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버터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21년 8월
평점 :





시사 프로그램에서 다루는 결혼 관련 사기 사건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란 왜 저런 바보 같은 일을 하지라는 것이었다. 피해자들의 절박한 호소를 보면서도 마음이 섣불리 동요되지 않았던 건 나라면 절대 저러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 한 스푼까지 곁들여서. 건방진 생각이란 걸 안다. 사람은 자신에게 잘해주고 마음을 열어주면 그 순간 당사자가 아주 힘들거나 외로운 상황에 처해 있으면 더 마음이 훅 간다는 것도 안다. 그러지 않더라도 조건을 따져서 상대를 만나는 사람이라면 어느 날 백마 탄 왕자나 마차 끌고 온 공주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뭔들 내주지 못하겠냐만.
정말 사랑했다고 그럴 줄 몰랐다고. 나 이외에 만나는 사람만 여럿이라는 걸 안 순간 죽을 것 같았다는 절규. 가만있어 봐. 그럴 일도 없겠지만 만약을 가정한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뻥, 거짓말, 구라, 사기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것 같은데.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어서 휴일이면 집에서 청소, 빨래, 책 읽기, 리뷰 쓰기, 꽂히는 노래 무한 반복해서 듣기, 드라마 보기(최근에 빠진 드라는 《유미의 세포들》, 세포들이 "유미, 유미" 응원봉을 들고 연호하는데 그게 나를 응원하는 것 같아서 이상한 감동에 휩싸였다.)가 전부라 사람을 만날 기회가 없으니. 결혼을 빌미로 사기를 치려는 상대를 만날 상황 자체가 없다.
인터넷이 있다고? 우리에겐 온라인이 있지 않냐고? 카톡, 블로그 외에는 SNS 활동도 안 하는지라. 뭐, 사람 일은 모른다고?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동안 읽은 책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을 접한지라 대충 보면 짐작 가능합니다요. 이 인간이 어떤 종족인지. 유즈키 아사코의 신간 『버터』는 그런 의미에서 책으로 세상만사 배우기를 즐겨 하는 나에게 딱인 책이다. 600쪽의 단단하고 무거운 이 책은 일본에서 일어난 실화 '수도권 연속 의문사 사건'을 다룬다.
이른바 '꽃뱀'이 등장하는 사건은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난다. 결혼을 조건으로 상대 남성에게 접근해 돈을 갈취한 여성의 용모가 '꽃뱀'의 이미지와 달랐다. 여러 남성을 현혹 시킬만한 외모가 아니었다. 평범한 얼굴에 몸무게는 100kg이 넘었다. 여성은 결혼을 원하는 남성에게 접근하고 나중에는 자살로 꾸며 살해했다. 피해자들의 증언에는 여성이 요리를 잘하고 말씨에는 기품이 넘쳤다고 했다. 사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다. 유즈키 아사코는 실화 모티브를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가지이 미나코는 항소심을 기다리고 있다. 주간지 기자 리카는 세 명의 남성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가지이에게 흥미를 느낀다. 대체 어떤 여성이기에 남성을 유혹해 돈을 얻고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것일까. 취재를 시작하면서 리카는 가지이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다. 세간에서 말하는 뚱보와 악녀 이미지로만 소비될 인물이 아님을 직감한 리카는 적극적으로 가지이를 인터뷰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다. 구치소에서 대면한 가지이는 리카에게 에쉬레 버터를 이용한 간장밥을 먹을 것을 권한다. 그 후 리카는 가지이가 말한 요리를 대신 먹기 시작한다.
유즈키 아사코의 『버터』는 단순히 실화를 바탕으로 사건을 재구성한 소설이 아니다. 소설에는 일본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을 비꼬고 해체한다. 예쁜 용모의 여성이 아니었다. 남성들이 한눈에 반할만한 미모가 아니었음에도 대체 왜 가지이의 유혹에 넘어갔던 것일까. 리카는 가지이와 대화를 통해 점점 변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전까지 리카는 마른 몸을 가졌다. 주간지 기자라는 남에게 보이는 용모를 일정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진 리카였다.
편의점 음식으로 대충 끼니를 때운다. 취재원이나 기사 소스를 주는 '손님'에게 여성성을 어필하지 않기 노력한다. 자신이 정한 틀에 자신을 엄격하게 가둔다. 그런 리카가 가지이를 만나면서 변한다. 제대로 된 밥을 먹기 위해 요리를 하고 결혼과 인생에 관한 신념을 다시 생각한다. 요즘은 모르는 사람에게도 질문을 받는다. 결혼은 했느냐고. 안 했다고 하면 그럴 줄 알았다고. 어려 보인다고. 그런데 실제로 전 어리지 않습니다, 말하고 싶지만 굳이 그런 말은 안 하고 상황을 모면한다.
관심도 없으면서 관심 있는 척 개인적인 질문 오지게 한다. 유머 센스와 상황 대처 능력이 부족한 나는 얼버무리거나 답을 회피한다. 서른세 살의 리카는 자신을 둘러싼 주변을 새롭게 직시한다. 결혼과 출산을 위해 일을 그만둔 절친 레이코, 아이를 양육하기 위해 부서를 옮긴 선배 미즈시마. 리카는 그녀들의 선택이 최선이 아니었음을 최선이라고 믿고 있음을 알아챈다. 여성은 남성을 위해 존재한다. 여성은 남성의 식사를 책임져야 한다. 가지이는 사회가 요구하고 자신이 받아들인 신념을 이용해 유약한 남성을 골라 욕망을 충족했던 것이다.
다양한 요리를 소개하는데도 먹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던 건 문제일까. 요리에는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야 함을 일찌감치 알고 있어 시도 자체를 안 한다. 대충 사는 것 같은데 이게 나의 최선이다. 『버터』에서 내가 감동받은 부분은 리카가 요리에 도전하는 것이 아닌 일, 결혼, 출산, 사랑, 삶에 대한 시각이 풍부하게 바뀌는 부분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선택하길 기다리지 않는다. 타인에게 보일 완벽한 자신을 세팅하지 않아도 된다. 세상이 요구하는 것 같은데 실은 자신이 부여한 기준에 도달하지 않아도 된다. 『버터』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다.
솔직하게 살자. 마음을 숨기지 않은 채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격려해 주면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은 건 부적응이 아닌 네가 원하는 일이라는 걸 받아들이면서. 결혼 사기 사건에 휘말리지 않으리라 장담하는 건 일상, 음악, 문학, 문구점 구경, 귀여운 캐릭터 굿즈 모으기, 신간 사서 모으기, 예전에 읽은 책 다시 꺼내기, 대화가 통하는 친구 1인과 걷기 외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작은방에 앉아서 하늘 바라보기 추가.(오늘은 날이 흐리네요.)
새로운 곳에서 일하면서 안 그래도 없던 자존감이 바닥을 뚫고 지하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버터』를 읽으니 그렇게까지 나를 몰아붙이지 않아도 된다는 걸 배웠다. 지하로 떨어진 자존감을 끌어올린다. 너는 틀리지 않았고 다른 것이다. 다른 건 틀린 게 아니다.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기 보다 지금 무얼 먹고 싶은지 의문하는 것으로 너의 오늘을 응원해 주길 바란다. 내가 위로받는 건 현실을 직조한 허구의 세계이지만 그게 나를 살게 한다. (나를 포함한 둘 이상과 대화하는 건 어렵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 건가요? 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