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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마를렌 하우스호퍼 지음, 박광자 옮김 / 고트(goat) / 2020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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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걱정에도 절망에도 빠지지 않았다. 억지로 걱정거리나 절망적인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내 상황이 얼마나 절망스러운지를 알만큼은 나이를 먹었다.
(마를렌 하우스호퍼, 『벽』中에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두렵지 않았다. 소심하고 겁 많은 전형적인 A형의 내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미리 걱정하고 불안해하던 내가 말이다. 두루뭉술하게 쓸까 하다가도 주절주절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망이 앞선다. 할까와 말까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일단 시작해 보기로 한다. 백수로 보낸지 7개월이 되었고 이제는 어디라도 취직을 하고 싶었다. 나이가 많아서인지 면접의 기회도 쉽지 않았다. 아무 데나 불러주는 곳으로 가자 했지만 마음이 가지 않은 곳에는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그렇다. 나는 모순 덩어리이었던 것이다.
이력서만 내면 되는데 나는 온갖 서류를 챙겨서 넣었다. 자기소개서, 졸업 증명서, 자격증 확인서 같은 누가 보더라도 준비성 하나는 철저해 보이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 그게 통한 걸까. 면접을 보라는 문자가 왔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 면접을 보러 갔다. 내 앞의 누군가가 먼저 면접을 보고 있었다. 어떤 말이 오갈까. 자세히 듣고 싶었지만 빗소리에 대화가 묻혔다. 여러 명의 면접관 앞에서 자기소개를 하고 왜 직종을 바꾸려 하는지 묻는 답에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이가 들어도 일을 하고 싶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합격 전화를 받았다. 축하합니다로 시작하는. 그토록 간절히 기다렸던 말을 들었다. 걱정이 먼저 앞서고 할 수 없을 거라는 나 자신을 한없이 위축하는 감정이 들어야 했다. 너, 할 수 있어? 경력도 없는데. 잘 할 수 있겠어? 그전에 나라면 누구라도 미안해서 묻지 않을 그 말을 나는 나에게 했어야 했다. 그래서 포기하고 좀 더 쉬운 일로 가야 했다.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될 대로 되겠지. 못 하면 나가라고 하겠지. 그러면 나오면 되지.
자신감이 아니었다. 할 수 있다는 마음도 아니었다. 그건 그냥 한다와 해본다는 마음이었다. 업무 인수인계를 받을 때도 나 이거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 보다 한다, 어떻게든 된다는 마음이었다. 집에 돌아와 마를렌 하우스호퍼의 소설 『벽』을 펼쳤을 때 나의 마음을 대신 말해주는 듯한 문장을 읽고 안도가 되었다. 친척의 초대로 산장에 초대받은 '나'는 다음날 아침 일어났을 때 주변이 변한 것을 알아챘다. 곧 돌아오겠다는 친척은 돌아오지 않았고 주위를 둘러봐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산장에서 나와 산을 탐색했다.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지만 이내 벽에 가로막혔다. 투명한 벽이 세워진 것이다. 벽 너머로 집과 사람이 보였지만 다가갈 수 없었다. 사람은 죽어 있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친척이 키우던 개 한 마리가 살아 있는 생명체의 전부였다. 그때부터 '나'의 고군분투가 시작된다. 어느 날 갑자기 '벽'이 왜 생겼는지 알고 싶었지만 궁금증을 풀만한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오직 살아남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다정한 개 룩스와 충직한 소 벨라, 깍쟁이 고양이와 '나'는 벽이 둘러쳐진 산에서 살아간다. 그동안 누군가 자신을 구조해 줄 거라 기대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벽』은 재난 소설로 성장 소설로 읽어도 무방하다. 읽는 사람의 마음, 환경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느냐에 따라 『벽』의 장르는 달라진다. 사는 것이 재난이라면 재난 소설로 사는 게 좀 더 괜찮아질까 이상한 기대를 하고 있다면 성장 소설로. 알아서 읽으면 된다.
과연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나를 의심하기보다 일단 한다는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벽』을 읽어갔다. 현실의 나보다 더 혹독한 삶을 살아내고 있는 '나'의 하루하루를 보면서(인간은 누군가의 불행 앞에서 겸손해지기 마련이니까) 지금의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근거를 찾아내는 작업을 했다. '나'는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 대신 당장 살아가기 위한 일들을 한다. 하고 해낸다. 산장에 있는 식량을 모으고 사냥을 하고 건초 더미를 만든다.
소설 속 '나'는 벽이 둘러쳐지고 혼자 2년의 시간을 살아간다. 그러다 자신의 삶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달력과 시계는 없지만 기억을 복원해 그간의 일을 정리한다. 벽이 왜 생겼을까. 방사능 때문일 수도 누군가의 실험일 수도 있다. 한 인간을 벽에 가둬놓고 어떻게 변화하고 살아가는지 지켜보는 괴상한 실험. 실험은 실패로 끝날 것 같다. '나'는 죽지 않는다. 백수 기간 동안에 깨달았다. 포기는 어렵다. 이건 안 될 거야. 손을 터는 일은 어려웠다.
포기가 어려워 포기하지 않는 걸 선택했다. 차라리 그게 나았다. 나의 가능성을 믿는다기보다는 한 번 더 해보자는 의욕이 생겨 포기하지 않았다. 『벽』의 주인공 '나'는 세상에 자신뿐이라는 걸 알았을 때 절망에 빠지지 않고 살기로 선택한다. 선택의 대가는 참혹했지만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혼자 남겨졌을 때-우리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간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일 뿐이다-당신은 누군가를 그리워할까. 매 순간이 혼자라는 걸 안다면 보이지 않는 벽 안에 갇혀 살아가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면 슬픔, 분노, 불안, 절망이라는 감정에서 자유로워진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알에서 벗어났지만 자신을 둘러싼 벽과 마주하는 시간이 찾아온다. 벽을 부수라고 해야 할까. 아니다. 벽은 그대로 놓아둔 채 그건 자기를 지키기 위한 방어막이기에 그대로 살아가면 된다. 벽 안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며. 그 일을 하기 싫어 벽을 허물고 되지도 않는 인간관계를 쌓으려 하는 당신과 나였다. 이제야 조금 알겠다. 어떻게 나를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벽』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깨닫게 된 것이다.
포기하고 싶었던 2021년의 겨울과 봄을 지나 포기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믿는 여름을 지내고 있다.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으로 살아가기로 한다. 삶의 의미 따위를 찾기보다 '그냥'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한다와 산다 그리고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