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밤, 멀티플렉스의 가장 작은 상영관, 20명, 커플보다는 홀로 영화보는 싱글이 많다.
정말 볼 사람은 다 보았거나, 2~3번째 나만의 영화를 보기 위해 마지막으로 다시 보러 왔을까?
스포일러에 그토록 노출되어 있고, 시상식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아직도 이슈가 되고,
펑펑 울었다는 그 선배의 말, 불쑥 사 둔 원작소설...
깡그리 무시하며 볼 수 있을까, 하는 노파심은 금새 증발되어버렸다.
와이오밍이랬지?
산은 높다. 나무는 푸르다. 구름은 하얗고 몽실거린다.
양... 정말 많다. 끝이 없다...
남자, 말이 없다. 또 다른 남자, 세속적인 가벼움.
춥고, 외지고, 고되고, 말을 아끼지 않아도 충분히 고독한 그 곳에서,
세상에서 다시 없을 한 때, 한 사람을 얻었지만, 다시는 충분히 가질 수 없는,
두 사람, 남자와 남자의 이야기가 내게도 몸을 똑바로 부딪혀왔다.
이 남자, 잭은 사랑을 얻기 위해 자신을 내줄 줄 아는 정직한 사람이다.
오히려 가벼워보이고, 한탕을 노리고, 붙박혀 있지 못할 방랑벽이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어가고자 제일 소중한 하나를 위해,
다른 것들 쯤은 언제든지 내던질 줄 아는, 마음껏 사랑하고, 갈구하는,
사랑을 기만하지 않으려는 당당함쯤은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다.
이 남자는, 에니스 델마는, 과묵하다. 아직은 풋풋해보일만도 할 나이에도 노인의 눈을 가졌다.
늙수그레해 보이는 인상, 말투, 옷차림, 사고방식, 사랑법...
사랑해 달라고 호소하는 남자를 외면하고,
살을 섞고 함께 생명을 만들어낸 아내를 아프게 하면서,
자신의 행복 쯤은 언제나 챙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답답한 사람이다.
다른 여자를 만나 사랑...비슷한 감정으로 출발해, 생활과 책임과 후회로 만들어진 삶을 살다가,
그 때, 브로크백에서 누린 그 짧은 순간이 인생의 황금시간이라는 뒤늦은 깨달음.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면, 베트남전 징집을 피하기 위해 어디론가 숨어버리는 일보다 더 나쁜,
어느 한 순간 몰래 끌려가 개죽음을 당해도 너무나 당연한 일인... 그런 세상에,
남자가 남자를, 잭과 에니스가 계속 사랑할 수 있기란 세상이 허락하지도,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에게 완전한 나를 허락하지도 않았기에... 점점 파국을 부른다.
-난 게이가 아니야.
-그냥 없었던 일로 하자.
-다시 여기 올거야?
-그럼 나중에 보자.
산을 내려왔을 때, 누군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면, 후회로 가득할 인생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아니, 키스를 하고, 사랑을 하고, 주먹질을 하는 모든 것이,
자신들도 믿을 수 없는 생경한 경험인 탓에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듯,
상실해보지 않았다면, 다시 갈구하고, 그토록 약한 끈이나마 계속 붙잡아둘 수 없었겠지.
에니스가 잭의 트럭이 떠나는 것을 보고, 울음도 아닌, 쓴물도 아닌 것을,
보기에도 오장육부가 뒤틀리도록, 토해내려 애쓰는 것을 보고,
아... 저, 제대로 울지도 못하는 영혼아, 한번도 후련하게 감정을 토로해 본 적 없는 마초여...
에니스가 속 시원히 울어버리지 못했기에, 지켜보는 내가 미쳐버리지 않는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집에 와서 원작을 뒤진다.
[일 킬로미터도 채 못 가 에니스는 누군가가 내장을 손으로 한 번에 일 미터씩
끄집어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그는 길옆에 멈춰 섰다.
눈송이가 소용돌이치는 속에 토하려 들었으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여태 이렇게 기분이 더러웠던 적은 없었고, 다시 기운을 차리기까지도 한참이 걸렸다]
내가 본 것, 내가 느꼈던 것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내장을 끄집어내는 아픔... 잭을 보내버린 에니스가 느꼈고, 그런 에니스를 보는 내가 그랬다.
4년만에 재회한 그들이, 서로를 삼켜버릴 듯 키스했을 때,
아, 저것은 아름다운 일, 그럴듯 해 보이는 변명거리, 생활에 얼룩진 사랑의 한스러움...이 아니라,
살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의 문제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를 보내고, 최대한 나처럼 보이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번듯하게 사는 것.
너를 끌어안고, 어디가로 끌려가서 타이어레버를 이용해 타살되는 것.
두 가지 갈림길이 있다면,
잭은 그래도 장미빛 미래를 꾸려나가기 위한 위험천만한 도전을 택했을 것이고,
에니스는 누구하나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는 망설임으로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이들을 질식시켜 갔겠지.
뫼비우스의 띠처럼... 다시 브로크백의 시간을 되돌려 받는다해도,
서로를 온전히 가질 수 없을테지. 에니스는, 에니스 델마는 '고칠 수 없다면, 견디는' 남자니까.
이것이 마지막일 줄 아무도 몰랐겠지만,
일 년에 두 어번 만날 수 있었던 남자와 남자는, 사랑하는 시간을 보냈던 것이 아니라,
이대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누구도 먼저 입 밖에 낼 용기가 없어,
조금씩 조금씩, 브로크백의 기억을 연장시키며, 서로를 기만하고 있었을 뿐.
-우린 그 때 행복할 수 있었어. 망할,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지 생각해봐!
-나 모르는 곳에 가서, 나 모르는 일을 저지르고 다닌다면, 잭 망할 트위스트, 널 죽여버릴거야!
-날 죽이겠다고? 나는 너를 20년을 그리워해왔어.
네가 내게 주지 않는 것을 절실히 원했다고 해서 나를 죽이겠다고?
-네가 날... 날 이렇게 만들었어...
서로에 대한 목마름과 갈증으로, 지금까지 감춰왔을 뿐인 상처를 들추는 그 마지막 시간마저,
에니스는 마음껏 울 수도 없다.
큰 소리로 울부짖고, 잭을 피투성이가 되도록 때려 눕히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이 남자는 또 마음 껏 울지도 못한다. 그대로 무너져서는, 잭에게 안기지도 못하면서,
이보다 더 불행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울지도 못하는 이 남자는, 나를 또 절망에 빠뜨렸다.
브로크백에 묻히고 싶었다는 잭,
20년 전의 두 사람의 셔츠를 포개어 간직하고 있었던 잭,
에니스가 아니라면 누구도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잭,
잭을 잃고서야 잭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이 미련한 남자, 에니스.
남은 것이라고는 오로지 기억, 세상에 다시 없을 시간을 보냈던 브로크백의 추억 뿐인 남자.
에니스의 말대로 고칠 수 없다면 견뎌야 한다.
누구도 요구한 적 없고, 한 번도 해 본 것 없는 늦어도, 가장 뒤늦어버린 맹세를 하며.
"잭, 맹세컨대......"
<브로크백 마운틴>의 유명세 탓도 아니었고,
괜찮은 동성애 영화를 만났을 때의 정치성에 대한 올바른 성향을 견지하고 있는가에 대한
검증 때문도 아니다.
좋았다.
남자와 남자가 사랑하지만, 이 영화는 동성애 영화가 아니라, 그저 어쩌다 사랑한 것이,
우연히도 남자였더라...식으로 기만하고 있지도 않으며,
원작과 영화가 이토록 서로에게 찬사를 보낼 수 도 있구나... 내가 보는 것이 마법...이 아닌,
와이오밍, 애니 프루, 이안, 히스 레저, 제이크 질렌한, 컨츄리 송, 오리지널 스코어, 밥 딜런-
모두가 하나이며, 독립적인 몇 안되는 영화 중의 하나였다는 기분좋은 발견 때문에, 정말 좋았다.
내 앞좌석에서 영화를 본 외국인 두 사람,
잭이 엉터리로 부르는 찬송가 <물 위를 걷는 예수>를 들으며, 미친 듯이 웃더라.
우리가 죽었다 깨나도 이해못할... 정수를 이해하고 있는 그네들이 미치도록 부러웠다.
예전에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을 봤을 때,
내 옆에는 우연히도, 같은 학부의 서어서문학과 스페인 강사가 앉아있었다.
거기 나오는 클래식 넘버들을 제법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영화를 즐기던 그 외국인
(아니, 그 때만은 쿠바가 스페인과 화해하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음악은 위대했다!)이
영화 못지 않게 내게는 충격적이었는데, 부러웠다. 정말... 나도 큰 소리로 따라부르고 싶었다구!
(정작 나와 함께 영화를 봤던 선배에게 전화했더니,
"너랑 함께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을 본 것은 기억나는데, 그런 사람도 있었나?",
나만의 쓰잘 데 없는 기억일까?)
영화가 끝나고 당연히 엔딩롤이 올라가면서 흐르는 두 곡의 삽입곡.
원래 그 노래까지 다 들어야 영화를 제대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 아니었나?
본편이 끝나자마자 출입문을 열고 "안녕히 가세요(빨리 나가지 않고 뭘 꾸물대는 거야?)"포스를
내뿜는 극장 크루들...
당신들 탓에 별이 하나가 날아간다구!
그는 내 친구였네 나는 사슬을 하나 더 끊네
그는 내 친구였네 너에게 더 가까워지기 위해
그를 생각할 때마다 신은 사슬을 하나 더 엮네
울음을 참을 수가 없네 내가 부수지 못하게
그는 내 친구였으니까 :
오 신이여 제가 어떻게 아나요
그는 길에서 죽었지 오 신이여 제가 어떻게 아나요
그는 길에서 죽었지 오직 당신만이 좌우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항상 떠돌아다녔지 제 행복을
그는 뿌린 것을 거두지 못했어
그는 내 친구였네
면밀히 말해, 영화가 끝나고 나서의 2곡의 노래는 반칙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잊게 만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휘청휘청 했던 것은 애써 바람 탓으로 자위하게 했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이후, OST가 이렇게 나를 두들겨댄 것은 정말 드문 경험이었다.
에니스의 남루한 일상에 가끔씩 스며드는 잭의 꿈처럼...
고칠 수 없었기에, 내가 견뎌내야 하는 것들, 잠시 잊고 있었다.
---------- 2006년 03월 19일, [브로크백 마운틴] 개봉 끝무렵, 문차일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