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거스미스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세라 워터스의 이력은 고스란히 작품에 반영된다. ‘레즈비언 역사 소설에 대한 박사 학위를 준비하다가 구상’했다는 『티핑 더 벨벳』의 성공으로 그의 작품은 더욱 깊고, 음습한 곳을 지향하게 된다. 빅토리아 왕조 시대를 배경으로 배신과 사기가 미덕인 런던의 뒷골목과 어느 시골 저택의 서가를 가득 메울 정도로 가득한 외설서적을 둘러싼 악취 나는 인간관계의 장이 펼쳐지는 『핑거스미스』는 훔쳐보는 재미를 극대화한, 지독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관음증을 다룬 책이다.

    세라 워터스가 빅토리아 왕조의 대문호, 찰스 디킨스를 흠모해마지 않는다는 것은, 인터뷰를 통하지 않아도 작품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고아들을 범죄에 이용한다거나, 뒷골목의 제왕이 등장해 매트리스적인 그물망에 옴짝달싹 못하고, 고통과 인내의 기나긴 시간으로 단련되지 않으면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해피엔딩까지. 디킨즈의 사회문제를 분연히 선동하는 치밀하게 계산된 프로파간다는 세라 워터스에게는 세계관은 대폭 축소되지만, 사회적 약자(고아, 여성, 정신병동의 수감자들)를 옭아매는 범죄와 비속한 성의 세계는, 음험하지만 초신성의 폭발만큼이나 파급력이 큰 반전에 반전을 부른다.

    두 명의 소녀가 있다. 수전 트린더와 모드 릴리. 온실 속에서 애지중지 키워진 난초만큼이나 여리고 섬세하기보다는, 음모와 속임수에 능한 독초에 가까운 기형적 배양물이다. 수전은 아기를 사고파는 유모, 석스비 부인의 기형적인 애정을 받고 자란 교수형당한 어머니를 둔 핑거스미스(도둑, 사기꾼)이고, 모드는 미쳐버린 숙녀가 정신병동에서 낳은 아이로 후에 삼촌의 비서가 되어 그의 취향대로 양육된다. 사기꾼과 숙녀라는 외양을 가졌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둘 다 사기꾼이고, 둘 다 숙녀이지만, 둘 다 속고 속이는 속에서 자신이 결코 원하지 않았던 본모습을 찾게 된다. 지긋지긋하지만 운명과 숙명이라는 이미 행로가 정해진 체스판 위의 말들이었다가, 거기서 이탈하려고 하는 부질없는 몸부림들만이 이 소설의 유일무이한 건강함이자 승부수가 된다.

    수는 석스비 부인과 젠틀맨의 치밀한 음모에 따라 하녀가 되어 백치 같은 상속녀 모드를 정신병동에 가두려고 한다. 모드는 삼촌이 평생을 모으고, 분류색인을 만들고 있는 변태성욕만을 다룬 금서들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를 희생양으로 삼으려한다. 수는 자신이 살뜰히 보살피는 이 천진한 숙녀가 사랑스러울수록 죄의식을 떨칠 수가 없고, 모드는 자신을 속이고 있는 수에게 속아주면서도 애정을 누를 길이 없어 생지옥을 겪는다.

    수의 시각에서, 그리고 모드의 시각에서 되풀이되어 쓰인 호흡이 긴 소설은, 독자들마저 끌어들여 누가 누구를 속이고 있는가의 음모전에 공모자로 만들어버린다. 수, 모드, 젠틀맨, 석스비 부인, 그리고 엿보기 구멍에서 눈을 뗄 수 없는 독자들 모두가 핑거스미스가 되어버린다.

     하나는 사기와 음모가 상식과 법인 뒷골목에서 자라고, 하나는 정신병동에서 나고 외설물의 보고에서 키워지지만, 흔히 나오는 ‘뒤바뀐 아기’들이 그렇듯, 곧 제자리를 찾게 된다. 원래의 자리인 정신병원과 뒷골목. 한없이 지루하고 집요하게 서술되는 둘의 심리묘사는 지나치게 친절해서 반전과 반전 사이에서 김을 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둘 사이의 애정은 둘을 구원해주는 장치가 아니라, ‘사랑하지만 사지에 밀어 넣어야 살아남는’ 비정함을 더하는 잔인함이다. 가장 처연했던 서글픈 대목에서 뼛속까지 약자인 수와 모드의 현실은 냉혹하다. 음모의 핵에서 자신의 무력한 입지만을 확인한 모드가 석스비 부인의 소굴에서 빠져나와 빛의 세계로 가보려하지만, 결국은 그곳으로 돌아와야 하듯, 자신이 배신당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는 정신병원을 탈출해서도 위장된 애정의 추억이 깃든 뒷골목 말고는 갈 곳이 없다.

    BBC 클래식판 드라마를 통해 방영된 『티핑 더 벨벳』과 『핑거스미스』는 ‘공영방송’이라는 근엄한 이미지를 방송사 스스로가 깨버리는 커밍아웃과도 같아 보였다. 고전을 읽게 하지 않고, 보게 만든다는 비난에 시달리기도 했던 그간의 방영작과는 달리, 세라 워터스 원작의 두 드라마는 베드신과 터부들의 스펙트럼을 자진해서 확장시키고 있는 충격적인 영상들이 이어진다. 금기가 양지로 나오고, 관음증을 주류의 영역으로 신분상승을 이루기 때문에 세라 워터스가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테마들은 당당한 문학적 성취로 부상할 수 있다.

     디킨즈의 런던이 그리는 사회악의 개선문제에 대해서는 방향성이 한참은 다르다. 수와 모드가 태어난 랜트 스트리트는, 끝까지 개심하지 않는 진정한 악당과 범죄를 모성의 발로로 승화시키는 음모자와 피해자이면 가해자인 두 연약한 핑거스미스까지, 눈을 떼지 않고 엿보았던 이들을 흡족하게 할 결말을 보장한다. 삼촌에 의해 오욕으로 물든 모드가 브라이어(삼촌의 저택)로 돌아가 자신이 직접 음란물을 저작해야하는 궁색한 지경으로 몰리지만, 우리는 안다. 모드가 쓰는 애욕의 금기어들은 전부 수를 향한 사랑이라는 것을. 그것이 모드의 진정한 해방이라는 것을. 진창과 시궁에 빠진 인간군상들 안에서 두 송이 백합이 피어난다. 사랑은 모든 것을 구원하지는 않지만, 더는 속이고 속일 이유를 찾지 않게는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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