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역사사랑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짧은 칼럼 형식의 글 안에 역사와 현생정치가 얼기설기 엮여있다. 만약 이덕일의 역사관에 호감을 갖고 있지 않은 독자라면 쉽게 읽히지 않을 수도 있다. 가장 대중적인 역사 연구가이면서, 베스트셀러를 창출해내는 네임밸류가 확고부동한 이덕일의 1일 언론 같은 느낌이 어느 때보다 짙게 묻어나는 책이 『이덕일의 역사사랑』이다.


    식자층이 자신을 바로 세우고, 세간과의 바른 소통의 장이 되어 준 것이 우리 가옥구조 가운데서 볼 수 있는 ‘사랑(舍廊)’이다. 그 사랑방에서 들려주는 쓴 소리 넘치는 직언들이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가 되어주기도 할 것이고, 때로는 필자의 주관이 객체를 넘어서는 중심의 호도를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전부 때늦은 현안들이라서 ‘지금’을 무색케 하는 지난날의 기록이라는 것에 어리둥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2005년, 2006년이라는 시간대가 간간히 등장하는 것을 보면, 어딘가에 연재했던 꼭지들의 모음 같으나, 아무런 안내가 없는 서문이 불친절하게 느껴진다. 이덕일의 사랑방에서는 여전히 아베 총리가 국경을 넘나들며 망언을 제조하고 있는 게 아니라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를 참배하고 있으며, 대권에 대한 점입가경 아전투구가 아닌 당정 간의 인사내정자를 둘러싼 진통이 여전히 1면을 장식하고 있는 중이다. 적어도 말미에 날짜라도 하나 달아주었다면, 2007년의 독자들의 갸우뚱한 기분이 조금은 누그러질 텐데.


    신문의 칼럼난에 딱 맞을 단문의 분량 안에 동북공정에 대한 대응책으로 민족주의 사관이 끊임없이 설파된다. 중국도 없고, 일본도 없는. 급진적인 기치들이 선뜻 솔깃하지 않은 이유는 보수적이고, 사대적인 역사교육의 희생자로서의 자세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학계와 발맞추어 나가지 못하는 교육계에 대한 한탄 탓이다. 이덕일의 지적대로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와 고조선의 건국연대는 완연한 모순인데도, 국사책의 서두 부분에 늘 고대로만 실려 있다. 불과 얼마 전에야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 분류를 천년을 앞당겨 기재하겠다는 발표가 아주 조용히 났던 기억이 난다. 2008년 교과서부터 개정한다고 하는데, 문제는 조그만 지면에 후다닥 실리고 말았던, 일각의 몇몇 단체들만이 쾌재를 부르는, 마치 ‘로비’의 결과물인양 비치는 것이 못마땅할 수밖에.


    중국의 <한서>나 일본의 <일본사기>의 기록들은 그네들의 한반도 침탈공세를 무너뜨릴 수 있는 귀한 사료가 되기도 하는데, 이 얘기인즉슨 뒤집어 해석하기에 따라 세 나라의 시각차를 더 벌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고대사의 기록이 극히 빈약하고, 선뜻 가보지 못한 곳에 몸을 누인 선조들의 유물들이 타국에 편입되어가는 것을 ‘손놓고’봐야하는 울분에 절로 목소리가 거칠어지려고도 한다. 여전히 사관 대 사관의 팽팽한 대립 안에서 민족주의의 발로만이 아닌, 객체화된 진실들을 바탕으로 이웃한 나라의 횡압에 휘둘리는 일을 지양하고 싶지만, 학계와 정부와 세간의 이인삼각 경주는 여전히 발이 맞지 않는 호흡의 부재를 보이는 것이 아쉽다.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쓴 소리들이 반갑다. 그리고 다른 학자들과의, 논객들과의 남다름과 되풀이함을 거듭 느꼈기에, 그 쓴 소리들을 ‘단 소리’로 바꾸는 것은 유보해두련다. 위정자로서의 민중 위에 군림하는 벼슬아치들의 말로와 당쟁의 와중에도 목민의 이념을 실천했던 현인들을 거울삼아, 역사 안에서 바른 길을 안내받는 좌표로 삼을 줄 아는 의연함이 우리가 사는 곳곳에 깃들기만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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