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세상의 기쁜 말 - 당신을 살아 있게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정혜윤 지음 / 위고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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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들으면 우습겠지만(남들 시선 신경 쓰지 말자고 매일 다짐 해놓고. 실체가 없는 남을 신경 쓰는 나.) 일하는 게 힘들다. 내 일만 잘하면 되는 건지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내 일은 물론 잘해야 하고 남의 일까지 일일이 신경 쓰고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야 한다. 남의 돈 벌어먹고사는 건 쉽지 않다는 진리를 매일 절감한다. 쉬는 날 저녁에 전화해서 나를 남과 비교하는 사람이 있고.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다고 막말을 하는 사람이 있고.


아무 생각 없이 출근해서 업무 시작하려고 했다가 육탄전에 끼기도 하는. 영화로 따지면 액션, 서스펜스 장르를 찍었다고 할까. 종일 땀이 흘러서 전에 했던 업무인데도 까먹어서 헤맸다. 오랜만에 식은땀을 흘렸다. 어떤 말들은 아프다. 그리고 슬프다. 차라리 하지 않았으면 좋을 말들이 더 많은 세계에서 간간이 버티며 살고 있다. 지금까지 살면서 한 가지 통찰한 건 필요없는 말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말이 필요하지 않다.


중학교 때는 출판사에서 일하고 싶었다. 좋아하는 책을 읽고 만들 수 있는 직업이라고 막연히 동경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닌 글과 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의 바람. 출판사 유튜브를 보곤 하는데. 이건 정말 안 좋은 생각인데. 대학 졸업하고 출판사에 들어갔으면 저 정도의 직급이 됐을 텐데, 미련이 철철 넘치는 생각을 한다. 인생 쉽지 않고 죽음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기에 후회나 자책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때로 돌아가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정혜윤의 『슬픈 세상의 기쁜 말』을 읽으며 고통은 지나갈 수밖에 없으며 새로운 고통이 온다 해도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는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확인했다. 책의 제목을 잘 지었다고 감탄한다. 세상은 슬픈데 말은 기쁘다. 제목을 보고 어찌 사서 읽지 않을 수 있을까.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껴안고 사는 우리의 마음을 저격한다. 어디 슬픈 세상에서 기쁜 말은 어떤 게 있을까 탐험해 볼까. 관계를 맺는 건 귀찮지만 사람들이 어떤 모습과 생각으로 살아가는지 궁금한 이중적인 나에게 『슬픈 세상의 기쁜 말』은 탁월한 책이다.


자신의 삶을 이루는 중요한 단어 하나를 빼고 자신을 이야기해보자고 책은 시작한다. 라디오 PD인 정혜윤에게는 라디오를 말하지 못하게 하고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책 역시 말하지 못하게 한다. 중요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많은 말을 가지고 와야 한다. 설명은 길어진다. 듣는 이는 집중할 수밖에 없다. 잘 듣는 귀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이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삶의 중요 단어를 맞힌다. 『슬픈 세상의 기쁜 말』에는 정혜윤이 만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부, 낚시꾼, 시장 상인, 세월호 유가족, 뒤늦게 글을 배운 할머니, 콜럼바인 총기 사건의 생존자. 세상사를 책으로 배운 나는 『슬픈 세상의 기쁜 말』을 통해 다시 깨닫는다. 허튼소리를 진지하게 하는 사람과는 가급적이면 대화를 나누지 말 것. 방어벽을 친다고 열린 마음으로 살지 못한다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한 번뿐인 삶에서 소중한 기억만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은 마음인 걸. 이미 너무 많은 슬픔과 고통을 겪어 왔기에. 현실에서 만난 이들에게 자주 이토록 실망하지만 나는 책에서 그토록 깊은 내면을 가진 그들을 만나 환호한다.


헤더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마거릿 애트우드의 말 중에 "우리가 가진 것은 목소리뿐(All I have is a voice)"이라는 말이 있어요. 이 말은 내게 중요해요. 나는 사회의 통념대로라면 전문가가 아니지만 아까 말한 대로 내 인생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전문가예요. 우리는 알아야 하고 솔직하게 말해야 해요.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문제를 문제로 알아야 문제를 풀 수 있어요.

(정혜윤, 『슬픈 세상의 기쁜 말』中에서)


콜럼바인 총기 사건의 생존자 헤더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말을 자신의 인생으로 끌고 온다. 결코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일이 일어났을 때 헤더는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는 법을 배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나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우리 인생의 전문가는 타인이 될 수 없다. 오로지 나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렇게 되기까지 나의 언어를 가져야 한다. 자신의 언어가 없는 이들은 얼마나 슬프고 초라한가.


『슬픈 세상의 기쁜 말』에서 인상적인 사람은 야채장수 언니였다. 그이를 만나기 전 정혜윤은 떡집 주인을 만난다. 주인은 엄마의 떡집 좌판을 물려받았다. 시장에서 버틸 수 있었던 비결은 잘 듣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저 잘 듣기만 했는데 시장 사람들은 떡집 주인을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였다. 그이가 소개해 준 야채장수 언니는 우울증을 앓았다. 그러다 우울증 탈출법을 찾았다. 일기 쓰기, 동화책 읽기, 천 원짜리 플라스틱 컵에 커피나 차 마시기. 세 가지 방법으로 우울증을 이겨냈다.


쓰기, 읽기, 마시기. 한 사람의 인생을 절망에서 구할 수 있는 방법은 단순하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한다. 잘 자기. 잠이 오지 않아도 일단은 눈을 감고 있기. 머릿속에서 자라는 불안과 상념을, 그건 그것대로 지켜보면서.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당신의 고통을 위로하고 싶지 않다.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라고 쉽게 말하고 싶지 않다. 『슬픈 세상의 기쁜 말』은 그런 말을 해주는 책이다. 당신의 삶에 어떤 말을 놓아 둘 것인가. 그 말을 가지기까지의 서사를 정혜윤은 귀가 배지근해지도록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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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고 싶어서 떠난 핀란드 여행 - 그나저나, 핀란드는 시나몬 롤이다!
마스다 미리 지음, 홍은주 옮김 / 이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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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다 미리의 여행 산문집 『생각하고 싶어서 떠난 핀란드 여행』의 뒷부분을 꼭 읽어보길 바란다. 귀여움으로 가득 찬 산문집의 대미를 장식할 귀여움 끝판왕이 등장하니까. 코로나19가 시작되기 전 떠난 핀란드 여행이라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2017년부터 2019년까지 마스다 미리는 핀란드로 여행을 떠났다.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첫 여행은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떠난 듯했다.


아마 일이 잘 풀리지 않았던 모양이지. 그나저나 부럽다. 생각하고 싶어서 한 일이 여행이라니. 요즘 나는 생각이 다시 많아졌다. 불안, 초조, 걱정하는 병이 도졌다. 잘 안되면 어떡 하지로 시작해서 실수하면 안 되는데, 결국 실수해서 한 소리 들었 네로 하지만 그건 내가 한 일이 아닌데, 마치 내가 한 일처럼 오해를 사서 결국엔 죄송합니다를 말해버렸다.


이런 자책감으로 몸부림치는 며칠이었다. 다 털어내고 맛있는 거 먹으면서 쉬어야지 했지만 자면서도 그 상황에서 바보처럼 아무 말도 못 한 내가 꿈에 그대로 나왔다. 손해 좀 보고 살면 어때. 아무리 이런 생각을 해도 나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 아니라서 그건 내가 한 일이 아니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후회만 가득이다. (이러면 안 되지만. 그만두고 싶었다. 나이 들어 어디 받아줄 데도 마땅치 않다는 거 아는데. 왜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하나. 살면 얼마나 산다고. 회의감이 몰려왔던 것이다.)


다행히 잘 참아냈다. 다만 기분은 좋지 않았다고 말은 했다. 자기 일이 아니면 사람들은 대부분 무신경한지라 별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어서 다시 한번 상처를 받고야 말았다. 이런 기분을 털어내기 위해 돈을 모으고 비행기 표를 알아보고 여행 일정을 짠단 말이지. 우리의 공감 요정 마스다 미리 언니는. 『생각하고 싶어서 떠난 핀란드 여행』은 같은 곳을 세 번 가는 일정이다.


작년에 묵었던 숙소에 묵고 그때는 일정을 잘못 짜서 보지 못했던 곳을 다시 한번 가는 식이다. 그게 좋았다. 새로운 곳도 좋지만 일상을 떠나왔지만 일상과 이어진 느낌을 받기 위해 익숙한 곳에 머무는 여행. 마스다 미리는 핀란드의 명물인 시나몬롤과 결국엔 사랑에 빠졌다. 서점에 자리 잡은 카페에 가서 활발한 점원의 몸짓에 감탄하며 커피와 빵을 먹는다.


백야가 시작되는 시점에 가서 늦게까지 돌아다니기도 한다. 트랩과 배를 타고 관광지를 어슬렁 다닌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도착한 핀란드에서는 귀여운 물건들을 잔뜩 산다. 미니어처와 지인에게 줄 수프, 자신이 먹을 빵을 사서 캐리어에 차곡차곡 담는다. 색연필로 그린 듯한 그림과 직접 찍은 사진이 핀란드 여행의 운치를 더해준다.


핀란드를 돌아다니면서 지쳐 있던 마음을 달랜다. 일상에서 받은 스트레스의 기운을 디저트와 맛있는 수프와 아름다운 경치로 물리친다. 사고 싶은 물건은 처음에 마음에 드는 물건 위주로 산다. 어른의 여행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먹고 싶고 사고 싶은 것은 산다. 망설이지 않고. 부럽다기보다 신기하고 기분이 좋다. 내가 하지 못하는 걸 누군가가 하면서 행복을 느끼고 있어서.


본격적인 여행을 한 번도 가지 못했지만 『생각하고 싶어서 떠난 핀란드 여행』을 읽으며 대리 행복을 느낀다. 빡빡한 일정으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피로를 느끼는 여행기가 아니다. 동네 산책을 떠난 듯한 가볍고 발랄한 느낌의 여행기. 그나저나 마스다 미리가 잔뜩 산 마리메꼬는 대체 무얼까. 찾아보니 색감이 화려하다. 이걸 사러 핀란드에 가야 한단 말인가. 일단 백신 접종 완료하고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제주도부터 시작해 보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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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국의 딸들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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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에서 연재하는 장강명의 칼럼을 읽었다. 긴 글을 쓰기 위해서는 고정 수입과 자신만의 공간 필요하다는 글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토지문학관에 입주 신청을 한다. 『토지』를 읽지는 못했지만 『김약국의 딸들』을 인상 깊게 읽었다고 했다. 앞부분의 나오는 김약국의 어머니 일화가 기억에 남으니 읽어보라고 권했다. 곧바로 읽어보리라.


추석 연휴 동안 조금씩 읽었다. 많이 읽지 못한 이유는 밀린 잠을 자느라고. 자도 자도 피곤. 개피곤. 넘나 피곤. 지금도 피곤. 지난 금요일에는 백신 1차 접종을 했다. 많이 먹어야 한다기에 일단 먹었다. 팔이 욱신거리고 허기가 지는 것 외에는 별다른 증상은 없다. 《유미의 세포들》 식으로 말하자면 감옥에 가둬놨던 출출이 세포가 백신 한 방에 탈옥을 했다. D.P 조를 풀어서 잡으러 가야 하는데 귀찮아서 내버려 두고 있다.


왜 박경리, 박경리 하는 줄 알겠다. 문장이 정확하고 읽는 사람의 마음을 짐작하는 듯 흡입력 있게 서사를 풀어 놓는다. 장강명이 인상 깊게 기억하는 김약국의 어머니 일화는 초반에 나온다.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이런 시대를 우리가 살았단 말이지.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우리는 여성에게 가혹한 과거를 가지고 살았었다. 조선의 나폴리라고 불리는 통영 묘사를 시작으로 소설은 김약국이라고 불리는 가문의 일대기를 이야기한다.


결혼을 해도 잊지 못해 숙정을 찾아온 욱은 숙정의 남편에게 죽임을 당한다. 숙정은 그날 밤 비상을 먹고 자결한다. 그의 남편 봉룡은 형세가 불리해짐을 깨닫고 도망간다. 둘 사이에는 어린 아기가 있었다. 이름은 성수였다. 죽은 어머니를 잊지 못해 옛집에 찾아와 있기를 즐겨 한다. 후에 성수는 큰아버지 봉제의 뒤를 이어 김약국의 후계자가 된다.


좋아하는 여인이 있지만 차마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김약국은 다른 이와 결혼을 한다. 딸 다섯을 두었다. 과부 용숙, 공부 잘하는 용빈, 얼굴 예쁜 용란, 살림 잘하는 용옥, 귀염둥이 막내 용혜. 『김약국의 딸들』에서 다섯 딸의 운명은 각자 다른 생김새의 모습대로 별나게 흘러간다. 소설의 배경은 일제 강점기이다. 통영이라는 항구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채로운 인생 모습이 마음을 누른다.


다섯 딸의 인생은 어머니 한실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여자는 시집을 잘 가야지 팔자가 핀다는 사고방식이 유효한 시점에 쓰인 『김약국의 딸들』이었다. 소설은 허구라 하지만 있음 직함 일을 그리는 문학이라. 읽고 나서도 이런 일이 허다하게 있었겠지. 그러니 작가가 소설로 썼겠지라는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그만큼 다섯 딸의 삶이 기막히고도 허무했다.


김약국의 딸들의 삶의 비극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못하는 단순한 이유에서 출발한다. 봉건 제도가 남아 있는 시대라 그렇겠지만 근대화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딸이 좋아하는 이가 집에서 부리는 머슴이어서. 상대 집안의 신분과 가세가 탐탁지 않아서. 딸들의 결혼은 그런 저런 이유들로 성사가 되지 않았다. 지금이라고 달라졌을까. 소설은 쓰인 지 50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지금 시대를 반영한다.


맥락 없이 결혼은 왜 안 하냐고 질문하는 통에 처음엔 그러려니 넘겼지만 자꾸 듣다 보니 이걸 가지고 나를 놀리나 하는 마음이 뾰족해지는 게 어쩔 수 없는 요즘이다. 한 번만 더 그런 말을 업무 시간에 한다면(제발, 업무 시간에는 업무에 대한 이야기만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만 된다면 컴퓨터에 숨겨 놓은 사직서 파일을 떠올리지 않을 텐데.) 그러는 너 님은 왜 그거 하셨어요? 말할까 보다.


결혼이 여성이 가지는 궁극적인 목표인 것처럼 말을 하는 시대착오적인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는 건 『김약국의 딸들』을 읽었기 때문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마음에도 없는 결혼들을 해서 몸과 마음고생하는 딸들의 인생사를 그렸지만 마지막에 박경리는 희망을 남긴다. 그 결혼이 뭐라고. 필수가 아닌 선택이라고 결정한 용빈의 심사를 이어받아 사람 많은 곳은 피해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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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움 견문록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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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움을 주제로 책을 쓸 수 있다니. 역시 마스다 미리답다. 서점사 신간 목록에서 발견한 『귀여움 견문록』을 보고 든 생각이다. 마스다 미리 월드의 일원으로서 사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당장 구매해서 읽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구한다고 했던가. 지금 사면 초판 한정으로 일러스트 스티커도 준대. 스티커가 아니어도 샀을 텐데. 한정으로 준다니. 아싸.


첫 이야기부터 흥미롭다. 「하교하는 초등학생의 귀여운 실루엣」이다. 등교하는 초등학생이 아니다. 수업을 끝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에서 마스다 미리는 귀여움을 느낀다. 출근 시간이 9시까지인지라 근처에 초등학교가 있는지라 아이들과 함께 아침 길을 걷는다. 놀이터가 있는데 아이들은 짧은 시간을 이용해 그곳에서 놀고 있었다. 가방은 던져두고. 그네를 타고 시소에 올라타 있다. 싱그러운 풍경이다.


어떤 날은 가방이 열린 줄도 모르고 걸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봤다. 조심히 다가가 가방 쪽을 가리켰다. 아이는 가방을 앞쪽으로 해서 닫았다. 비가 오진 않지만 우산을 챙겨 들고 오는 아이. 오빠 손을 잡고 걸어 올라오는 키가 작은 아이. 무언갈 먹으면서 걷는 아이. 뒤처진 친구를 기다렸다가 같이 학교로 가는 아이들. 아침의 출근길은 귀여움으로 가득했다. 이런 풍경을 쓸 수 있는 건 순전히 『귀여움 견문록』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이었지. 기억에서 사라질 수도 있었는데. 책을 읽으니 내가 가진 풍경의 깊이가 넓어졌다. 일상의 대가답게 마스다 미리는 『귀여움 견문록』에서 세밀하고 다정한 면모를 보여준다. 의미 없이 지나칠 모습을 간직할 수 있게 해준다. 재첩, 주먹밥, 실뜨기, 멜론 빵, 보온병 등에서 귀여움을 발견한다. 사전과 백과사전을 이용해 말의 어원을 알려준다. 하루를 지내다 귀여움을 간직한 녀석을 본다. 빙그레 웃음 짓고 책을 찾아보는 마스다 미리의 골똘한 얼굴을 상상해 본다.


『귀여움 견문록』의 마지막에는 귀엽다의 뜻이 적혀 있다. '아름다움, 아이스러움 등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모습이나 살아 있는 작은 것, 약한 것에 갖는 자연스러운 감정.' 마지막 말이 오래 남는다. '약한 것에 갖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니. 내가 귀엽다고 생각한 모든 것에 부합하는 말이다. 반찬집 앞에 앉아 있는 동네 강아지들. 그 애들은 학교에 가는 아이들 뒤를 조용히 뒤따른다. 편의점에서 키우는 고양이. 문을 열어도 비켜주지 않은 채 길막하고 있다.


카카오 프렌즈의 영원한 전무님, 라이언. 일자 눈썹이 매력적이고 세계관이 좋다. 책을 좋아하고 카페에 가기를 즐기는. 무표정한데 온갖 표정이 있다. 최근에는 냥줍을 해서 춘식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같이 다니며 춤을 춘다. 펭수. 평생 친구, 10살의 남극에서 온 자이언트 펭귄. 덩치가 큰데 옷을 잘 입는다. 자신감이 넘치고 재치 있는 말로 상황을 부드럽게 만든다.


그리고 나 자신.


이라고 썼지만 나는 나를 귀여워해 주기는커녕 자주 종종 때때로 등신이라고 여긴다. 최근에 겪은 일을 소상하게 쓰고 싶은데 쓰고 나면 나의 무기력함과 센스 없음에 스스로 좌절할까 봐 자제한다. 웃지 말아야 하는데 웃고 있는. 거절해야 하는데 웃고 있는. 따지고 싶은데 웃고 있는. 그냥 망했고. 다시 태어나는 걸로. 나 자신을 귀여워할 수 없으니 최대한 집중력을 발휘해 귀여움을 갖고 있는 걸 찾아야겠다. 귀여움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라도 떠나볼까.


했지만. 귀찮으니 『귀여움 견문록』을 읽으며 누군가가 찾아낸 귀여움을 귀여워한다. 나의 일상은 순간순간 부서지긴 하지만 그동안 읽어온 책으로 앞으로 읽을 책의 힘을 빌려 조각을 이어 붙인다. 그게 나의 힘이 된다. 오늘은 차가 다니는 길에 길게 누워 있는 개를 보았다. 베란다 캣타워에서 서로 뭉쳐 있는 고양이를 보았다. 사실 개와 고양이를 무서워하는데 멀리서 보는 건 괜찮다.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귀여움도 놓치고 싶지 않다고 힘껏 말할 수 있게 해준다, 『귀여움 견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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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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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프로그램에서 다루는 결혼 관련 사기 사건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란 왜 저런 바보 같은 일을 하지라는 것이었다. 피해자들의 절박한 호소를 보면서도 마음이 섣불리 동요되지 않았던 건 나라면 절대 저러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 한 스푼까지 곁들여서. 건방진 생각이란 걸 안다. 사람은 자신에게 잘해주고 마음을 열어주면 그 순간 당사자가 아주 힘들거나 외로운 상황에 처해 있으면 더 마음이 훅 간다는 것도 안다. 그러지 않더라도 조건을 따져서 상대를 만나는 사람이라면 어느 날 백마 탄 왕자나 마차 끌고 온 공주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뭔들 내주지 못하겠냐만.


정말 사랑했다고 그럴 줄 몰랐다고. 나 이외에 만나는 사람만 여럿이라는 걸 안 순간 죽을 것 같았다는 절규. 가만있어 봐. 그럴 일도 없겠지만 만약을 가정한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뻥, 거짓말, 구라, 사기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것 같은데.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어서 휴일이면 집에서 청소, 빨래, 책 읽기, 리뷰 쓰기, 꽂히는 노래 무한 반복해서 듣기, 드라마 보기(최근에 빠진 드라는 《유미의 세포들》, 세포들이 "유미, 유미" 응원봉을 들고 연호하는데 그게 나를 응원하는 것 같아서 이상한 감동에 휩싸였다.)가 전부라 사람을 만날 기회가 없으니. 결혼을 빌미로 사기를 치려는 상대를 만날 상황 자체가 없다.


인터넷이 있다고? 우리에겐 온라인이 있지 않냐고? 카톡, 블로그 외에는 SNS 활동도 안 하는지라. 뭐, 사람 일은 모른다고?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동안 읽은 책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을 접한지라 대충 보면 짐작 가능합니다요. 이 인간이 어떤 종족인지. 유즈키 아사코의 신간 『버터』는 그런 의미에서 책으로 세상만사 배우기를 즐겨 하는 나에게 딱인 책이다. 600쪽의 단단하고 무거운 이 책은 일본에서 일어난 실화 '수도권 연속 의문사 사건'을 다룬다.


이른바 '꽃뱀'이 등장하는 사건은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난다. 결혼을 조건으로 상대 남성에게 접근해 돈을 갈취한 여성의 용모가 '꽃뱀'의 이미지와 달랐다. 여러 남성을 현혹 시킬만한 외모가 아니었다. 평범한 얼굴에 몸무게는 100kg이 넘었다. 여성은 결혼을 원하는 남성에게 접근하고 나중에는 자살로 꾸며 살해했다. 피해자들의 증언에는 여성이 요리를 잘하고 말씨에는 기품이 넘쳤다고 했다. 사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다. 유즈키 아사코는 실화 모티브를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가지이 미나코는 항소심을 기다리고 있다. 주간지 기자 리카는 세 명의 남성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가지이에게 흥미를 느낀다. 대체 어떤 여성이기에 남성을 유혹해 돈을 얻고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것일까. 취재를 시작하면서 리카는 가지이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다. 세간에서 말하는 뚱보와 악녀 이미지로만 소비될 인물이 아님을 직감한 리카는 적극적으로 가지이를 인터뷰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다. 구치소에서 대면한 가지이는 리카에게 에쉬레 버터를 이용한 간장밥을 먹을 것을 권한다. 그 후 리카는 가지이가 말한 요리를 대신 먹기 시작한다.


유즈키 아사코의 『버터』는 단순히 실화를 바탕으로 사건을 재구성한 소설이 아니다. 소설에는 일본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을 비꼬고 해체한다. 예쁜 용모의 여성이 아니었다. 남성들이 한눈에 반할만한 미모가 아니었음에도 대체 왜 가지이의 유혹에 넘어갔던 것일까. 리카는 가지이와 대화를 통해 점점 변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전까지 리카는 마른 몸을 가졌다. 주간지 기자라는 남에게 보이는 용모를 일정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진 리카였다.


편의점 음식으로 대충 끼니를 때운다. 취재원이나 기사 소스를 주는 '손님'에게 여성성을 어필하지 않기 노력한다. 자신이 정한 틀에 자신을 엄격하게 가둔다. 그런 리카가 가지이를 만나면서 변한다. 제대로 된 밥을 먹기 위해 요리를 하고 결혼과 인생에 관한 신념을 다시 생각한다. 요즘은 모르는 사람에게도 질문을 받는다. 결혼은 했느냐고. 안 했다고 하면 그럴 줄 알았다고. 어려 보인다고. 그런데 실제로 전 어리지 않습니다, 말하고 싶지만 굳이 그런 말은 안 하고 상황을 모면한다.


관심도 없으면서 관심 있는 척 개인적인 질문 오지게 한다. 유머 센스와 상황 대처 능력이 부족한 나는 얼버무리거나 답을 회피한다. 서른세 살의 리카는 자신을 둘러싼 주변을 새롭게 직시한다. 결혼과 출산을 위해 일을 그만둔 절친 레이코, 아이를 양육하기 위해 부서를 옮긴 선배 미즈시마. 리카는 그녀들의 선택이 최선이 아니었음을 최선이라고 믿고 있음을 알아챈다. 여성은 남성을 위해 존재한다. 여성은 남성의 식사를 책임져야 한다. 가지이는 사회가 요구하고 자신이 받아들인 신념을 이용해 유약한 남성을 골라 욕망을 충족했던 것이다.


다양한 요리를 소개하는데도 먹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던 건 문제일까. 요리에는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야 함을 일찌감치 알고 있어 시도 자체를 안 한다. 대충 사는 것 같은데 이게 나의 최선이다. 『버터』에서 내가 감동받은 부분은 리카가 요리에 도전하는 것이 아닌 일, 결혼, 출산, 사랑, 삶에 대한 시각이 풍부하게 바뀌는 부분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선택하길 기다리지 않는다. 타인에게 보일 완벽한 자신을 세팅하지 않아도 된다. 세상이 요구하는 것 같은데 실은 자신이 부여한 기준에 도달하지 않아도 된다. 『버터』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다.


솔직하게 살자. 마음을 숨기지 않은 채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격려해 주면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은 건 부적응이 아닌 네가 원하는 일이라는 걸 받아들이면서. 결혼 사기 사건에 휘말리지 않으리라 장담하는 건 일상, 음악, 문학, 문구점 구경, 귀여운 캐릭터 굿즈 모으기, 신간 사서 모으기, 예전에 읽은 책 다시 꺼내기, 대화가 통하는 친구 1인과 걷기 외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작은방에 앉아서 하늘 바라보기 추가.(오늘은 날이 흐리네요.)


새로운 곳에서 일하면서 안 그래도 없던 자존감이 바닥을 뚫고 지하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버터』를 읽으니 그렇게까지 나를 몰아붙이지 않아도 된다는 걸 배웠다. 지하로 떨어진 자존감을 끌어올린다. 너는 틀리지 않았고 다른 것이다. 다른 건 틀린 게 아니다.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기 보다 지금 무얼 먹고 싶은지 의문하는 것으로 너의 오늘을 응원해 주길 바란다. 내가 위로받는 건 현실을 직조한 허구의 세계이지만 그게 나를 살게 한다. (나를 포함한 둘 이상과 대화하는 건 어렵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 건가요? 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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