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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그 후의 이야기
린다 버돌 지음, 박미영 옮김 / 루비박스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그 해 최악의 영화에 시상하는 라즈베리 상 같은 시상식이 출판계에 있다면 주저 없이 전관왕의 영예를 주고 싶은 책이다. 살면서 우선순위가 바뀌는 경험을 여러 번 겪게 되지만, 이 경우,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단단히 틀어진 악연 탓에 이렇게 불평을 쏟아내야 하는 것조차 불편스러울 따름이다. 내 생애 최악의 속편... 당당히 0순위에 랭크된 『오만과 편견 그 후의 이야기』, 리뷰를 쓰는 유일한 이유는 어서 이 울분에서 해방되어 레테의 강물 한 모금으로 모두 망각해버리고 싶기 때문이다!
서양문학계에도 엄연한 동인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속편이든 전편이든, 자신이 상상한 그대로를 출간할 때의 사회적 해악을 조금만 고려해준다면 좋으련만. 영미권에서 가장 사랑받는 소설 속의 인물인 다아시와 엘리자베스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700페이지 분량의 방대한 추문과 성적인 향연은, 제인 오스틴을 리젠시 소설의 대모로 추앙하는 한 축에서 나왔을지 모르지만, 이 속편을 로맨스 소설의 범주에 넣는다 해도 졸작이 평작으로 탈하지는 않는다.
다아시는 사티로스가 울고 갈 정도의 리비도의 화신이며, 엘리자베스는 제인의 남편 빙리를 제외한 모든 남자들에게 흠모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읽으면서 야릇한 상상에 흐뭇해지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읽지 못했다는 찜찜한 기억으로 남겨두지 않기 위해 자학하면서 붙들고 있었던 본인의 5일간의 고행(도저히 한 번에 읽을 수가 없어 미적대다가 5일간이나 바쳐야했다는 것조차 용서가 안 된다!)도 안쓰럽기는 하나, 오스틴 월드가 이토록 섹스어필로 뒤덮이는 망연자실한 변주에 따져 묻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현기증이 난다.
정말로 저자는 제인 오스틴을 경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만과 편견』의 본질을 철저히 농락하고 있을 뿐이다. 스스로 즐기고, 소수의 지지자들로 만족하지 못하고, 전 세계각지의 도서관의 영미문학코너에서 오스틴의 계승자처럼 독자를 유혹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참담해져온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의식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오만과 편견』을 아끼고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어쩌면 이것이 이 책의 유일한 미덕일지도 모른다!
움베르토 에코(『연어와 여행하는 방법(개정판『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에 따르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속편격으로 선풍을 일으킨 『스칼렛』의 저자 ‘알렉산드라 리플리’는 출판사가 내세운 유령작가일거라고 한다.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 내 생애 최악의 속편은 『스칼렛』이었으나, 강력한 라이벌의 출현으로 한 단계 순위가 내려가게 되었다. 익명의 리플리 여사 오랫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오만과 편견』의 훼손이 아닌 오마주로서의 속편격인 작품을 영화와 드라마가 아닌 문학에서 찾아보고 싶다면 우리는 이미 양질의 작품들과 만나지 않았는가. 헬렌 필딩의 『브리짓 존스』시리즈, 커렌 조이 파울러의『제인 오스틴 북클럽』. 온건하고, 재기 넘치고, 끝도 없는 밀고 당김에 진이 빠지다가도, 평범한 해피엔딩에 가슴 졸이지 않아도 되는 잔잔한 살롱식 애정극.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은 5일간의 고행 끝에 완독한 그 책에서 ‘다아시’와 ‘엘리자베스’의 이름을 전부 삭제하는 작업이다. 때로는 기억의 퇴행이 절실히 필요할 때가 있다는 교훈을 얻었으니 실천해야한다. 그나저나 나는 타협할 줄 모르는 원작지상주의자인가? 아니다. 그저 졸작 앞에서 굳이 너그러울 이유를 찾지 못하는 오만과 편견이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