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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독 -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코끼리
랠프 헬퍼 지음, 김석희 옮김 / 동아시아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야성의 엘자>, <명견 래드>, <아기 사슴 플랙>, <래시>, <늑대개>, <플랜더스의 개>, <정글 이야기>,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 <조금만, 조금만 더>, <야성의 부름>, <돌리틀 선생의 바다 여행>, <파이 이야기>...... 선뜻 떠오르는 책만 해도 이 정도. 그리고 대부분은 내 어린 시절의 향수와 동경의 대상이었던 책들이었으며, 지금도 한 없이 아끼고 있다. 이 책들의 공통점은 인간과 동물이 세상에 다시없을 교감을 나눈다는 것. 서로의 존재를 온 몸으로 갈구하는 전 생애동안, 기꺼이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는 소울 메이트가 무엇인지, 자연의 질서 안에 겸허하게 깃든 진리를 통해 이야기한다. 몇몇은 실화이며, 거의 대부분은 영화화되었으며, 몇몇은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는 마법의 주문이 되었다.
『모독』을 거기 추가한다. 암사자, 콜리, 아기 사슴, 썰매 개, 핑크빛 돼지, 앵무새, 뱅골산 호랑이(엄밀히 말하자면 ‘리차드 파커’는 친구는 아니지만 생존의 이유이기는 하니까)가 아닌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인도코끼리. 넬로와 파트라슈가 동갑내기인 것처럼, 코끼리 조련사 집안에서 태어난 브람과 암코끼리 모독은 한날한시에 태어났고, 넬로와 파트라슈가 함께 동사하여 천상으로 들어간 것처럼, 브람과 모독은 70세 생일을 넘기고서 차례차례 내세에서의 만남을 기약했다.
독일의 슈바르츠발트의 영기서린 곳에서 나고 자란 브람에게 모독보다 귀한 존재는 없다. 브람이 모독을 '내 코끼리'라고 부르는 것은 자신의 소유임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모독은 서커스 단의 코끼리이며, 이리 저리 팔려도 브람으로서는 손 쓸 수 없는 누군가의 자산이다. 친구이며, 가족이고, 일부이자 전부인 관계 안에서 브람이 없는 모독, 모독이 없는 브람이 존재할 수 없음을 모두가 알게 될 때까지의 역정이 눈물겹다. 조난을 당하고, 전쟁을 겪고, 화재가 나고, 기습을 당하고, 이별이 닥치고... 그리고 재회와 죽음에 이르기까지, 브람과 모독의 전 생애에 걸친 가장 소중한 존재에 대한 후회를 남기지 않는 선택과 사랑은 행복이자 천형이다.
헐리웃이 좋아하는 가족영화의 공식은 ‘아기, 동물, 미인’이다. 브람과 모독의 70평생에 걸친 영혼 대 영혼의 이야기는 곧 영화화될 모양이다. 때로는 현실이 드라마를 무색케 하고, 진실이 전설을 퇴색케 하기도 하는데, 『모독』에 담겨있는 것이 바로 그렇다. 얼마간 윤색이 되고, 운명적인 것은 더욱 강조되었으며, 신비스러움이 상식을 가리기도 하지만, 인간과 코끼리가 서로의 평생지기로 거듭 살아남는 이야기에 뭔가가 점철된다 해도 본질에는 미치지 못할 것만 같다. 카메라의 정교한 프레임 안에 감동적인 오리지널 스코어가 흐르고, 능수능란한 코끼리의 연기와 기꺼이 찬사를 보낼 원작의 팬들이 이미 이렇게 전 대륙에 걸쳐 대기하고 있으니, 기쁜 마음으로 기다려보련다.
인간과 인간이 교감하는 것조차 인색한 시대를 살면서, 영혼의 상대자를 위해 기꺼이 내 영혼을 먼저 내어줄 수 있는 교감을, 브람과 모독을 통해 절감한다. 유일무이한 존재를 위해 나를 송두리째 잃어야만 완전히 가질 수 있는 사랑을, 누가 과연 완성할 수 있을까? 본능과 가슴이 시키는 일을, 머리로 저지하면서 시류에 안착하는 생에 집착하는 우리네로서는, 자연 위에 군림하는 권력과 질서 없이 완성되는 미증유의 거대한 인간과 동물의 사랑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종종 그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음을 너무나 오랫동안 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환기하며, 자연 안에 깃들어 사는 것을 가벼이 여기며, 영혼의 나눔을 아끼고 아껴왔던 만큼 어딘가에 분명 존재할 인간, 그리고 인간이 아니어서 더 자연스러울 수 있는 정신적 쌍둥이를 찾아나서는 일에 더는 게을러지지 않을 수만 있다면.
“만약 파트라슈가 죽거나 곁을 떠난다면 할아버지와 넬로는 견디기 힘들었을 거에요.
파르타슈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머리요, 손이요, 발이었습니다. 또한 생명이었고 영혼이었지요.”
( <플랜더스의 개>, 위다, 비룡소, P14)
"아빤 너에게 고단한 삶을 보여 주기 싫었다. 나보다 더 편하게 살게 하고 싶었어. 자기 자식이 힘겨운 인생과 맞닥뜨리는 것을 볼 때, 부모 마음은 찢어지지. 그게 얼마나 괴로운지 부모도 겪어 봐서 알거든. 나는 어떻게 해서든 너를 지켜 주고 싶었다. 네가 사슴하고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했어. 사슴 덕분에 네가 외로움에서 벗어났다는 걸 아빠도 알았거든.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외롭단다. 어쩌겠니? 인생이 나를 배반할 때 어쩌겠니? 그저 그러려니 하고 견뎌나갈 수밖에 없어.”
(<아기 사슴 플랙 2>, 마저리 키난 롤링즈, 시공주니어, P302)
"인간이 자연과 교감하는 타고난 능력을 계발해 목소리를 듣기를 바란다면 세상만사가 잘 돌아갈 겁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되겠지요. 당신이 모독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인간이 오랫동안 추구해온 일입니다. 동물을 통해 자연과 교감하는 것이지요."
(P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