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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 장혜령 소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평점 :







진주
『진주』가 소설이 될 수 있을까. 책 표지에는 '진주, 장혜령, 소설'이라고 쓰여 있다. 작가의 말에서 이 원고를 한강에게 보냈더니 전화를 걸어와 에세이보다는 소설로 이름 붙이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힌다. 그래서 『진주』는 에세이가 아닌 '소설'이 될 수 있었다. 책에는 실제 장혜령이 썼던 일기, 글짓기 원고가 실려 있다. 과거를 과거이게 두고 싶지 않았던 힘으로 글은 쓰였다.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아버지를 둔 딸의 시선으로 과거를 현재로 가지고 온다. 양심수라는 이름으로 진주교도소에 갇혀 있던 아버지. 처음 비행기를 탔던 날은 아버지를 면회하러 간 날이었다. 진주. 긴 여름 방학 동안 무더위를 잊기 위해 생각난 듯이 가본적 있었다. 한때 살았던 서향의 그 집은 해가 늦도록 머물렀다. 여름이 가장 힘들고 겨울은 더욱 힘들었다.
간이 정류소에서 표를 사고 버스에 올랐다. 진교에 들렀다가 진주에 도착했다. 도시 한가운데를 흘러가는 기나긴 강을 보며 땀을 식혔다. 기차를 타고 수목원에 가기도 했다. 심심한 맛의 비빔밥과 사골 국물로 끓인 만둣국을 먹었다. 강변 근처에 있는 헌책방에 들러 신중한 얼굴이 되어 책을 골랐다. 다시 가보면 헌책방은 사라져 있었다.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당시 여당 대표의 도지사가 의료원을 폐쇄했고 근처 가게들은 영업이 힘들어졌다.
그런 도시. 무언가 생겨났다가 이내 사라지는 도시. 예감도 없이 떠난 허수경의 도시. 진주.
장혜령
장혜령은 『진주』를 쓰려 했으나 진주에 다시 가기 전에는 쓸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때처럼 비행기를 타고 진주에 갔다. 낡아가는 도시를 일별하고 돌아와 카페와 작업실을 전전하며 『진주』를 쓸 수 있었다. 도저히 아버지, 어머니가 있는 곳에서는 쓸 수 없었다. 세상이 독재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노동자들은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고 인간다운 생활이 가능한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외쳤던 당신에게 어린 딸은 소실되었으나 기억이라는 힘으로 붙들어 맨 편지 한 통을 기어이 써 보낸다.
아버지가 민주화운동을 하며 경찰에게 쫓기는 동안 어머니는 옷 수선집에서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한 채 일을 했다. 딸은 부재한 아버지의 안위를 일기장에 표현한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직접적인 위로는 피하고 어린 학생에게 필요 하리라 예상되는 무심한 내일의 다짐을 적어 놓는다. 지금까지 후일담 문학은 당사자의 시선과 묘사에 의해 쓰였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임무. 손에 든 계란이 남아 있지 않을 때의 참담함. 실패한 혁명의 기록으로 말이다.
정의를 정의 내릴 수 없다고 자책하는 이야기는 1인칭인 '나'에 의한 개인의 서사였다. 『진주』는 다르다. 세상의 변화를 갈망했고 민주주의 실현에 투사했던 고투기가 아니다. '나'를 '당신'이라는 2인칭으로 바꿔 부름으로써 가능해질 수 있었던 서사였다. 경험의 당사자인 '나'를 '당신'의 자리에 옮겨 놓아야 말해질 수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아버지를 '당신'이라고 부르는 '나'는 동네에서 버림받은 개를 돌보고 경시대회 준비를 하고 학급임원으로 수학 문제 풀이를 아이들에게 알려주는 성실한 아이 장혜령이다.
광주에서 무고한 사람이 죽어가고 다시 군인이 대통령이 되고 학생들이 거리에서 쓰러질 때, '당신'은 노동을 연구하고 '나'는 생활을 산다. 아버지의 직업, 학력, 나이를 묻는 가정 환경 조사서를 반 아이들 앞에 낭독할 때, 너희 아버지는 무엇에 봉사하니 질문을 받을 때 '나'는 쓰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가장 가까운 이야기부터 쓰는 것이 문학의 본질이라는 작고 느린 목소리로 말하는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오래 방치해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소설
소설이라는 갈래로 묶어 둘 수 없는 『진주』는 읽는 당신이 누구이냐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결코 끝나지 않는 산문시로. 부정할 수 없는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한 에세이로. 색다른 구성을 시도한 실험적 소설로.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지만 미래는 봉인해 놓은 어린 소녀의 일기장으로. 사랑을 말하기 위해 사랑이 아닌 것들을 쓰면서 사랑을 찾아가는 기행문으로, 나는 읽었다.
『진주』는 소설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 오랫동안 말하지 못한 과거를 품고 있는 소녀는 쓸 수 있는 일 이외에는 없었다. 말은 하지 못했지만 누가 보든 일기장에는 자신의 생활을 숨기지 않았다. 어떤 일기에는 선생님이 아무런 코멘트도 적어놓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하다는 글씨체로 아버지의 오늘을 불안한 시기를 지나는 한국이라는 현실을 꾹꾹 눌러 담았다.
일기를 쓰던 어린아이는 글을 쓰고 싶어 학교에 갔다. 그곳에서 만난 어둠보다 더 어두운 사람들. 가장 가까운 이야기부터 시작하라는 선생의 말을 잊지 않았다. 숨겨 두고 밀어두었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면회가 끝나고 혼자 남았을 차가운 감방에서의 아버지의 하루를 추측하며, 『진주』는 시작된다. '나'를 말하기 위해 '당신'이라는 객관적인 인칭이 필요했다. 비밀이 많던 '나'는 끊임없이 말하기 충동에 시달린다. 비로소 아버지를 '당신'으로 부르기로 결정하자 비밀의 상자가 열린다.



그리고 시
『진주』는 장혜령의 등단 시들에 의해 발화된다. 출소한 아버지와 운동장에서 자전거를 탔던 기억으로 돌아간다. 문학은 회귀와 번복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있다. 돌아가고 다시 돌아오는 과정. 자책과 후회를 하며 과거를 번복하려 애쓰다가도 진실을 마주 보게 한다.
빛은 잘 들어옵니까
이상하지,
세입자가 관리인에게, 그리고
우리가 죄수에게 묻는 질문이 동일하다는 것은
불 꺼진 독방의 내부는
누군가 두고 간
볼펜 잉크처럼 캄캄하다는 거,
의도 없이도 흐른다는 거
처음 타본 비행기와
어깨가 기울어진 한 남자의 뒷모습
그의 휘파람을
존경한다고 교도소장은 말했다
크고 두터운 손으로, 아버지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래, 바람은 불어옵니까
진주식당의 여자는 국수 대신
빨래를 솥에 넣었고
...
(장혜령, 2017년 문학동네신인상 시 「이방인」中에서)
역사는 개인의 개별 서사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후일담 문학 안에서는 당사자의 증언과 서술이 중요했고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와 그녀들에게는 가족이 있었을 텐데. 딸과 아들이 부인과 남편이. 누구도 당사자가 아닌 가족의 일상을 문학 안으로 끌어오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장혜령은 『진주』를 통해 후일담 안에서도 주인공이 아닌 조연의 서사가 가능함을 보여준다. 동료의 이름이 적힌 수첩을 작게 만들어 숨기고 여차하면 삼킬 준비를 하는 그에게는 가족이 있었다. 수학 문제를 잘 푸는 딸은 우습게도 공집합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빛은 잘 들어옵니까. 아버지를 만나 건넸던 질문은 우습게도 빛과 바람의 안부였다. 『진주』는 그러므로 시가 된다. 한때의 청춘과 신념을 배신한 채 사장과 정치인, 공무원이 된 동료들의 부정과 불의를 봐야 했던 아버지에게 딸이 보내는 시다. 용서와 화해라는 돼도 앉는 위로가 아니다. 투쟁했으나 이제는 손에 아무것도 쥘 수 없는 허약한 자신의 오늘을 감내해야 하는 한 인간의 시간을 관측한 기록이다.
세계가/ 조금 전진한 것 같았습니다(장혜령, 「폴림니아 성시」中에서)라고 장혜령은 시의 마지막 연을 마무리한다. 불안이 희망으로 부정이 낙관으로 바뀌는 장면을 연출하며 한 세계의 문을 닫고 탈출한다. 문을 열면 다른 문이 계속해서 나오던 끔찍한 과거를 가진 '당신'에게 문을 열면 빛과 바람, 흰 새가 존재하는 세계를 '딸'은 만들어준다. 폐인이 되지 않아서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동료 밑에서 일을 배우고 부정을 눈 감지 않을 수 있는 아버지여서 장혜령은 '문학하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진주』는 모든 것의 문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