱. 건물도 빨리 지어 버리고 느린 인터넷 속도로 참을 수 없어 광랜으로 깔아 버리고. 좁은 땅덩어리임에도 인재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도 많다고. 간혹 이상한 사람도 있지만 대체로 성정이 순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다혈질이면서 은근히 정이 있는. 머리가 좋아서 세계 무슨 타이틀이 붙은 시합이나 올림피아드 대회에 나가서 우승해 버리는. 세계 어디를 가도 완벽 적응해 버려서 현지인 보다 더 현지인 같은 능란한 처세술을 가지고 있어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이야기의 끝을 맺었다.

여기 이곳이 그런대로 살만하다고 의료 보험도 잘 돼 있고 기후도 온화하고 치안도 좋은. 간혹 참혹한 사건이 생겨 이 나라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가방을 싸서 국경을 가뿐히 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한 여기 이곳. 친절한 이도 얼굴에 불만이 가득한 이도 여러 성격과 내력을 가진 사람이 모여 사는 여기가 아직은 좋다. 떠날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부러운 건 있다. 외국을 드나들며 한국 사람이 아닌 다른 국가의 사람과 친구를 사귀는 일이다. 언어와 인종이 달라도 만난 지 몇 시간 만에 친구가 되는 일. 살아온 환경이 달라 생각도 습관도 다른 이와 만나는 문명이 충돌하는 변화의 순간을 맞는 일.

이영산의 『지상의 마지막 오랑캐』는 한 사람을 만나 웃고 떠들고 슬퍼한 흔적이 기록이 담긴 책이다. 몽골에서 만난오리앙카이의 즉, '칭기즈칸의 정복전쟁 시대부터 청나라와의 독립전쟁까지 활약한 몽골 기마병 중에서도 가장 용맹했던 부족의 후예'라고 자신을 소개한 두게르잡 비지아의 만남을 다루고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야만인이라고 몽땅 칭해서 불러버리는 종족인 오랑캐, 진짜 오랑캐족을 만난 것이다. 비지아는 자신을 '지상의 마지막 오랑캐'라고 스스럼없이 부른다.

여행은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만든다. 기존에 알고 있던 상식을 파괴하고 더 넓은 시야를 간직한 사람으로 말이다. 비지아를 만나 오랑캐라는 말의 진짜 의미를 알면서 여행은 시작된다. 『지상의 마지막 오랑캐』는 결국 친구가 된 비지아의 일대기를 그린다. 같은 해에 태어났지만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사람은 가이드와 여행자로 만나 서로의 생을 들려주는 사이가 된다. 여행이 아니라면 가능하지 않을 이야기다.

진짜 오랑캐 진짜 유목민 비지아는 어렸을 때부터 양을 치고 말을 훈련하고 타르박이라고 하는 야생 쥐를 사냥하며 자란다. 할머니의 긴 옛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하고 한 권뿐인 책을 읽는 것을 즐긴다. '사내의 행복은 초원에 있다'라는 명언을 입에 달고 살면서 초원에 살아간 시절을 회상한다. 『지상의 마지막 오랑캐』는 비지아의 한 세계를 충실히 기록한다. 어린 시절과 학교를 다니면서 겪은 이야기는 결코 끝나지 않을 오리앙카이족의 '토올'이 된다.

한 번 시작하면 열흘이고 계속되는 노래로 부르는 서사시 토올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무한한 시간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자라면 그 자리에서 끝없이 듣고 싶은 마력을 지녔다. 비지아의 이야기가 그렇다. 다른 세계의 하나의 이야기. 조드(자연재해)를 피해 동물을 챙기고 가족을 데리고 이동하는 유목민의 진짜 서사를 어디에서 들을 수 있단 말인가. 익숙한 것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나 같은 한심한 자는 이렇게 『지상의 마지막 오랑캐』를 읽으며 역사가 뒤집히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손님을 우선시하고 여행자라도 지나가는 눈치가 보이면 먼 곳에서도 그 좋은 시력으로 발견하고 말을 타고 와 인사를 건네는 인류. 죽은 이의 장례에 어린아이들은 오지 못하게 하고 풍장으로 죽음을 가볍게 보내는 우리가 쓰는 언어와 한 뿌리를 나눠 가진 형제.

알타이산이 가지는 또 다른 의미는 사라짐이다. 고향을 바람 속에 묻어둔다는 것이다. 살아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고향이다 유목민들은 조상의 묘를 찾아, 부모의 고향을 찾아 천 리 길을 떠나지 않는다. 그들에게 과거는 지나간 시간에 불과하다. 과거는 흘러갔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초지를 찾고, 새로운 방목을 시작해야 한다. 삶도 죽음도 전쟁의 승리도 실패도 모두 그렇다.
(이영산, 『지상의 마지막 오랑캐』中에서)

삶의 허무도 불안도 죽음마저도 두고 다녀야 한다. 비지아를 통해 배운 삶의 잠언은 이렇다. 많은 것을 잃어버릴 것! 오랑캐 말에는 '묻다, 장례하다'라는 표현 대신 '잃어버리다'라는 말이 있다. 죽음도 잃어버리고 살아야 그들은 한평생을 척박한 기후와 결코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한국에서 살아가야 하기에 한국 사람의 좋은 점을 늘어놓았지만 이는 무의미한 일이기도 하다. 어디 국적의 사람이 아닌 그저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한 여행은 지금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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