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마음산책 짧은 소설
백수린 지음, 주정아 그림 / 마음산책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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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굉장히 심심한 하루가 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예언하는 내일이 있을 뿐이다. 과거라고 부르는 어제는. 지나갔으니 기억할 필요는 없으니 패스. 여행은 일정과 숙소, 교통편 등 계획을 짜는 일이 귀찮아 다니지 않는다. 주말은 집에서 뒹굴뒹굴. 재미있다는 평을 나중에 들은 드라마를 한 편씩 보고 책을 읽고 다 읽으면 감상평을 남긴다.

백수린의 짧은 소설집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에는 일상을 묵묵히 살아가는 이들이 등장한다. 전기세 걱정 때문에 밤에만 에어컨을 트는 젊은 부부. 휴가를 공항으로 떠난다. 떠나오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보며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갔던 휴가를 떠올린다(「완벽한 휴가」). 새벽녘 잠에서 깨어 다시 잠들지 못하다가 길에서 데려온 늙은 개의 온기로 잠을 이어가는 여성(「그 새벽의 온기」). 어린 부부가 나누는 미래의 불안과 믿을 수 있다면 생겨나는 희망에 대한 대화(「참담한 빛」).

그때 우린 왜 그렇게 없는 것이 많았을까? 그와 사귀는 동안에도, 이별하고도 한동안 나는 내가 만약 조금 더 가진 것이 많았다면, 미모든 재능이든 박애주의자같이 넓은 마음씨든, 우리의 관계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궁금했다. 만약에, 그러니까 아주 만약에, 내가 아니었다면, 더 나은 사람이었다면 그렇다면 나는 더 사랑을 받았을까?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이 훨씬 더 마음에 든다고 나는 누구에게라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더 이상 나 아닌 무엇이 되기 위해 안달할 필요가 없으니까. 이제야 비로소 나는 내가 나인 것을 온전히 좋아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 나는 점점 더 그런 사람이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백수린,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오직 눈 감을 때」中에서)

소설은 나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해준다. 내가 살아온 시간을 만들어진 인물과 사건으로 들려주면서 말이다. 깊게 좌절하거나 절망했던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백수린은 차분하고 깊이 있는 시선으로 삶을 응시한다. 모나지 않은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은 오랜만에 읽는다. 세상을 향한 적의보다는 오랫동안 생각하고 깨달은 자신만의 삶의 독법을 가진 인물이 들려주는 인생의 어느 사건은 감동은 준다.

더 괜찮은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는. 오래전 헤어진 연인의 연락을 받고 중국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생각하게 되는 '나'라는 사람의 현재. 간병인의 이름이지만 눈이 내리는 겨울 밤 죽어가는 이를 곁에서 지켜주는 오늘의 '나'. 소설의 세계에 출몰하는 비슷한 나들은 시간을 초월해 이곳의 나에게 찾아온다.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에는 유독 죽음의 장면이 많다.

그렇게 죽음의 순간을 그리려고 했던 건 아니었겠지만 소설에는 죽음을 앞두거나 이미 죽은 누군가들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빈번하다. 괜찮다. 우리는 모두 죽어가는 중이므로. 물기 없는 일상을 촉촉하게 만들어 가는 것으로 예비된 죽음을 모른척할 수 있다. 어느 날 찾아와 나의 등을 톡톡 두드리며 같이 가자고 말하는 순간을 밀어두는 것으로.

누군가에게 보여주며 과시할 일상이 내게는 없다. 별일 없이 사는 게 별일인 세상이다. 평범한 하루를 가지는 게 누군가에게는 버거운 일이라는 걸 안다. 가끔 소설을 읽으며 뒤를 돌아보고 주어진 오늘과 다가올 내일에 힘을 다하는 것. 죽는 순간 사랑한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며 사라지는 것.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는 작은 소원 하나를 가슴에 품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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