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살해자 마르틴 베크 시리즈 9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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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소설은 한 번에 단숨에 읽어가야 한다. 흐름이 깨지지 않도록 말이다. 중간에 일이 치고 들어와도 무심하게 넘기는 여유까지 있다면 더 좋다. 그러한 온전한 하루가 있어야 한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하루에. 마이 셰발, 페르 발뢰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던져주고 싶다. 1권부터 9권까지. 주중에 하루씩 총 9주에 걸친 건조하고 생기 없는 스웨덴의 풍경 속에서 살게 해주고 싶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 9권인 『경찰 살해자』는 초반부터 사건 안으로 독자를 밀고 들어간다. 등 뒤에서 떠민다. 1970년대의 스웨덴으로 시간 이동을 한 우리는 관찰자의 시점으로 사건을 조망한다. 팔짱을 낀 채 범행이 일어난 곳에서. 그 차를 타지 말아야 한다. 『경찰 살해자』의 처음과 함께하면 이 생각부터 든다. 하지만 여기는 소설의 세계. 사건이 일어나야 하는 필연성의 세계. 


한 여자가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가 오기까지는 삼십분. 눈치 좋은 독자라면 여기에서 여자에게 차를 태워주겠다는 누군가 등장하겠지 생각할 것이다. 맞다. 여자 앞에 차가 선다.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차를 타지 않았겠지. 여자와 남자는 안면이 있다. 여자가 차에 오르고 여자의 집과는 다른 방향으로 차는 움직인다. 길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으로 그들은 간다. 여자가 마지막에 한 생각이란 나뭇더미에 눌린 뒤통수. 머리카락 걱정이었다. 


그렇게 여자는 사라진다. 여기서 마르틴 베크가 등장한다. 그는 동료 콜베리와 경찰 제복을 차려 입고 순찰차에서 잠복 중이다. 린드베리라는 도둑의 절도 증거를 찾기 위해서. 이 사건이 나중에 어떤 역할을 할지. 아직 독자는 궁금하다. 실종된 여자는 어쩌고. 워워워. 조금만 기다리시라. 린드베리는 덜미를 잡힐 것이다. 다음 장면에서 마르틴 베크는 사건이 일어난 곳에 서 있다. 


답답하고 느린 수사의 정수를 보여주는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독특하게 그 점으로 긴장감을 선사한다. 여자는 죽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시체가 있다. 어떻게 찾아야 할까. 자발적 실종인가. 사건에 관계된 건가. 마르틴 베크는 자신의 이름으로 농담을 건네는 경찰 뇌이드와 함께 사건을 조사해 나간다. 혹시 놓친 부분이 없을까. 마르틴 베크는 특유의 꼼꼼함과 직관력으로 증거를 찾아 나간다. 


추리 소설의 구성이 그러하듯 도둑 린드베리는 그냥 나오지 않는다. 뜬금없는 인물과 사건은 없다. 린드베리는 후에 사건을 풀어가는데 얼렁뚱땅의 역할을 한다. 여기서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난다. 물건과 차를 훔쳐 달아나다 경찰의 검문을 받게 된 2인조가 등장한다. 총격 사건이 터지고 경찰관 한 명이 죽는다. 범인도 한 명 죽는다. 달아난 도둑은 경찰 살해자로 수배된다. 


세 개의 사건이 맞물리면서 사건은 해결된다. 직업적인 허무함과 인간성의 상실감 앞에서 인물은 방황하고 갈등한다. 범인을 잡는 이야기 안에 고독하고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단 하루의 날. 어떠한 일에도 방해받지 않은 채 『경찰 살해자』를 읽어가기를 바란다. 쓸쓸하고 서글픈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무사히 춥고 막막한 스웨덴에서 탈출구를 찾아 나오기를. 아직 시리즈 한 권 더 남았다.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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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1~2 세트 - 전2권 사계절 만화가 열전
이창현 지음, 유희 그림 / 사계절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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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사는지 모를 일이다,라고 쓰고 싶지만 안다. 정확히 언제부터 독서에 빠지게 되었는지. 동네의 한 작은 서점에서 첫 책을 구매한 시점부터이다. 엄마한테 돈을 받아 책을 샀다. 정확한 제목은 모르겠다. 귀신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앗. 쓰다 보니까 기억났다. 『한밤의 귀신축제』. 그 이후로도 공포와 괴담 책을 사서 모으기에 이른다. 아실랑가 몰라. 책을 사면 빨간색 입체 안경이 들어 있던 책도 있었다. 


『한밤의 귀신축제』 이후에는 위인전으로 갔다. 『유관순』을 읽고 울었다. 만세 운동을 하기 전 산에 올라 결의를 다지던 장면에서. 책을 많이 사주는 집안 분위기는 아니었고 자급자족해야 했기에 학급 문고나 도서관을 이용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학급 문고.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도서관. 그 시절 시리즈는 그렇게 끝도 없다. 책이란 좋은 거구나. 느꼈던 건 집에 혼자 있을 때였다. 늘 혼자가 아니지 않았던 적은 없지만 방학 동안 혼자서 오후를 보낼 때 읽을 책이 있으면 슬프지 않았다. 


책 이야기를 하자면 이 밤이 끝나도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이런 사람을 책덕후라고 한다지. 독서를 소재로 한 웹툰(독서를 소재로 한 웹툰도 있구나. 이걸 누가 볼까 하지만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생겨났겠지.)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을 읽고 헛웃음과 그냥 웃음, 공감의 웃음들을 지을 수 있었다. 그렇지. 나만 이상한 거 아니었지. 세계 여러 나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누군가 어떤 나라를 말하면 내가 아 거긴 이러이러해서 별로라는 식의 상대를 화나게 하는 화법으로 대화를 주도했다. 


자꾸 별로라고 하니까 상대가 거기 가봤냐고 해서 당당히 아니요, 책에서 읽었지요 하고 대화는 끝이 났다. 나는 책으로 여행을 배웠다. 한때 여행기만 읽었던 시절이 가져다준 지식이었다.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에서도 그런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독서 클럽 회원들이 자신들이 뽑은 세계의 근사한 도서관을 추천한다. 거기 가보셨냐는 질문에 얼어붙은 표정이 된다. 다 책에서 읽은 거라는 말씀.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은 독서 클럽에서 만난 독서 중독자들의 책의 애호를 병맛 코드로 그려낸다. 서로를 별명으로 부르며 책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한 척 논의한다. 사자, 고슬링, 경찰, 예티, 슈, 선생, 로렌스는 모였다 하면 책부심을 드러내기에 바쁘다. 책의 저자와 목차를 보고 좋은 책을 고르는 방법, 베스트셀러와 자기개발서는 간단히 무시해 주는 센스. 신입 회원을 받을 때에도 조금 까다롭게 군다. 


1권의 끝에서는 이야기가 난데없이 스파이 첩보 액션물로 튀지만 2권의 첫 페이지를 읽고 나서는 이 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빈칸에 자신의 이름을 넣고 읽어보라고 하는데 나 웃기고 위로받아서 뒤지는 줄. '누구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으로 성장했다'니. 완전 내 이야기잖아. 책을 좋아한다는 건 화려한 취미의 세계에서는 발도 내밀 수 없고 어휘력은 풍부한 것 같은데 실무적인 부분에서는 도움이 되지는 않는. 


그래 하자 없고 건강하고 예쁜 이들에게는 독서 취미가 없, 나. 없겠지. 없을 거야. 책을 읽지 않아도 그들에겐 세상이 꽃밭이고 꽃길이잖아. 매력 발산으로 추앙받으며 살아가겠지. 오로지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니. 누워서 앉아서 책만 읽어대는 휴일에 나는 피곤하고 병든 사람임이 증명되었다. 2권에서는 자신을 다크섹시라고 불러달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귀여운 설인 인간도. 책이 있어 다행이야.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을 읽고 나면 안도한다. 


정말 정말 다행이야. 어두움, 공포, 고독, 불안, 고통, 슬픔, 분노, 낭패, 허무들을 책이 감당해 주니까 말이야. 독서 클럽이라면 일방적이고도 지독한 책사랑을 마음껏 늘어놓을 수 있겠지. 그렇지만 사람 만나는 에너지를 모으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을 추천한다. 종이를 뚫고 나오는 이상한 망신스러움만 극복하면 되거들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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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MBTI가 같네요! MBTI 테마소설집 3
김홍 외 지음 / 읻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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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에 한 발 뒤처지는 정도가 아니라 유행이 뭔지도 모르는 채로 살고 있는지라. 그러다 뒤늦게 눈치 없는 애처럼 뭐야, 뭐야 그게 뭐야 한다. 나도 좀 알자 이러면서. 열풍인 MBTI도 그랬다. 유행일 땐 관심도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지겨우니까 MBTI 이야기는 그만하자. 이럴 땐 난 MBTI에 과몰입해 있다. 


알면 알수록 신기하고 신난다. 나도 잘 모르는 나를 알파벳 네 개로 알려준다니. 혈액형 한 글자로는 부족했지. 암 그렇고말고. 좀 더 많이 알려줘야지. 종이 검사지로 해본 나의 MBTI는 ISFP이다. 침대와 한 몸. 계획은 세우기만 할 뿐. 귀찮아라는 말을 수시로 하고 상대의 말에 아 진짜?와 그렇구나로 돌려 막는다. 선택하는 일에 어려움을 느낀다. 특히 물건 살 때. 얼마간의 고민 끝에 두 개를 다 사고 후회하는 타입.


MBTI 테마소설집 『우리 MBTI가 같네요』는 귀찮음의 대명사 그렇지만 미워할 수 없는 ISFP 이야기가 있다.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 이주란이 썼다. 이주란도 ISFP란다. 어쩐지. 소설을 읽어갈수록 극공감 되어 나중에는 울고 있더라니. 성향이 비슷해서 그런 거였다. 신기방기 동방신기. 다섯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감정형 F들을 그린다. 


첫 번째 소설 「여기서 울지 마세요」는 제목부터 나를 울린다. 나이 때문도 아니고 원래부터 나는 눈물이 많았다. 소심하고 예민해서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나는 내가 ISFP라는 걸 아니까 괜찮아졌다. 너의 그런 모습을 MBTI로 책임을 돌리지 말라고 혹자는 말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너는 이렇다고 세상 친절하게 알려주는데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울지 말라고 했지만 「여기서 울지 마세요」를 읽고 울고 다음 편 「9」를 읽으며 대책 없는 계획에 또 한 번 눈물바람. 드디어 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ISFP 소설 「안경」 차례. 성향이 비슷한 두 친구의 일상 이야기는 나의 모습 그 잡채. 귀찮아와 다음에 할까를 연발하며 그럭저럭 하루를 얼렁뚱땅 넘기는 나를 사찰하여 쓴 소설이다. 「양지바른 곳」은 독특한 인물이 나온다. 흡혈인 조황주의 내일이 궁금하다. 


나랑 딱 하나만 다른 ISFJ 이야기 「수호자」는 목에 올라탄 귀신과 함께 할 수밖에 없을 주인공 때문에 웃프다. 현실에서 이 말을 꼭 해보고 싶다. 우리 MBTI가 같네요. 같은 ISFP인들을 만나서 맞아, 맞아, 그래, 그래, 아 진짜를 연발해 보고 싶다. 침대와 이불, 베개 정보를 묻고 어떤 자세로 누워 있을 때가 편한지 조언도 좀 듣고 말이다. 


여행 이야기는 금물. 내일 뭐 할까 묻는 것도 금물. 아무 이야기 안 해도 괜찮고 뭐 먹고 싶어요라고 계속 질문하는 ISFP인들의 만남을 호응해 주시라. 원래도 누워서 읽지만 『우리 MBTI가 같네요』는 시작부터 끝까지 누워서 읽었다. 잠깐 앉아 있을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귀찮지만 타인의 곤란함에 대해서는 모른 척하지 않고 어떻게든 도우려고 한다. 다른 성격학 검사도 있다고 하지만 당분간 MBTI로 나를 위로할래. 칭찬만 해주세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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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적 낙관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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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유일하게 살아 있는 생물이란 스투키 화분 하나이다. 기억을 더듬어 가보자면 2021년 봄 집 앞에 있는 화원에서 데려왔다. 선인장도 죽이는 사람이라 무얼 들여놓기가 어려웠다. 오래 살 수 있는 걸로 추천해 주세요. 사장님은 스투키를 권했다. 과습 때문에 죽는 아이라 잎을 만져보고 홀쭉해져 있으면 물을 주면 된다고 했다. 


처음에는 나름 신경을 쓴다고 일정 간격으로 물을 줬다. 잘못이었다. 잎이 노랗게 변해버렸다. 가지치기 그런 것도 모르고 그냥 잎을 잘라버렸다. 그 후로 방치. 다섯 개의 잎으로 지금까지 살아있다. 살아있, 는 게 맞을까. 아무튼 잎은 초록색이다. 선인장처럼 대우해 주고 있다. 키우고 돌보는 건 어렵다. 마음을 쓰는 일에는 재능이 없다. 


김금희의 산문집 『식물적 낙관』은 식물 하는 사람의 마음의 온기가 적당해 손에 자꾸만 쥐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책은 이상하다. 책은 이해할 수 없던 시간과 기억을 불러와 끝끝내 나를 이해시키고 만다. 형편이 안 좋았음에도 화분 하나씩을 들여와 물을 주고 꽃이 피는 걸 좋아했던 장면이 있었다. 곧 시들어 버리는 비싼 꽃다발은 사지 않았다. 대신 높은 곳에 걸어 두면 아래로 잎을 축복하듯 떨구어 주던 화분들을 샀더랬다. 


그런 낡고 헤진 기억들이 있었다. 무해한 것만을 취하는 꽃과 나무들. 약간의 돌봄만 더해준다면 좀 커다란 기쁨을 선사해 준 것이리라. 뜻대로 되지 않던 일에 치이고 화원 앞을 지나다 그중에 저렴한 화분을 하나씩 사서 집으로 돌아왔으리라. 그건 뜻대로 되던 일이리라. 『식물적 낙관』에 등장하는 식물들의 이름 중 베고니아, 제라늄, 유칼립투스는 반가웠다. 아는 만큼 보인다. 어떤 날들에 그 이름을 가진 식물들과 함께였다.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으로 이어지는 계절에서 식물들은 자라거나 생장을 멈추기도 한다. 누군가의 발코니에서 자라나는 식물들의 사계절을 책으로 만나는 행운을 누린다. 그 애들의 성장을 보다 보면 세상 무수한 복잡한 일도 별것 아닌 것이라 여기는 '식물적 낙관'의 근육이 생긴다. 공기, 햇빛, 물, 바람만으로도 살아가는 식물의 생태계 안으로 인간도 한 발 들어가 함께 하면 어떨까. 그런 마음이 『식물적 낙관』에 곳곳에 놓여 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식물에게 주고 싶은 마음에는 관심과 사랑이다. 스투키 화분에는 이름을 쓸 수 있는 하트 목걸이가 달려 있었다. 이름을 붙여주자.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꽃이 되고 의미가 되니까. 견딜 수 없는 날들에 무얼 해야 할까. 우리에겐 마스크를 써야 밖으로 나갈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눈으로만 소통을 해야 했고 코가 간지러워 재채기를 하면 눈치가 보였다. 작가는 그 시기를 식물을 가꾸는 일로 살아갔다.


주먹을 쥐면 손등에 선명한 기미가 보인다. 어느덧 힘들었을 시간을 견딘 그이와 같은 나이가 되어 가고 있다. 화가 나고 슬퍼지는 순간을 돌보고 아끼는 마음으로 대체할 수 있다. 아프고 고통스러운 마음을 물 주기와 햇빛 쪽으로 옮겨 놓기라는 행동으로 바꾼다. 절망을 낙관으로 바꾸는 것으로 세계는 무해한 식물로 가득해진다. 공기는 정화되고 배경 이미지는 녹색으로 우리는 다른 별로 이주를 꿈꾸지 않아도 된다. 다 잘 될 거야 하는 터무니없는 낙관의 마음을 가진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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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재의 노래
공선옥 지음 / 창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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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선재는 할머니에게 학교에 가는 날이라고 거짓말한 걸 두고두고 후회한다. 할머니는 선재가 같이 장에 갔으면 했다. 할머니 혼자 장에 갔고 선재는 친구 상필이 집에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계란 프라이와 볶음김치로 밥을 먹었다. 배부르게 먹고 나무 위에 올라갔다. 이장이 찾아와 할머니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전했다. 


공선옥의 소설 『선재의 노래』는 그렇게 한 사람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후회를 그린다. 몰랐지. 몰랐어. 여느 날과 같은 하루인 줄 선재는 알았을 거다. 귀여운 손주와 장에 가고 싶은 할머니의 마음을 알았지만 선재는 다음에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손수레를 끌고 장에 가는 할머니의 그 모습이 살아있는 할머니의 마지막이 될 줄이야. 몰랐다. 


명절, 생일, 어버이날 같은 기념일을 챙길걸. 전화가 오면 짜증 내지 말고 받을걸. 단 얼마라도 꾸준히 돈을 보낼걸. 하는 후회의 마음들이 매일 차곡차곡 쌓인다. 시간은 흐르지 않고 틈이 있는 빈 공간을 차지해 고여 있다. 고여 있는 시간 안에서 잘못한 기억과 그로 인한 반성의 순간을 맞이해야 한다. 너의 한심함에 대해 1,500자 내외로 서술하시오. 문제를 받아들고 빈 종이를 채워나가야 한다. 


열세 살 선재는 할머니가 떠나고 혼자가 된다. 울고 후회하고 그리워한다. 세상천지에 나 말고 아무도 없다는 외로움이 사무친다. 혼자인 선재는 어떻게 살아갈까. 할머니 없는 선재의 오늘이 걱정되어 죽을 것 같았다. 누가 선재를 돌봐주지. 다행히 동네 사람들이 먹을 걸 챙겨다 주지만 선재의 마음까지는 어쩌지를 못한다. 할머니의 유골함을 챙겨 선재는 길을 떠난다. 


『선재의 노래』는 죽음 뒤에 오는 상실의 순간을 겪어낸 모든 이들을 위로하는 소설이다. 모두 전부 죽는다. 이것만 알면 잘못도 후회도 남기지 않을 수 있다. 아직 어린 열세 살 선재라서 몰랐다. 언제나 곁에 할머니가 있을 줄 알았다. 나 역시 그랬다. 죽는다 죽는다고 해도 그 순간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라서 싸가지 없이 굴었다. 


할머니를 잘 보내주기 위해. 남은 날들에 할머니의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선재는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슬픔이 모이면 노래가 된다. 갇힌 슬픔을 풀어주기 위해 노래를 부른다. 노래는 기억이 슬픈 사람들에게 바쳐지는 제물이다. 노래 부르게 해줄 테니 울지 마. 오늘 추석 선물로 장어 세트를 받아왔다. 왜 좀 더 나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할까. 됐다. 됐어. 그런 마음 갖지 말고 노래를 부르자. 선재가 부르는 노래를 이어 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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