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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1~2 세트 - 전2권 ㅣ 사계절 만화가 열전
이창현 지음, 유희 그림 / 사계절 / 2023년 7월
평점 :
어쩌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사는지 모를 일이다,라고 쓰고 싶지만 안다. 정확히 언제부터 독서에 빠지게 되었는지. 동네의 한 작은 서점에서 첫 책을 구매한 시점부터이다. 엄마한테 돈을 받아 책을 샀다. 정확한 제목은 모르겠다. 귀신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앗. 쓰다 보니까 기억났다. 『한밤의 귀신축제』. 그 이후로도 공포와 괴담 책을 사서 모으기에 이른다. 아실랑가 몰라. 책을 사면 빨간색 입체 안경이 들어 있던 책도 있었다.
『한밤의 귀신축제』 이후에는 위인전으로 갔다. 『유관순』을 읽고 울었다. 만세 운동을 하기 전 산에 올라 결의를 다지던 장면에서. 책을 많이 사주는 집안 분위기는 아니었고 자급자족해야 했기에 학급 문고나 도서관을 이용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학급 문고.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도서관. 그 시절 시리즈는 그렇게 끝도 없다. 책이란 좋은 거구나. 느꼈던 건 집에 혼자 있을 때였다. 늘 혼자가 아니지 않았던 적은 없지만 방학 동안 혼자서 오후를 보낼 때 읽을 책이 있으면 슬프지 않았다.
책 이야기를 하자면 이 밤이 끝나도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이런 사람을 책덕후라고 한다지. 독서를 소재로 한 웹툰(독서를 소재로 한 웹툰도 있구나. 이걸 누가 볼까 하지만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생겨났겠지.)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을 읽고 헛웃음과 그냥 웃음, 공감의 웃음들을 지을 수 있었다. 그렇지. 나만 이상한 거 아니었지. 세계 여러 나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누군가 어떤 나라를 말하면 내가 아 거긴 이러이러해서 별로라는 식의 상대를 화나게 하는 화법으로 대화를 주도했다.
자꾸 별로라고 하니까 상대가 거기 가봤냐고 해서 당당히 아니요, 책에서 읽었지요 하고 대화는 끝이 났다. 나는 책으로 여행을 배웠다. 한때 여행기만 읽었던 시절이 가져다준 지식이었다.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에서도 그런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독서 클럽 회원들이 자신들이 뽑은 세계의 근사한 도서관을 추천한다. 거기 가보셨냐는 질문에 얼어붙은 표정이 된다. 다 책에서 읽은 거라는 말씀.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은 독서 클럽에서 만난 독서 중독자들의 책의 애호를 병맛 코드로 그려낸다. 서로를 별명으로 부르며 책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한 척 논의한다. 사자, 고슬링, 경찰, 예티, 슈, 선생, 로렌스는 모였다 하면 책부심을 드러내기에 바쁘다. 책의 저자와 목차를 보고 좋은 책을 고르는 방법, 베스트셀러와 자기개발서는 간단히 무시해 주는 센스. 신입 회원을 받을 때에도 조금 까다롭게 군다.
1권의 끝에서는 이야기가 난데없이 스파이 첩보 액션물로 튀지만 2권의 첫 페이지를 읽고 나서는 이 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빈칸에 자신의 이름을 넣고 읽어보라고 하는데 나 웃기고 위로받아서 뒤지는 줄. '누구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으로 성장했다'니. 완전 내 이야기잖아. 책을 좋아한다는 건 화려한 취미의 세계에서는 발도 내밀 수 없고 어휘력은 풍부한 것 같은데 실무적인 부분에서는 도움이 되지는 않는.
그래 하자 없고 건강하고 예쁜 이들에게는 독서 취미가 없, 나. 없겠지. 없을 거야. 책을 읽지 않아도 그들에겐 세상이 꽃밭이고 꽃길이잖아. 매력 발산으로 추앙받으며 살아가겠지. 오로지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니. 누워서 앉아서 책만 읽어대는 휴일에 나는 피곤하고 병든 사람임이 증명되었다. 2권에서는 자신을 다크섹시라고 불러달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귀여운 설인 인간도. 책이 있어 다행이야.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을 읽고 나면 안도한다.
정말 정말 다행이야. 어두움, 공포, 고독, 불안, 고통, 슬픔, 분노, 낭패, 허무들을 책이 감당해 주니까 말이야. 독서 클럽이라면 일방적이고도 지독한 책사랑을 마음껏 늘어놓을 수 있겠지. 그렇지만 사람 만나는 에너지를 모으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을 추천한다. 종이를 뚫고 나오는 이상한 망신스러움만 극복하면 되거들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