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스위트 홈
장정희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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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작품집'이라는 어감을 좋아한다. 참신한 시도와 발칙한 실험이 가득할 것 같은 설렘을 느끼며, 등단하지 몇 해 지나지 않은 작가가 풋풋한 감성을 가득 담아내었을 건만 같아서. 꼭 그럼 마음으로, 만나본 적 없는 작가의 첫 작품집을 골랐던 나는 몇 장을 채 넘기기도 전에, 멋대로 인상지었던 기대에 전복당하며 묵직한 소설적 무게에 휘청대고 만다. 장정희의 『홈, 스위트 홈』은 타이틀과 표지처럼 달콤하지도, 말랑하지도 않으며, 삶의 씁쓰레한 이면들에 대한 고독과, 상처로 얼룩진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도와 파산이 가족을 해체하고, 질병과 가난이 가족을 짐스럽게 만든다. 80년대의 K시(광주)의 소요와 혼돈이 배경으로 등장하는「스무살」에 비추어 아프고 고단했던 지난 세대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기보다, 좀체 경기회복을 체감할 수 없는 붕괴된 가정경제와 돌이킬 수 없는 가정파탄의 실상은 스무 해가 지났어도 여전히 진행형이기에 결코 낯설지가 않다. 그러한 가정사 안에서 발견되는 여성들은, 끔찍하리만치 변한 것도 없고, 회복 불가능한 일상을 묵묵히 감내하며, 단 한 번의 일탈에 모든 것을 내맡기려 하기도 한다.
 

가족이란 선택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선천적으로도 묶여있기 때문에, 애정이 애증으로 화하기 십상인 관계의 결정체이다. 가족부양을 위해 인적도 드문 주유소에서 기름내에 찌들어 사는 여자에게, 눈길에 발이 묶인 남자와의 하룻밤은 폭발적인 위안이이기도 하지만 곧 완벽한 단절로 이어진다(「주유소」). 병든 노모가 죽자 집을 팔고 지하의 단칸방에서 자유를 찾았다고 느끼는 등이 굽은 여자는, 집을 산 도회지의 남자(아내의 불륜에서 도피해 온)에게 끌려 몰래 드나들다 취중의 관계를 맺게 되지만, 다음날 여자를 맞은 것은 열쇠가 교체된 집이다(「봄 날」). 일생일대의 일탈은 왜곡된 소통의 결과일 뿐, 오히려 남은 삶을 더 지난하게 만드는 새롭게 예고된 고독과 상실의 재확인이다.
 

악다구니가 되어 아득바득 살아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 이들의 삶의 현장이 이다지도 불편한 이유는, 개인의 문제는 저마다의 특수한 사정이 있지만, 가정의 문제는 어딘가 모르게 닮은 구석이 많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학원에 출강하고 정당 활동에 힘을 쏟는 남부럽지 않은 지위의 남편으로 부러움을 사지만, 정작 성적인 문제를 겪는 아내는 채털리 부인과 닮은 충동적인 욕구에 시달린다(「푸르른 기억-앵무새」). 불륜으로 임신한 아내를 자신의 무정자증으로 인해 보내주고 신체모형을 만들어 파는 남자는, 죽은 애인(남장이 잘 어울렸던 여자)과 닮아 자신을 쫓았다는 여자가 원하는 은밀한 부위의 모형을 뜨도록 허락한다(「마이 트윈스」). 남모를 문제가 없는 가정이 어디 있을까마는, 곪아터진 상처는 쉽사리 아물지 않고 후유증을 남긴다.
 

이렇게 일관적으로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상처받고, 타인과의 소통에 심각한 문제를 겪는 이들을 그리는 작가의 감수성에 걱정마저 들었다. 격변의 80년대를 살았던 청춘일 때도, 지독한 스무 해를 보내고, 다시 스무 해 이상을 보냈지만 여전히 이름 모를 분노와 방황에 삶과의 화해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 같다는. 그가 한 데 모은 이 단편들은 작가의 절절한 자기성찰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유히 흘러가는 삶에 대한 도피가 아닌, 인정과 직시의 결과물이다. 이토록 무겁게 마음이 쓰이는 것은 달콤함과 상처가 공존하는 삶일지라도, 기쁨은 찰나, 고통은 영속처럼 느껴지는 체감의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하는 깨달음 때문인지도. 


질척이지 않는 가벼운 소통과 가족이 부재하는 일상의 판타지에 너그럽고, '쿨'한 관계에 열광하는 세대들에게 장정희의 소설집은 버거울 수도 있다. 낯선 작가와 발랄한 표제와 표지에 이끌려 우연찮게 조우했지만, 글자 하나에도 삶의 무게를 얹을 줄 아는 정공법을 구사하는 작가를 발견했다. 한 편 한 편 힘겹고 눈 돌리고 싶은 이야기의 연속이었지만 이다지도 큰 고통의 뒤에 연이어 더 큰 고난이 올 수도 있을지언정, 달콤한 인생이 곧 씁쓸함과 대면하고, 고통 뒤에는 언젠가는 분명 위안이 따른다는 것을 믿고 싶어진다. 기쁨과 고통은 샴쌍둥이처럼 한 몸에 깃든 두 개의 영혼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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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jhe 2010-03-09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정희입니다. 애정으로 깊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