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독 -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코끼리
랠프 헬퍼 지음, 김석희 옮김 / 동아시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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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성의 엘자>, <명견 래드>, <아기 사슴 플랙>, <래시>, <늑대개>, <플랜더스의 개>, <정글 이야기>,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 <조금만, 조금만 더>, <야성의 부름>, <돌리틀 선생의 바다 여행>, <파이 이야기>...... 선뜻 떠오르는 책만 해도 이 정도. 그리고 대부분은 내 어린 시절의 향수와 동경의 대상이었던 책들이었으며, 지금도 한 없이 아끼고 있다. 이 책들의 공통점은 인간과 동물이 세상에 다시없을 교감을 나눈다는 것. 서로의 존재를 온 몸으로 갈구하는 전 생애동안, 기꺼이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는 소울 메이트가 무엇인지, 자연의 질서 안에 겸허하게 깃든 진리를 통해 이야기한다. 몇몇은 실화이며, 거의 대부분은 영화화되었으며, 몇몇은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는 마법의 주문이 되었다.


    『모독』을 거기 추가한다. 암사자, 콜리, 아기 사슴, 썰매 개, 핑크빛 돼지, 앵무새, 뱅골산 호랑이(엄밀히 말하자면 ‘리차드 파커’는 친구는 아니지만 생존의 이유이기는 하니까)가 아닌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인도코끼리. 넬로와 파트라슈가 동갑내기인 것처럼, 코끼리 조련사 집안에서 태어난 브람과 암코끼리 모독은 한날한시에 태어났고, 넬로와 파트라슈가 함께 동사하여 천상으로 들어간 것처럼, 브람과 모독은 70세 생일을 넘기고서 차례차례 내세에서의 만남을 기약했다.


 

    독일의 슈바르츠발트의 영기서린 곳에서 나고 자란 브람에게 모독보다 귀한 존재는 없다. 브람이 모독을 '내 코끼리'라고 부르는 것은 자신의 소유임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모독은 서커스 단의 코끼리이며, 이리 저리 팔려도 브람으로서는 손 쓸 수 없는 누군가의 자산이다. 친구이며, 가족이고, 일부이자 전부인 관계 안에서 브람이 없는 모독, 모독이 없는 브람이 존재할 수 없음을 모두가 알게 될 때까지의 역정이 눈물겹다. 조난을 당하고, 전쟁을 겪고, 화재가 나고, 기습을 당하고, 이별이 닥치고... 그리고 재회와 죽음에 이르기까지, 브람과 모독의 전 생애에 걸친 가장 소중한 존재에 대한 후회를 남기지 않는 선택과 사랑은 행복이자 천형이다.


    헐리웃이 좋아하는 가족영화의 공식은 ‘아기, 동물, 미인’이다. 브람과 모독의 70평생에 걸친 영혼 대 영혼의 이야기는 곧 영화화될 모양이다. 때로는 현실이 드라마를 무색케 하고, 진실이 전설을 퇴색케 하기도 하는데, 『모독』에 담겨있는 것이 바로 그렇다. 얼마간 윤색이 되고, 운명적인 것은 더욱 강조되었으며, 신비스러움이 상식을 가리기도 하지만, 인간과 코끼리가 서로의 평생지기로 거듭 살아남는 이야기에 뭔가가 점철된다 해도 본질에는 미치지 못할 것만 같다. 카메라의 정교한 프레임 안에 감동적인 오리지널 스코어가 흐르고, 능수능란한 코끼리의 연기와 기꺼이 찬사를 보낼 원작의 팬들이 이미 이렇게 전 대륙에 걸쳐 대기하고 있으니, 기쁜 마음으로 기다려보련다.


    인간과 인간이 교감하는 것조차 인색한 시대를 살면서, 영혼의 상대자를 위해 기꺼이 내 영혼을 먼저 내어줄 수 있는 교감을, 브람과 모독을 통해 절감한다. 유일무이한 존재를 위해 나를 송두리째 잃어야만 완전히 가질 수 있는 사랑을, 누가 과연 완성할 수 있을까? 본능과 가슴이 시키는 일을, 머리로 저지하면서 시류에 안착하는 생에 집착하는 우리네로서는, 자연 위에 군림하는 권력과 질서 없이 완성되는 미증유의 거대한 인간과 동물의 사랑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종종 그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음을 너무나 오랫동안 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환기하며, 자연 안에 깃들어 사는 것을 가벼이 여기며, 영혼의 나눔을 아끼고 아껴왔던 만큼 어딘가에 분명 존재할 인간, 그리고 인간이 아니어서 더 자연스러울 수 있는 정신적 쌍둥이를 찾아나서는 일에 더는 게을러지지 않을 수만 있다면.

 

 


“만약 파트라슈가 죽거나 곁을 떠난다면 할아버지와 넬로는 견디기 힘들었을 거에요.

파르타슈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머리요, 손이요, 발이었습니다. 또한 생명이었고 영혼이었지요.”

( <플랜더스의 개>, 위다, 비룡소, P14)


"아빤 너에게 고단한 삶을 보여 주기 싫었다. 나보다 더 편하게 살게 하고 싶었어. 자기 자식이 힘겨운 인생과 맞닥뜨리는 것을 볼 때, 부모 마음은 찢어지지. 그게 얼마나 괴로운지 부모도 겪어 봐서 알거든. 나는 어떻게 해서든 너를 지켜 주고 싶었다. 네가 사슴하고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했어. 사슴 덕분에 네가 외로움에서 벗어났다는 걸 아빠도 알았거든.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외롭단다. 어쩌겠니? 인생이 나를 배반할 때 어쩌겠니? 그저 그러려니 하고 견뎌나갈 수밖에 없어.”

(<아기 사슴 플랙 2>, 마저리 키난 롤링즈, 시공주니어, P302) 


"인간이 자연과 교감하는 타고난 능력을 계발해 목소리를 듣기를 바란다면 세상만사가 잘 돌아갈 겁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되겠지요. 당신이 모독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인간이 오랫동안 추구해온 일입니다. 동물을 통해 자연과 교감하는 것이지요."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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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16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님, 오랜만이죠!!! 님의 리뷰만 읽기만 하고 댓글로 인사도 못 드렸네요. 잘 지내고 있수? 아무래도 아이들이 학교 다니니깐 일단 아들놈 숙제 먼저 봐주고 뭐하다 보면 이렇게 밥 하는 중간중간에 관심있는 서재인들의 리뷰만 잠깐잠깐씩 흝어보고 댓글은 달지 못했네요. (게다가 신랑 눈치가 좀 보여서...토일은 자제하는 편이랍니다. 맨날 마누라가 컴 앞에만 붙어있었으니 얼마나 꼴보기 싫겠어요....ㅋㅋ)
지금도 밥하다가 서재에 들어와 즐찾에 글 올라와 있길래 님의 서재를 잠깐 방문했지요. 님 잘 지내시고요. 자주 올께요^^ 참참, 난 <돼지가 한마리도 죽지 않던 날> 진짜 재미없게 읽었는데...... 이 책 나귀님도 별 다섯개 줘서 호기심에 읽었다우. 그런데 내 스타일이 아녀^^*

문차일드 2007-05-16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억님, 오랜만이에요... 바쁘셨네요. 가정의 달에... 행복이 충만한 시간 되셨는지 모르겠어요. 앞으로는 더욱 좋은 초여름 되시길...^^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은 제가 마구마구 추천하기도 아까운 책인데... 기억님께 딱 맞는 책들이 더 많으시니, 제가 앞으로는 더 많이 듣고 싶네요. (저는 후편도 가지고 있는데...<하늘 어딘가에 우리집을 묻던 날>... 물론 좋아합니다...^^)

종종 뵙겠습니다!^^
 
이덕일의 역사사랑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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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칼럼 형식의 글 안에 역사와 현생정치가 얼기설기 엮여있다. 만약 이덕일의 역사관에 호감을 갖고 있지 않은 독자라면 쉽게 읽히지 않을 수도 있다. 가장 대중적인 역사 연구가이면서, 베스트셀러를 창출해내는 네임밸류가 확고부동한 이덕일의 1일 언론 같은 느낌이 어느 때보다 짙게 묻어나는 책이 『이덕일의 역사사랑』이다.


    식자층이 자신을 바로 세우고, 세간과의 바른 소통의 장이 되어 준 것이 우리 가옥구조 가운데서 볼 수 있는 ‘사랑(舍廊)’이다. 그 사랑방에서 들려주는 쓴 소리 넘치는 직언들이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가 되어주기도 할 것이고, 때로는 필자의 주관이 객체를 넘어서는 중심의 호도를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전부 때늦은 현안들이라서 ‘지금’을 무색케 하는 지난날의 기록이라는 것에 어리둥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2005년, 2006년이라는 시간대가 간간히 등장하는 것을 보면, 어딘가에 연재했던 꼭지들의 모음 같으나, 아무런 안내가 없는 서문이 불친절하게 느껴진다. 이덕일의 사랑방에서는 여전히 아베 총리가 국경을 넘나들며 망언을 제조하고 있는 게 아니라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를 참배하고 있으며, 대권에 대한 점입가경 아전투구가 아닌 당정 간의 인사내정자를 둘러싼 진통이 여전히 1면을 장식하고 있는 중이다. 적어도 말미에 날짜라도 하나 달아주었다면, 2007년의 독자들의 갸우뚱한 기분이 조금은 누그러질 텐데.


    신문의 칼럼난에 딱 맞을 단문의 분량 안에 동북공정에 대한 대응책으로 민족주의 사관이 끊임없이 설파된다. 중국도 없고, 일본도 없는. 급진적인 기치들이 선뜻 솔깃하지 않은 이유는 보수적이고, 사대적인 역사교육의 희생자로서의 자세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학계와 발맞추어 나가지 못하는 교육계에 대한 한탄 탓이다. 이덕일의 지적대로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와 고조선의 건국연대는 완연한 모순인데도, 국사책의 서두 부분에 늘 고대로만 실려 있다. 불과 얼마 전에야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 분류를 천년을 앞당겨 기재하겠다는 발표가 아주 조용히 났던 기억이 난다. 2008년 교과서부터 개정한다고 하는데, 문제는 조그만 지면에 후다닥 실리고 말았던, 일각의 몇몇 단체들만이 쾌재를 부르는, 마치 ‘로비’의 결과물인양 비치는 것이 못마땅할 수밖에.


    중국의 <한서>나 일본의 <일본사기>의 기록들은 그네들의 한반도 침탈공세를 무너뜨릴 수 있는 귀한 사료가 되기도 하는데, 이 얘기인즉슨 뒤집어 해석하기에 따라 세 나라의 시각차를 더 벌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고대사의 기록이 극히 빈약하고, 선뜻 가보지 못한 곳에 몸을 누인 선조들의 유물들이 타국에 편입되어가는 것을 ‘손놓고’봐야하는 울분에 절로 목소리가 거칠어지려고도 한다. 여전히 사관 대 사관의 팽팽한 대립 안에서 민족주의의 발로만이 아닌, 객체화된 진실들을 바탕으로 이웃한 나라의 횡압에 휘둘리는 일을 지양하고 싶지만, 학계와 정부와 세간의 이인삼각 경주는 여전히 발이 맞지 않는 호흡의 부재를 보이는 것이 아쉽다.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쓴 소리들이 반갑다. 그리고 다른 학자들과의, 논객들과의 남다름과 되풀이함을 거듭 느꼈기에, 그 쓴 소리들을 ‘단 소리’로 바꾸는 것은 유보해두련다. 위정자로서의 민중 위에 군림하는 벼슬아치들의 말로와 당쟁의 와중에도 목민의 이념을 실천했던 현인들을 거울삼아, 역사 안에서 바른 길을 안내받는 좌표로 삼을 줄 아는 의연함이 우리가 사는 곳곳에 깃들기만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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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려드는 책들에 주체를 할 수 없었던 시간들이었습다.
겨우 책장을 사서 정리를 하고,
또 책이 오면 쌓아두다가 가로쌓기를 하고,
날마다 씨름하는 것을 반복하다보니,
뭔가 너무나 걸리기는 하는데,
실체를 모르겠더군요.
 
아...
CD들...
ㅠ_ㅠ
책장을 포개놓느라,
붙박이 CD선반을 떼어내고 전부 내팽겨쳐둔 것이었어요.
베란다에 가보니 박스에 마구 쌓여있었습니다.
허걱...
한때 그리도 열심열심 듣고, 모으고, 울고, 웃고 했건만.
MP3를 듣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찬밥신세던 CD콜렉션(푸하핫, 그냥 무더기)들이
책장 정리 이후로 완전히 단기기억상실...
암튼 이제야 기억이 났습니다.
얘네들, 어디다 둬야하는지 대략난감입니다.
그나마 둘 곳이 없어서 언니가 들고가버린 CD들이 3분의 1이상이라는...
달라고도 못하겠고...
빌려간 책이나 갖다주면 고맙지...
(앗, 빌려간 CD는 일일히 기억이 안나지만,
빌려준 책은 꼬박꼬박 기억에 놓는 이 센스!!!
>_<)
 
암튼 잠시 너저분한 콜렉션을 보시겠습니다. 
 
 
 
L'Arc~en~Ciel 데뷔 15주년 싱글 한정판
(이 귀한 한정판이 이리 굴러다니다니.. ㅠ_ㅠ)
 
 

 
찾아보면 몇 장 더 있을텐데...
 
 

 
Hirai Ken, Hirai Ken, Hirai Ken......
 
 

 
히토토 요, 각트, 모리야마 나오타로, 나카시마 미카, 보아...
나머지는 다 어디갔지???
 
 

 
SMAP, EXILE, Hirai Ken
 
 

 
베스트 앨범
 ( 조지 마이클, 휘트니 휴스턴, 퀸, 보이존, 디즈니...)
 
 

 
MatchBox20와 그 외...
(정말 나머지는 어디 갔냐구???)
 
 

 
OASIS
 
 

 
QUEEN

 

 


 

 
스팅, 도어즈, 에디트 피아프(??), 브로크백 마운틴OST
(앗...
언니가 들고간 것이 도어즈와 OST콜렉션이었구나...
ㅠ_ㅠ
돌려줘... 둘 곳은 없지만... 제발...)
 
 

 
TLC
 
 

 
ANIME OST
(가져간 OST의 리스트가 좌르륵 나오는군!!!>_<)
 
 

 
많진 않지만 쌓아두니 한심스럽습니다.
책에 미쳐서 그 전부터 모았던 CD를 나몰라라했다니...
이걸 어디다 두냐구요...
 
 

 
그나저나 히라이 켄, 나카시마 미카...
내 스탈이야...^^;;
 
 
CD장 둘 곳에 책장을 넣어버려서 상당히 난감합니다.
문차일드,
동시에 두 가지에 미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난 절대 멀티형인간이 아니야...
 
 
차라리 언니네 집으로 영구임대를???
ㅠ_ㅠ
 
 
듣는 음악만 들리는 체질이라서 참으로 두서없습니다.
타인의 취향이려니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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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7-05-08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고 문차일드님 자기 소개 좀 해 주세요.
책은 안 읽는 거 있으면 방출하시구요.
ㅎㅎ 건방이 하늘을 찌릅니다. 이래라 저래라...ㅜ.ㅜ
저도 큰 일입니다. 언제고 날 잡아서 방출을 해야겠는데
이렇게 게으름만 피우고 있답니다.^^


문차일드 2007-05-08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차일드가 자기 소개하는 거 뭐가 어렵겠습니까?(일단 큰소리로 도망침!!!^^;;)
그런데 스텔라님 말고 아무도 궁금하지 않으시다는...^^;;

앗, 방출... 아웅... 아직까지 그래본 적이 없다는 것도 창피하고.. 정말 귀차니즘의 압박이로군요. 검토 들어가보겠습니다...^^

하양물감 2007-05-09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궁금한데용^^

문차일드 2007-05-09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양물감님, 문차일드가 궁금한 두 분 모셨네요... 하핫...^^**
그런데 자기소개를 두 분도 당연히 계시는 다른 곳에 하는게 낫지 않을까 싶을만큼... 알라딘과 안친해서요.. 하양물감님, '의외로 여자'였던 문차일드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엽기 고대왕조실록 - 고대사, 감춰진 역사의 놀라운 풍경들
황근기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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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심리학>, >, <~ 콘서트>, <~ 이야기> 다음으로 도래한, 팔리는 책을 위한 구호는 ‘엽기’인가보다. 문제는 이 ‘엽기’시리즈가 쉽고 재미있는 역사서를 표방하고 있다는데 있다. 역사 그 자체로도 흥미만점인데, 재치만점의 해학까지 담았다나, 그런 고마운 데가 또 있을까마는 어딘지 위험천만해 보이는 구석이 많다. 특히 『엽기고대왕조실록』은 진시황과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 ‘분서갱유’의 충동이 불끈거리는 책이다.

    전설적인 황색 언론 [선데이 서울]의 명성을 익히 들어왔으나, 아쉽게도(?) 태생이 늦은 고로 읽어본 적은 없다. 그런데 황근기의『엽기고대왕조실록』은 ‘뉴타입’의 독자들에게 유머와 엽기성을 제공해야한다는 사명감에 지나치게 사로잡혀서, 고대사에 대한 해석을 ‘스포츠신문’의 지면에 실렸다면 빛났을 ‘고대사를 뒤집어쓴 엽기발랄 시트콤’으로 만들어졌다. 철저하게 ‘지금’을 노림수로 삼은 미디어에서 쏟아지는 고대사만을 소재로 해서 ‘창작’된 상상의 산물을 ‘엽기’에 혹해서 읽어보려는 말랑말랑한 사고가 부러운 청소년들이 읽을까... 분서갱유를 일으키고 싶어진 달까?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대중지상주의적 저작들을 펴내는 역사비전공자 작가가, 빈약한 고대사를 재조명하기 위해 치열하게 얻어지는 사료와 업데이트된 색인표를 넘나드는 대신 선택한 것은, 걸쭉한 입담과 이제는 한물 간 채팅용어과 그리 신선해보이지 않는 상상력이다. 마냥 웃어버리기에는 질탕하게 비속한 면면이 맘에 걸리고, 흥미진진하게 매진해보기에는 너무 많이 노출된 고대사의 이면들이 재방, 삼방을 보는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엽기를 지나치게 실천하면 사고의 전환이나 환기를 부르는 게 아니라, ‘무플의 굴욕’을 당한다고 일러주고 싶다.

    역사서가 새롭게 조명된 사료와 검증을 바탕으로 재미있어지는 것은, 역사 안에서 살아가는 모두의 바람이다. 고대사는 특히 연구자들에게도, 대중들에게도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자, 때로는 국가의 존망을 다투는 이권싸움이 되어버렸다. 골든타임의 방영시간을 꿰차고 국민드라마를 향해 연장방송을 이어가는 ‘고구려 드라마’들이 우리가 얻은 유일한 고대사의 발굴이라면 얼마나 기가 찰 노릇이겠는가. 그 흐름을 편승해서 속속 출판되는 시트콤 류의 저작들이 점차 잦아들어주기를 소망해본다.

 

“당시 신라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당나라에 대한 ‘사대’가 유일한 외교 정책일 수 있다. 한고조 유방은 살아남기 위해 시정잡배의 가랑이 사이를 기지 않았던가. 당시 신라의 외교를 두고 무조건 굴욕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옮지 않다”(P136)

 

설마?

‘살아남기 위해 시정잡배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간 것은 한 고조 유방이 아니라 한신이다.

대략난감, 안습이다.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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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거스미스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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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세라 워터스의 이력은 고스란히 작품에 반영된다. ‘레즈비언 역사 소설에 대한 박사 학위를 준비하다가 구상’했다는 『티핑 더 벨벳』의 성공으로 그의 작품은 더욱 깊고, 음습한 곳을 지향하게 된다. 빅토리아 왕조 시대를 배경으로 배신과 사기가 미덕인 런던의 뒷골목과 어느 시골 저택의 서가를 가득 메울 정도로 가득한 외설서적을 둘러싼 악취 나는 인간관계의 장이 펼쳐지는 『핑거스미스』는 훔쳐보는 재미를 극대화한, 지독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관음증을 다룬 책이다.

    세라 워터스가 빅토리아 왕조의 대문호, 찰스 디킨스를 흠모해마지 않는다는 것은, 인터뷰를 통하지 않아도 작품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고아들을 범죄에 이용한다거나, 뒷골목의 제왕이 등장해 매트리스적인 그물망에 옴짝달싹 못하고, 고통과 인내의 기나긴 시간으로 단련되지 않으면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해피엔딩까지. 디킨즈의 사회문제를 분연히 선동하는 치밀하게 계산된 프로파간다는 세라 워터스에게는 세계관은 대폭 축소되지만, 사회적 약자(고아, 여성, 정신병동의 수감자들)를 옭아매는 범죄와 비속한 성의 세계는, 음험하지만 초신성의 폭발만큼이나 파급력이 큰 반전에 반전을 부른다.

    두 명의 소녀가 있다. 수전 트린더와 모드 릴리. 온실 속에서 애지중지 키워진 난초만큼이나 여리고 섬세하기보다는, 음모와 속임수에 능한 독초에 가까운 기형적 배양물이다. 수전은 아기를 사고파는 유모, 석스비 부인의 기형적인 애정을 받고 자란 교수형당한 어머니를 둔 핑거스미스(도둑, 사기꾼)이고, 모드는 미쳐버린 숙녀가 정신병동에서 낳은 아이로 후에 삼촌의 비서가 되어 그의 취향대로 양육된다. 사기꾼과 숙녀라는 외양을 가졌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둘 다 사기꾼이고, 둘 다 숙녀이지만, 둘 다 속고 속이는 속에서 자신이 결코 원하지 않았던 본모습을 찾게 된다. 지긋지긋하지만 운명과 숙명이라는 이미 행로가 정해진 체스판 위의 말들이었다가, 거기서 이탈하려고 하는 부질없는 몸부림들만이 이 소설의 유일무이한 건강함이자 승부수가 된다.

    수는 석스비 부인과 젠틀맨의 치밀한 음모에 따라 하녀가 되어 백치 같은 상속녀 모드를 정신병동에 가두려고 한다. 모드는 삼촌이 평생을 모으고, 분류색인을 만들고 있는 변태성욕만을 다룬 금서들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를 희생양으로 삼으려한다. 수는 자신이 살뜰히 보살피는 이 천진한 숙녀가 사랑스러울수록 죄의식을 떨칠 수가 없고, 모드는 자신을 속이고 있는 수에게 속아주면서도 애정을 누를 길이 없어 생지옥을 겪는다.

    수의 시각에서, 그리고 모드의 시각에서 되풀이되어 쓰인 호흡이 긴 소설은, 독자들마저 끌어들여 누가 누구를 속이고 있는가의 음모전에 공모자로 만들어버린다. 수, 모드, 젠틀맨, 석스비 부인, 그리고 엿보기 구멍에서 눈을 뗄 수 없는 독자들 모두가 핑거스미스가 되어버린다.

     하나는 사기와 음모가 상식과 법인 뒷골목에서 자라고, 하나는 정신병동에서 나고 외설물의 보고에서 키워지지만, 흔히 나오는 ‘뒤바뀐 아기’들이 그렇듯, 곧 제자리를 찾게 된다. 원래의 자리인 정신병원과 뒷골목. 한없이 지루하고 집요하게 서술되는 둘의 심리묘사는 지나치게 친절해서 반전과 반전 사이에서 김을 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둘 사이의 애정은 둘을 구원해주는 장치가 아니라, ‘사랑하지만 사지에 밀어 넣어야 살아남는’ 비정함을 더하는 잔인함이다. 가장 처연했던 서글픈 대목에서 뼛속까지 약자인 수와 모드의 현실은 냉혹하다. 음모의 핵에서 자신의 무력한 입지만을 확인한 모드가 석스비 부인의 소굴에서 빠져나와 빛의 세계로 가보려하지만, 결국은 그곳으로 돌아와야 하듯, 자신이 배신당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는 정신병원을 탈출해서도 위장된 애정의 추억이 깃든 뒷골목 말고는 갈 곳이 없다.

    BBC 클래식판 드라마를 통해 방영된 『티핑 더 벨벳』과 『핑거스미스』는 ‘공영방송’이라는 근엄한 이미지를 방송사 스스로가 깨버리는 커밍아웃과도 같아 보였다. 고전을 읽게 하지 않고, 보게 만든다는 비난에 시달리기도 했던 그간의 방영작과는 달리, 세라 워터스 원작의 두 드라마는 베드신과 터부들의 스펙트럼을 자진해서 확장시키고 있는 충격적인 영상들이 이어진다. 금기가 양지로 나오고, 관음증을 주류의 영역으로 신분상승을 이루기 때문에 세라 워터스가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테마들은 당당한 문학적 성취로 부상할 수 있다.

     디킨즈의 런던이 그리는 사회악의 개선문제에 대해서는 방향성이 한참은 다르다. 수와 모드가 태어난 랜트 스트리트는, 끝까지 개심하지 않는 진정한 악당과 범죄를 모성의 발로로 승화시키는 음모자와 피해자이면 가해자인 두 연약한 핑거스미스까지, 눈을 떼지 않고 엿보았던 이들을 흡족하게 할 결말을 보장한다. 삼촌에 의해 오욕으로 물든 모드가 브라이어(삼촌의 저택)로 돌아가 자신이 직접 음란물을 저작해야하는 궁색한 지경으로 몰리지만, 우리는 안다. 모드가 쓰는 애욕의 금기어들은 전부 수를 향한 사랑이라는 것을. 그것이 모드의 진정한 해방이라는 것을. 진창과 시궁에 빠진 인간군상들 안에서 두 송이 백합이 피어난다. 사랑은 모든 것을 구원하지는 않지만, 더는 속이고 속일 이유를 찾지 않게는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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