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최선의 롱런 - 문보영 산문집
문보영 지음 / 비사이드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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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하루를 산다. 도통 힘이 나지 않을 때 이 말을 떠올린다. 누군가의 하루는 각자의 하루로서 기능한다. 너의 하루. 우리의 하루가 아닌 각자의 하루, 나의 하루. 일상을 버틴다고도 하지만 나는 산다는 말이 더 좋다. 버티는 건 아슬아슬해 보이니까. 살아가는 건 무덤덤하고 냄새가 나지 않고 색채가 없는 말 같으니까. 그냥 산다. 문보영은 시가 아닌 산문으로 먼저 알게 되었다. 『사람을 대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을 읽고 직접 만들어 올린다는 유튜브의 '어느 시인의 브이로그'를 보았다.

그곳에서 그는 매일유업에서 나오는 캐러멜 마키아토 커피 음료와 바닐라 라테를 즐겨 마신다. 도서관에 가서 공책을 펴들고 무언가 쓸 준비를 한다. 자전거를 타고 동네 산책을 다니고 돼지 인형 말씹러에게 애정을 준다. 친구를 만나 음식을 먹고 집에 와서 책상 정리를 한다. 북토크 행사가 잡히면 지역을 가리지 않고 다닌다. 여기까지 썼는데 별거 없다고 생각이 드는지. 맞다. 별거 없다. 브이로그는 거리를 걷고 무심히 버려진 쓰레기를 관찰하고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는 내용이 전부 일 때도 있다.

유튜브의 알고리즘 상 한 번 '어느 시인의 브이로그'를 봤더니 다른 이의 심심한 일상을 담은 브이로그도 추천해준다. 친절도 하시다. 『준최선의 롱런』에서 문보영은 '별거 없음을 우리 삶에 초대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브이로그의 의미를 정의한다. 자세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삶에 시와 문학만을 두고 살았을 때 그는 많이 힘들었던가 보다. 무너지는 일상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시간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시간이 쌓였고 더 이상 두고 볼 수만 없었을 때.

일기를 썼다. 누군가의 브이로그를 봤다. 영상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자신이 쓴 일기와 비슷했다. 일기의 서사란 너무도 뻔했으니까. 서사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 일어나고 움직이고 먹고 움직이고 쉬었다가 다시 잠드는 하루. 이상한 힘이 났다. 누군가의 하루가 나의 하루에 힘을 불어 넣어주고 있었다. 일기를 쓰다가 시를 쓰고 줄거리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해도 책을 읽어나갔다. 『준최선의 롱런』에서 문보영은 자신이 책을 읽긴 하지만 줄거리 파악을 하지 못한다고 솔직하게 밝힌다. 정말 좋은 부분이었다.

누군가의 솔직함을 만나는 순간만큼 짜릿한 순간도 없다. 시인인데. 줄거리 파악을 못해서 역자 후기를 꼼꼼히 읽는다니. 『준최선의 롱런』은 문보영이 자신의 일상을 다잡기 위한 기록이다. 예술보다는 일상이. 시보다는 오늘 먹어야 할 아침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기록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좋다. 최선의 마지막 단계인 준최선까지만 열심히 하고 힘이 나면 최선까지 올라가 보는 것. 대충 하지는 않지만 열심히도 하지 않는 것. 그래야 오래오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일기를 열심히 쓰는 사람은 없다. 단어를 고르고 문장의 호응 관계까지 신경 쓰면서 최선을 다해 쓰지는 않는다. 그저 오늘 나의 움직임을 기록하고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살려 휘갈긴다. 살아가는 나의 기록을 남겨 놓는다. 『준최선의 롱런』도 그렇다. 대외적으로는 시인이지만 시라는 글자를 빼면 사람.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문방구에서 고심해서 고른 공책에 지나갈 나의 하루를 빼곡히 적는다. 부디 일기를 쓰면서 대충 살아나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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