꽈배기의 멋 꽈배기 시리즈
최민석 지음 / 북스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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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최민석은 매주 한 편씩 에세이를 쓴단다. 그 결과물이 『꽈배기의 멋』으로 묶여 나왔다. 청탁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글쓰기 근육을 키우기 위해 별일 아닌 일에도 아주 작은 의미를 부여해서 한 편의 글로 쓴다. 실로 대단한 일이다. 형식은 에세이라는 것만 유지하고 일상의 사소한 이야깃거리를 끌어모은다. 책상에 앉아 글을 쓴다. 이거 이거,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다, 얼마나 힘든지. 글이라는 게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도 막상 쓰려고 하면 단어 하나 내 마음대로 나오지 않아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된다.

『꽈배기의 멋』을 읽으면 이런 시시한 일을 지나치지 않고 글로 남긴다는 점에서 엄지 척을 하게 된다. 한 편 한 편 분량은 짧지만 그 안에는 인생에 대한 해학과 슬픔, 고뇌, 망상까지도 온갖 감정들이 떠다닌다. 책이 나오고 출판사의 제의에 마지못해 사인회를 하는 풍경에서 기욤 뮈소라는 작가를 알게 되고 한밤중 홈쇼핑을 보다가 충동구매를 하는 이야기까지 작가의 다양한 일상의 풍경이 들어 있다.

민방위를 갔는데 동장이 나와 7분 정도 망원동의 발전과 미래라는 주제로 연설을 하고 해산을 하는 일. 자연이 나오면 무조건 10분 안에 잠이 드는 영화관에서의 법칙. 의태어가 없는 이탈리아어를 배우기 위해 언어교육원에 다니고 평소에는 책을 잘 못 읽지만 여행을 가서는 집중력 있게 책을 읽는 모습. 에세이를 쓰기 위해 소설가가 되었다는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꽈배기의 멋』을 읽으면 나도 에세이를 잘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지극히 기회주의적이고 이해타산적인 생각으로 읽었지만.

본격적인 에세이 쓰는 작법을 기대, 까지는 아니고. 어떤 일상의 풍경을 글로 담아낼까 엿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아랫집 소음에 대항해 전동 드릴을 산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걸 활용하지 못하는 모습에서는 웃음이 나왔다. 일단 쓰는 것으로 쓴다. 명색이 소설가인데 청탁 없이 글을 쓴다는 사실을 버젓이 실어 놓는다. 글을 쓰기 위해서 작가가 된 거지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쓴 건 아니니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꿋꿋이 가는 담대함에 박수를 보낸다.

빵도 아니고 튀김도 아닌 꽈배기. 너의 정체성은 무어냐라고 물으면 꽈배기는 안 그래도 비틀린 몸을 더욱 꼬아댈 것만 같다. 그런 건 모르겠고 일단 저는 맛있습니다. 문학을 무엇이라고 정의 내리는 것부터가 꼰대 마인드가 아닐까. 소설을 쓰든 에세이를 쓰든 글을 쓰면 되는 일 아닌 거냐고 『꽈배기의 멋』은 말한다. 감기 걸려서 헤롱헤롱한 상태로 읽어도 쉽게 이해가 가는 『꽈배기의 멋』. 당신이 즐거워지기 위해 쓴 글은 돌고 돌아 나에게로 다가와 위안을 주었다. 아무도 읽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최초의 독자는 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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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탐정 고민 상담소 1 - 자아는 가출 중 문학동네 청소년 44
이선주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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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이 생겼다. 얼굴에 여드름이 나기 시작했다. 이 무슨. 사춘기도 아니고. 질풍노도의 시기도 아닌데. 입가 주변에 두두두 붉은 여드름이 하나둘씩 올라오고 있다. 못생긴 얼굴이 더 못생겨졌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10년 주기로 여드름이 나는 것 같다. 중학교 때는 얼굴 전체에 여드름이 나서 앞머리와 옆머리로 가리고 다녔는데. 어른이 되었을 때는 보는 사람의 눈도 생각해서 병원에 다니면서 약도 먹고 약도 바르며 겨우 여드름을 가라앉혔다. 그때로부터 다시 여드름이 나는 지금은 아, 아무것도 하기 싫다.

맹탐정 님. 이런 저의 고민을 해결해 주세요. 이선주의 『맹탐정 고민 상담소』에는 자신을 스스로 탐정이라고 칭하는 중학교 1학년 아이가 나온다. 이름은 맹승지. 성이 맹 씨라서 아쉬워하는. 엄마가 명 씨 성을 만나 결혼했더라면 맹탐정이 아닌 명탐정이 됐을 텐데 하며 속상해한다. 작은 마을 산이군에 살면서 동네에 떠도는 온갖 소문을 수집하고 의뢰받은 일은 끝까지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엄마 피셜에 의하면 "머리는 나쁜데 얼마나 부지런히 움직이는지, 어떨 때 보면 귀여워요."라는 소리를 듣는 아이.

셜록을 좋아하고 탐정 노트에 의뢰받은 일을 적으면서 사건을 꼼꼼히 들여다본다. 엄마가 전통찻집을 운영하는 덕분에 그곳에 의뢰인과 모여서 추리를 한다. 똑똑하고 야무진 아이 윤미의 핸드폰 분실 사건의 의뢰를 받는 것으로 맹탐정의 추리가 시작된다.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사건의 진실보다는 윤미가 가진 고민의 크기를 나누어 받는 것으로 사건이 해결된다. 윤미의 사건 이후로 맹탐정의 이미지는 사건 해결보다는 고민 상담 쪽으로 굳어져 또래 친구들의 고민을 들어 주게 된다.

『맹탐정 고민 상담소』에는 맹탐정의 고민인 진정한 '자아 찾기'라는 큰 주제 아래로 각각의 이야기가 모인다. 큰 도시로 공부하러 가고 싶은데 엄마가 허락해 주지 않는 영은 언니의 고민, 부모의 이혼으로 나라는 아이의 진짜는 무엇일까 고민하는 인혜, 나이 마흔이 넘어 방황하는 맹탐정의 아빠, 남자인데 남자 아이돌을 좋아하는 용우. 맹탐정은 친구들과 때론 혼자서 그들의 고민을 생각하며 고민의 방향을 해결 쪽으로 이끌어 주려고 한다. 맹탐정이 특유의 오지랖과 부지런함으로 고민의 실체를 알아내어 알려주면 고민 당사자들이 알아서 문제를 풀어간다.

자아라는 것은 하나의 모습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맹탐정이 깨달은 대로 바닷물의 빛깔과 같아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자아의 모습은 달라진다. 진짜 나도 없고 가짜 나도 없다. 좋아하는 게 있으면 실컷 좋아하고 싫어하는 게 생겼으면 마음껏 싫어하면서 달라지는 자신의 자아를 바라보면 된다. 『맹탐정 고민 상담소』를 읽으며 맹탐정과 친구들의 고민이 그게 무슨 고민거리가 되냐라고 생각한다면 슬프다.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고민의 질이 그때보다 낮거나 수준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고민은 고민이다.

다른 이의 고민과 슬픔을 제 일처럼 들어주는 게 쉽지 않다. 대부분 별것 아닌 일로 치부하거나 내 고민이 더 심각하다고 오히려 고민 상담을 하려 들기 때문이다. 여드름이 계속해서 나는 게 고민이에요. 나의 고민은 이렇게 해결해보려고 한다. 원래 고민 해결은 자신 안에 답이 있기 마련이니까. 이 또한 지나가리라. 얼굴에 흉터를 남기겠지만. 어차피 못생기고 똑같은 얼굴. 얼굴 말고 내 마음을 뽀득뽀득 닦으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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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의 반딧불이 (양장) 마음산책 짧은 소설
손보미 지음, 이보라 그림 / 마음산책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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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을 놓칠 때가 있다. 하루는 순식간에 흘러가고 그 안에서 필요한 생각을 해야 한다. 적절한 말을 건네야 하고 실수하지 않아야 한다. 피곤하지 않게 살고 싶은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 때문에 또 피곤해지는 연속의 반복. 느슨하고 여유 있는 삶을 살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란 소설을 읽는 것. 만들어진 이야기 안에서 나는 자유를 느낀다. 거짓말이고 꾸민 진실이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하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진다.

시간이 없을 때는 짧은 소설을 읽으며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지고 허물어지는 과정을 즐긴다. 손보미의 짧은 소설집 『맨해튼의 반딧불이』에는 사라짐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도 위화감이 없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분실물을 찾아주는 색다른 일을 하는 직업 탐정이 등장하고 물건을 훔치는 남자가 나오고 불행을 수집하는 이들을 기다리는 여자가 출연하는 허구의 세계. 작가의 말에서 손보미는 뉴욕 센트럴 파크에 앉아 반딧불이를 봤던 당시를 회상한다. 소설을 쓰게 되는 건 반짝였다 이내 사라지는 찰나의 어느 시간을 담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어긋나고 핀트가 맞지 않는 일상을 손보미는 소설로 끌어온다. 한껏 차려 입고 외출했는데 구두의 장식이 사라지는 사건으로 상대에게 모진 소리를 듣기도 하는 어느 하루. 죽음이 다가온 순간에 사연을 간직한 채 누군가를 찾아가는 저녁. 부모의 부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유년의 기억. 『맨해튼의 반딧불이』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이런 것이었다. 사라진 7시를 찾아 달라는 부탁에 탐정은 그에게 들려줄 말을 생각한다. '이봐요, 때로는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것으로 놔둬야 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잃어버린 것은 그저 잃어버린 것으로. 마음이 아프면 아픈 대로……슬프면 슬픈 대로……'

하루의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다. 놓치기도 하고 잃어버리기도 해야 미치지 않고 살 수 있다. 실수했다고 내내 침울해져 있을 것이 아니라 망각이라는 이불 속으로 덮어두는 것도 나름의 방법이다. 『맨해튼의 반딧불이』를 관통하는 핵심은 상실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 선택에 의한 주체적인 상실을 이야기한다. 내일을 위해서 오늘의 부끄러움을 잊어버리는 것. 사랑을 위해서 죽음을 잃어버리는 것. 그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삶은 끝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늘에 치이지 않기 위해 매일 적정량의 소설을 읽어내는 것. 나의 오늘에 없는 반짝이는 무언가를 찾고 싶다면 『맨해튼의 반딧불이』를 읽어봐도 좋을 일이다.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삶이 간절해지고.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아무것도 알 수 없어 내내 암담한 시간. 순식간에 열렸다가 닫히는 짧은 소설 속 세계 안에는 나 말고도 방황하는 누군가가 있어서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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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 아닌 사랑과 자유
김하나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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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도 고양이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내게 무서운 존재이다. 어렸을 때 동네에 돌아다니는 사나운 개한테 물렸다. 문을 열어 놓으면 어느새 고양이들이 몰려와 안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무섭고 두렵고 쫓아 버려야 할 것. 개만 보이면 길을 돌아갔다. 화장실 가려고 나온 밤에는 고양이의 빛나는 눈을 봐야 했다. 그런 기억 때문에 나는 동물을 애호할 수 없다.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들이 살아가고 있구나.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이고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반려동물로서 사랑을 받는 존재이구나. 그런데 나는 책임감이라는 것 때문에 함께 할 수 없구나 하는 정도.

『다름 아닌 사랑과 자유』에는 동물권행동 카라에서 동물과 일대일 결연 방식으로 인연을 맺은 작가들의 글이 실려 있다. 9명의 작가들은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버려진 동물에게 매달 정기 후원이라는 방법으로 사랑을 실천한다. 그들은 모두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워 봤거나 지금도 함께 살아가고 있다. 나는 하지 못하는 동물과 함께 하는 생활을 들여다봄으로써 사랑과 자유는 어떻게 행해져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읽으면서 다시 한번 다짐한다. 나는 동물을 키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귀엽다는 이유로 내 외로움을 달래려는 목적으로 함께하면 안 된다는 것을. 그들은 동물이기 이전에 하나의 생명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섣부른 호기심과 과시욕의 산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9명의 작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동물과 함께 하는 일상을 보여준다. 사람이 아닌 동물에 마음을 줄 수 있냐는 질문을 받고서 어쩔 줄을 몰라 했던 기억으로부터 당연하게 그래도 되는 것처럼 모르는 이에게 말을 걸며 혐오를 숨기지 않는 일까지.

돌봐주는 개념이 아닌 그들과 가족이 되어 끝까지 살 수 없으면 '기르지 말자'라고 간곡한 부탁도 한다. 사람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한결같은 사랑을 동물은 보여주었다. 말하지 못하는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싶어 하는 9명의 작가들. 지금도 반려견, 반려묘와 살고 있어 인간에게 버림받은 그들을 데려오지 못하는 걸 아쉬워한다. 식용 문화 때문에 사육장에서 참담하게 살아가는 개.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지 마시오'라는 글이 붙어 있는 공간에서 살아가는 고양이.

9명의 작가들의 목소리는 이렇다. 동물과 인간은 다르지 않다고. 종을 구별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사랑의 형태는 다양한 것이어서 구분 지을 수 없다고. 동물이 살 수 없는 세상에서 인간 역시 살아갈 수 없다. 눈을 돌리지 않고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 『다름 아닌 사랑과 자유』를 읽은 이유는 이렇다. 사랑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싶어서였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처음과 끝을 약속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했다. 좋아하지 않아도 된다. 혐오와 불편을 드러내지 않고 지켜봐 주는 것.

그저 나의 주변에 온기를 가진 생명이 살아가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마음이면 되지 않을까. 밤이 되면 쓰레기장에 모여드는 고양이들. 목줄이 있는데 돌아다니는 개들. 먼저 다가갈 수 없는 한심한 인간인 나는 매번 멀리서 쳐다보기만 한다. 불쌍하다고 무턱대고 데리고 와서 키울 수는 없다. 일대일 결연이라는 방식으로 그들의 오늘과 내일을 응원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다름 아닌 사랑과 자유』는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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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오늘이 참 놀라워서 - 황선미 첫 번째 에세이
황선미 지음 / 예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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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마당을 나온 암탉』을 읽고 울었다고 말했다. 국어 시간에 함께 읽은 책이었다. 잎싹이가 죽어서 슬퍼. 그게 울 일인가. 참 울 일도 많다가 그 당시에 내 감정. 나로서는 현실의 고민과 걱정이 많아 현실이 아닌 이야기에 마음을 주기가 힘들었다. 좀 더 자라서 읽은 『마당을 나온 암탉』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동화인데. 주인공을 그렇게 죽일 필요가 있었을까. 작가는 동화라는 낭만에 기대지 않은 꽤나 현실적인 사람이구나라는 깨달음.

『마당을 나온 암탉』을 쓴 황선미의 『틈새 보이스』에서도 나는 현실에 기반한 팍팍한 삶의 언저리를 주변부를 응시하는 작가의 예민한 감성을 읽을 수 있었다. 산문집 『가끔, 오늘이 참 놀라워서』를 읽으며 왜 낭만이 아닌 처절한 슬픔으로 현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지를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이 읽는 동화에서 주인공을 과감하게 하늘나라로 보내버리는 결단성이란 어린 시절부터 겪은 결핍과 사랑의 부재 때문이었던 것이다. 형제 많은 집에 맏이로 태어나 폐병을 앓았고 집이 가난해 바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그때 읽었던 책들은 그가 파괴와 부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허구의 세계에서나마 사랑과 환상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김찬삼의 여행기를 읽으며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로의 탈출을 잠시나마 꿈꾸어 볼 수 있었다. 도시락을 싸지 못했던 어느 날 아버지가 그의 배구 경기를 보러 와주었던 일. 찹쌀떡과 바나나 우유를 건네주던 뭉특한 손을 기억하기에 작가가 되는 소망을 간직할 수 있었다. 무협지를 읽고 친구 집에 있던 세계문학전집을 동경하는 일. 책이란 한 아이에게 미래란 가능한 것임을 알게 해주는 꿈의 통로였다.

『가끔, 오늘이 참 놀라워서』에는 100만 부 작가라고 알려진 황선미의 내밀한 일상의 숨결이 담겨 있다. 남들 눈에나 『마당을 나온 암탉』이 공전의 히트작이 되어 영화로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알려진 유명 작가이지 일상을 살아가는 그는 조조 영화를 보고 김장을 하고 시골에 마련한 집에서 복숭아나무를 심는 평범한 사람이다. 잠이 오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고 원고 마감에 쫓기면서도 글쓰기의 긴장감과 두려움을 이기려고 애써 다른 일을 꾸준히 하는 사람.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혼자가 되어 울면 어쩌나 걱정하는 사람.

다른 이와 비교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세상의 시선에 눈치를 보기도 한다. 그럴 때면 더더욱 글쓰기와 책 읽기로 돌아가려고 한다. 『가끔, 오늘이 참 놀라워서』에서 회상하는 어린 시절과 책 읽기의 기억은 따듯하면서도 서러웠다. 어른이 되었다고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통장 잔고를 걱정하고 터무니없는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는 삶이 놓여 있다. 시장을 가고 대중교통을 타고 강연을 하러 다니면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모습과 풍경을 성실히 기록한다.

오늘이라는 시간은 놀랍다, 가끔. 당연하게 주어지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서 의미 없이 살아내지만 잠깐의 여백을 두고 바라보면 그 안에는 우리를 내일로 이끌고 가는 발견이 숨어 있다. 눈을 뜨는 일로 시작하는 하루의 기적. 커피물을 끓이고 냉장고를 열어 간식을 꺼낸다. 읽고 싶은 책이 있고 오늘은 꼭 해야 하는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어렸을 때 읽은 작가는 꾸준히 글을 써서 책을 내고 그걸 읽는 시간. 잊고 지내던 그 시절의 어느 한순간이 호출되어 나를 막막하게 하는 일. 그런 오늘이 있어서 놀라운 가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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