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가면의 제국 - 오리엔탈리즘, 서구 중심의 역사를 넘어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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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처음 하얀 가면의 제국을 손에 들었을 때 박노자라는 러시아인이 한국의 역사를 어떻게 그렸을지 많은 호기심이 생겼다. 서양인의 눈으로 본 아시아, 그리고 한국은 어떤 모습인지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책장을 넘겼다. 하지만 박노자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답게 우리가 보지 못한 진실을 이야기 해주는 듯하다. 단순히 인종적 의미에서의 서양인의 눈으로 그린 아시아와 한국의 모습이었다면 박노자의 책은 그리 주목받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이것이 박노자의 책을 읽으며 첫 번째로 느낀 것이었다.
 
 사실 서구 문명에 대해 무조건 적으로 우러러 보는 인식에 대한 비판이 시작된 것은 오래 전부터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은 누구나 들어보았을 것이다. 비판적 문화수용이라는 말을 들은 지도 수년 전인 것 같다. 이제는 누구나 나이키나 아디다스 등의 브랜드를 달고 나오는 옷의 대부분이 인도나 동남아시아 등 3세계의 가난한 아이들이 착취당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매운동을 한다거나 목소리 높여 착취하는 쪽을 비판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는 것일까? 그런 당연한 인식과 행동이 특별한 케이스로 뉴스에서 대접을 받고 있다. 또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걸프전쟁 등 중동 관련 분쟁이 미국의 이권다툼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안다고 달라진 것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이 책을 읽으며 우리의 인식이 아직도 서구 중심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계속 읽어나가면서 그러한 인식의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책을 통해 미국은 그 어떤 정권보다 강대하고 방대한 선전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사실인 것처럼 알리고 진실을 은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놀라우리만큼 성공적이었다. 가장 주목을 한 것은 노벨상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나라가 갖는 콤플렉스 중 대표적인 것이 노벨상을 한 명도 수상하지 못한 것이다. 이웃나라 일본과도 많이 비교되면서 약점처럼 꼬리를 잡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을 보면 사람들이 노벨상에 대한 권위를 아무 생각없이 떠받드는 이유가 바로 미국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나 미국의 선전에 대한 영향력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난 세계 최고의 권위를 갖는 상에 대해서 맹목적으로 믿어왔다. 아카데미상, 노벨상, 그래미상, 퓰리처상 등 그 이유도 생각하지 않고 최고로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런 인식이 잘못된 것은 아닐 지라도 자신이 믿고 따르는 대상에 대해서 왜 그런지 정도는 명백하게 알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양심적인 일본학자 또는 지한파 외국인을 보면 무조건 반갑고 긍정적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몇 가지 오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불교가 서양에서 유행하는 것에 대한 좀더 사실적인 해석을 알 수 있었다. 최근에 우리 나라에도  불법수행을 하기 위해 찾아오는 외국인들도 많고 벽안의 스님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심지어는 벽안의 스님이 불교TV에 나와 우리말로 설법을 하기도 한다. 신기하기도 하고 불교라는 우리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외국인으로서 대단히 반갑고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교의 서양에서의 대중화를 무조건 적으로 반길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불교 변질과 변질된 불교의 역 전파의 우려까지도 있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물론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학술과 종교가 있을 수 없다는 박노자의 의견은 역사적인 전례들로 증명되었지만 상당수가 선을 정신분석이나 요가와 같은 범주의 개인 정신능력 개발기술 쯤으로 소비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정치적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의외였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잘못된 인식과 오해의 가면을 벗어 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면을 벗기 위해서는 매체를 통해서 전파되는 사실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할 것이다. 매체를 통해 전파되는 사실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사실이 생겨난 연유와 배경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에 대해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역사적 진실을 바로보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서구중심주의 사상을 깨뜨릴 필요가 있다.

얼마전 TV를 통해 남아프리카의 경우 전문 간호인력의 해외 유출로 인해 자국 병원에 인력이 없어 중환자들을 수용할 수 없다는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아마도 이러한 인재유출은 새로운 형태의 억압이나 착취가 아닐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해외 취업 또는 어학연수를 목적으로 외국으로 나가고 있다. 과연 해외로 가서 큰 돈을 써가며 얻어 돌아오는 것이 무엇일까? 물론 더욱 큰 가치를 가지고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지만 과연 경제적인 크기로만 생각해야 할까? 그런 식의 논리라면 잘 사는 서구는 무조건 옳다는 논리와 같지 않을까? 그런 맹목적인 인식하에서 이루어진 판단과 행동이라면 당연히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지켜보고 개선을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책에 나와있는 내용 중 알고 있던 내용도 있었다. 처음 박노자의 글을 읽는 입장에서 너무 완곡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사실이 드문 요즘 나머지 절반의 새로운 사실들만으로도 나에게는 충분하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무조건 박노자의 의견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가 제시한 여러 역사적 근거와 사실이 있지만 그의 생각대로 라면 이 책의 내용도 어느 정도 비판적인 시각아래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비판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가면을 벗는 것에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사실을 받아 들이며 자신의 의견과 행동에 맞는 생각의 뿌리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나서 역사를 바라 보았을 때 좀 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하얀가면을 벗자”는 박노자의 말에서 “하얀”이라는 말을 빼고 “가면을 벗자”고 말하고 싶다. 하얀 가면을 벗고 나서 나타날지 모르는 또 다른 가면을 예방하기 위해서 라도 그리고 우리 사회에는 하얀 가면이 아니라도 충분히 사람들을 맹목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갈 가면이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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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에서 찾은 서른의 성공 마흔의 지혜
김원중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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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이란 무엇일까? [자신의 가치관을 정립해서 성공 가능성을 확실히 다지는 것]이라고 책은 성공을 정의하여 물질적 성취라는 말과 동의어가 아니라고 하고 있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의 성공이란 것에는 필연적으로 물질적 부가 따르게 된다. 그리고 현대의 성공에는 어찌되었든 개인의 능력+알파의 그 무엇이 필요하다. 이처럼 과거에서 말하는 성공과 지금의 그것은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의 고전을 그대로 인용한다면 의미가 없을 것이고 나름의 재해석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지혜란 무엇일까? [자신의 주관을 확고히 가지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위해 남과 다른 시야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남과 다른 시야를 확보하는 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남을 이해시키는 호소력을 지닌 주관이다. 확고한 주관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나혼자 만의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 좋은 약이라도 쓸데가 없으면 무용지물이 되는 것과 같다. 더구나 현대는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지식의 확대재생산이 중요한 가치가 되고 있다. 결국 성공과 지혜의 의미는 이처럼 현재진행형으로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바라건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빨리 읽으려 하지 말고, 천천히 음미해가면서 뜯어가며 읽는 것이 좋을 듯하다.

덧붙여, 시기를 두고 반복해서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반추하면서, 생각하며 읽어야 할 것이다. 다행히 책 속에는 금과옥조가 될 수 있는 원석 같은 어구 들이 가득차 있다. 이 책을 읽는 과정을 굳이 빗대어 본다면 금광에서 원석을 캐어내는 과정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광부는 자신이 노력한 만큼 원석을 캐어낼 수 있다. 허리 한 번 더 굽히고, 땀 한 방울 더 흘리는 만큼 원석을 캐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급히 굴면 광산이 무너지고 말것이다. 그렇기에 세심한 주의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원석을 비로소 캐내었을 때, 원석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원석을 값진 보석으로 바꿀 수 있는 실천력과 결단이 필요하다. 또한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을까? 우리들 주변에 있는 성공이란 원석을 발견하고, 캐어내고, 그 원석을 나에게 가치있는 과정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오늘 하루도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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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그대 신을 벗어라>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여기서는 그대 신을 벗어라
임광명 지음 / 클리어마인드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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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은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하지만 국내 건축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은 많지 않다. 여행을 하거나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어딘가를 방문하면 싫어도 볼 수 밖에 없는 것이 건축물이며, 우리의 일상과 떼어 놓을 수 없는 의,식,주의 중요한 일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쉬운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렇게 국내 건축물에 대한 책이 나온 것은 반길 일이다.

우리는 해외여행을 가면, 그 나라의 도시의 모습, 그리고 건축물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그 예술성과 기술에 찬사를 보낸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나라가 예부터 건축기술에 남다른 조예가 깊었다는 것은 간과하고 있었던 듯하다. 세계 최고의 목조건물이 우리나라에 현존하고 있고, 세계최대의 목조건물 또한 우리나라에 있었으나 전란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그외 석탑이나 목탑 건물의 기술은 경이롭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석굴암의 기술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도시의 모습도 아름답다. 지금 우리가 흔히 보는 도시의 모습은 우리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의 개발정책으로 아무렇게나 개발되어지고 간편하고 저렴한 방식으로 마구잡이로 증축되어진 건축양식이 잔재로 남아 있어 도시의 미관을 해치고 있다. 얼마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하회마을 이나 경주양동마을은 외국인들이 극찬할 정도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앞으로 도시의 미관을 어떻게 가꾸고 회복시켜 한국적인 정취를 되찾고 현대와 조화시키느냐는 앞으로 우리들의 과제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종교 건축이란 의미를 넘어 우리에게 우리 건축물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킬 수 있다는 면에서 그 효용이 크다.

먼저 책은 제목에서 느낄 수 있는 것 같이 다양한 종교 건축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성당, 사원, 절 등 다양한 종파의 건축물을 엿볼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이처럼 다양한 종교의 건축양식이 존재함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은 일반적이고 개론적이라 할만하다. 후에 종교인들과 건축가가 함께 각 종파별로 건축물에 대한 보다 소상한 정보를 담은 책을 내 놓는다면 더욱 볼만할 것이다.

교회나 사찰 등 종교건축은 본질적으로 다른 건축과는 다르다. 거기에서는 거룩함과 세속적인 것, 영원함과 무상함이 서로 만난다. 신 혹은 절대자를 향한 예배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기쁨이나 슬픔, 고통과 환희 등 모든 인간적 관심사를 해소하는 안식의 공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영성이나 깨침과 같은 종교적 이상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면서 당대의 최고 지성과 고도의 기술이 속에 갈무리돼 있다.

종교건축 뿐만 아니라 종교의 발전은 예술고 문화의 발전과 그 시대를 함께 했다. 그만큼 종교건축 분야는 현대건축의 발판이라 할만큼 그 기술과 예술이 전형으로 발전하여 있다. 그렇기에 종교건축을 보노라면 그 종교의 특징과 건축물의 기술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재미가 있어서 좋다.

합판과 합판 사이에는 예배당 내에서 발생하는 여러 소리들을 공명시키거나 흡수하는 역할을 하는 세로로 긴 직선의 홈들이 나 있는데, 간헐적으로 그 홈들을 햇살 끌어들이는 창으로 활용해 놓았다. 합판과 홈, 채광창들이 어우러진 그 모습이 질서정연하면서도 마치 음표들이 악보 위에서 자유분방하게 춤추는 것처럼 묘하게 율동적이다.

종교건축물은 현대과학과 예술, 그리고 영성으로 충만한 종교의 만남이다. 일반적으로 상반되는 것으로 알려진 종교와 과학이 종교건축에 와서 하나가 되는 모습에서 종교와 과학은 오묘한 이치를 탄생시킨다. 어찌 보면 종교와 과학은 상반되는 것만이 아닌 상생할 수 도 있는 것이고 서로를 보완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 건축물이라는 말이 허투루 나온 것이 아님을 알겠다. 전문가들은 화려한 로마네스크에다 비잔틴 양식의 부드러움까지 갖췄다고 한다.

로마네스크 양식, 아랍의 모스크 등 이슬람 양식, 고딕양식, 비잔틴 양식, 그리고 다양한 불교 건축 양식 등 국내에서 이처럼 다양한 건축 양식을 모두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실로 볼거리가 가득하다. 건축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다양한 시대와 장소를 아우르는 건축물과 그 아름다움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다. 시간을 내어 건물들을 찾아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이국적인 풍모를 느낄 수도 있다.

둥그런 외형에 돔 형식으로 불룩한 지붕이 꼭 비행접시처럼 보인다. 산속에 전통 한옥 형태로 지어진 절만 보아온 아이에게는 도심 주택가에 자리 잡은 색다른 형태의 사찰이 기이하게 느껴졌나 보다.

종교건축의 변화를 엿볼 수도 있다. 어쩌면 가장 변화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종교이기도 하지만 종교건축의 모습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현대적 건축과 실험적인 건축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이 종교건축물이다. 종교적인 특징을 잃지 않으면서 현대적인 모습과 어우러진 외관을 설계한다. 또한 현대적인 요구와 필요에 부흥하면서도 본래 종교적인 필요에도 부흥하도록 설계한다. 이처럼 현대화, 그리고 필요와 요구가 다양해지면서 건축에 필요한 기술 또한 진보하고 있다. 어쩌면 현대 건축이 지양하고 나아가야할 여러가지 실험의 장이 곧 종교건축의 현장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여기서는 그대 신을 벗어라 는 간략한 서두만 있을 뿐, 그 흔한 저자주나 에필로그가 없다. 그만큼 종교건축에 대한 서술에만 모든 전력을 다하고 있고 다른 설명이 필요없이 그 내용 자체만으로도 풍부한 이야기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책을 다 읽고서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다양한 건축물에 대해 더 상세하게 담지 못한 지면의 한계라 할만하다.  

덧붙여 여기서는 그대 신을 벗어라 는 중의적 의미를 지녔다고 하겠다. 신을 벗는 다는 것에서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경건함을 뜻하기도 하겠지만, 현대과학과 기술의 총아인 종교건축물을 앞에 두면 잠시 신에 대한 생각은 접어두어도 신성모독은 아니라 할 것이다. 종교건축이 가지는 오묘함과 흥미를 잘 표현한 제목이라 하겠다.
  
종교적 개념과 이해가 건축물에 어떻게 녹아들어 갔는지 이해하는데에 있어 종교에 대한 관심이 없더라도 그 재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고, 오히려 평소에 관심이 없었다면 그 과정에서 새로운 재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평소에 건축을 우리가 흔히 보는 건설업 정도로 생각했다면 이 책을 읽고나면 건축물을 보는 시각이 새롭게 열릴 것이다.

건축은 온갖 과학과 지성의 만남일 뿐만 아니라, 도시의 외관과 미관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요구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다양한 요구를 만족시켜주는 인간에게 필요한 기본생활요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건축에 대해 가지는 의식은 그에 많이 미치지 못한다. 건축이란 짓는 것에 그치는 것도 아니고, 짓는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다. 주위에서 볼 수 있는 건축현장 혹은 건물에 때론 탄성하기도 하고 때론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스윗트 홈을 그려보고는 했을 것이다. 이제부터 스윗트 홈 뿐만 아니라 주변의 건축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 세계적으로 디자인의 중요성이 관심을 받으며 서울이 디자인 도시로 선정되는 등 그 노력이 한창이지만 일반 시민들의 관심이 없다면 실효를 보기 어려울 것이다. 아마 작은 관심들이 모인다면, 우리 도시-우리나라의 외관을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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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시간에 잠기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피렌체, 시간에 잠기다 - 한 인문주의자의 피렌체 역사.문화 기행 깊은 여행 시리즈 2
고형욱 지음 / 사월의책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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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피렌체. 이름만 들어서는 익숙하지 않다. '이탈리아'라는 나라에 대해서 너무도 무지하다. 안정환이 뛰었던 페루자 정도가 생각날 뿐이다. 그러고 보니 난 이상하게도 이탈리아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더욱 기대가 되기도 했다. 마치 처음가는 여행지에 발을 내딛는 것 처럼, 인문학자의 시선으로 본 피렌체라는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었다. 이 책은 내가 관심있게 바라본 첫 번째, 이탈리아가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피렌체에는 인문학자도 없었고 설레이는 가슴으로 피렌체를 바라보는 여행자만 있었다. 인문학자의 시선과 함께 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여행자의 시선과도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있었을까? 인문학자의 시선이란 것이 유명한 장소들과 그에 관련된 지식들을 나열하는 것에 그친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실망이다. 어쩌면 인문주의자라고 하지만 그보다는 관광객에 가까운 시선으로 피렌체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필연적인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인문주의적 해석이면 그쪽 방향으로 여행에 무게를 둔다면 여행으로, 한방향에 무게를 실었다면 좋았을 듯하다.

여행지를 소개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재미있고 흥미있게 서술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마음먹고 만든 여행가이드도 아니고, 그것이 여행수필도 아닌 인문학적으로 도시를 그려낸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 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후에 정말 비슷한 주제를 가진 재밌는 책들의 공통점이라면 모두 각자 독특한 시선과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은 책속에서 지식 이상의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고 그속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깊이를 느끼고 만족을 하는 것이다.

저자의 약력을 보면 해외여행만 20여년, 그리고 파리만 50여 차례를 방문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면 무어랴, 한 인문주의자의 피렌체 역사, 문화기행을 여는 시작, 그리고 가장 인상깊은 순간이 겨울 어느날 일본관광객과 함께 보티첼리의 비너스를 본 기억이라면, 누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동인이 어렸을 적 잡지에서 본 만화 속 비너스 때문이라면? 인문학자다운 시선과 안목을 기대했지만 대부분 사담에 가까운 여행담과 인문주의자의 지식의 나열에 그치고 있는 듯하다. 여느 작가라면 해외여행을 많이 다닌 것과 글의 깊이, 그리고 여행의 깊이는 상관이 없다고 해도 될 것이다. 어떨땐 한번 본, 찰나의 순간이 영원보다 깊은 감명을 줄 수 도 있고, 잠깐의 순간이 영원보다 아름다운 작품을 탄생하게 하기도 하는 것이다.

저자의 여행담과 도시를 거니는 서정적인 이야기가 각 에피소드의 후반을 이루는 예술━역사적 현장에 대한 서술과 동 떨어지는 듯한 느낌은 마치 한 권의 책에서 두 가지 종류의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마도 피렌체를 직접 방문한 적도 없고, 유럽을 수십여 차례 방문한 적이 없는 나로서는 저자의 경험을 쫓아 가기 힘들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하고 싶기도 하지만 그러기에는 서두가 지나쳤던 면이 없지 않다. 아니면 이 책의 포인트를 전혀 넘겨짚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시작부터 너무 설레발을 친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참고로 이 책은 내가 익히 생각하던 그런 여행책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일까?

피렌체를 무대로 한 소설이나 영화들은 많다. 그러나 실망감을 느낀 적이 많다. 도시가 지나치게 미화되거나 왜곡되기 때문이다. 글이나 영상은 피렌체를 그려내지만 정작 그 안에 피렌체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를 본다. 외며만 피상적으로 그려낼 때의 한계를 느낀다.
     - 피렌체, 시간에 잠기다 중에서 -

기대가 컸던 때문일까? 과연 이 책을 읽고도 피렌체가 어떤 도시인지 내가 가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노릇인 것 같다.. 그래 언젠가 나도 가보아야 겠다. 십수번은 아니라도 한번일 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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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운 2010-09-18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렌체를 보지 아니하고도 이런 짐작의 리뷰를 하셨다니, 그 혜안에 박수를 보냅니다
저는 피렌체를 보았으니, 그리고 파리를 나름의 눈으로 보았으니, 이 책들의 저자가 얼마나 가벼운 자기식의 논리에 빠져 허우적대는지 더더욱 실감했답니다
 
<이야기 그림이야기>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이야기 그림 이야기 - 옛그림의 인문학적 독법
이종수 지음 / 돌베개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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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식이라고 할까, 그림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나에게는 그림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안목과 지혜를 준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5년전 프랑스 파리와 영국 런던을 일주일 여간 방문했던 시기가 있다. 물론 두 고장다 예술의 도시라고 부를 만큼 수많은 역사적 건축물과 예술품이 가득한 곳이다. 박물관은 방문했지만 미술관은 하나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만큼 그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 아닌 아예 편식을 했던 터다.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특이하게 책은 좋아한다. 그래서 이렇게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그림을 만나게 된 것, 이 것이 나의 편식을 고쳐줄 수 있을까? 라는 것이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개인적인 관심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면, 긍정적인 결과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림을 보는 눈이라고 하면 나는 맹물이라고 할 것이다. 잘 그렸다, 못 그렸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판가름할 수준이 못된다. 그렇다고 고명한 예술가들의 이름을 외우거나 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이런 것들 외에도 그림에서 '무언가' 재미나고, '무언가' 쓸모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두루마리 그림인 권, 걸어놓고 보는 그림인 축, 벽처럼 길게 세워놓고 보는 병풍, 그리고 삽화 등으로 그림의 형식에 따라 구분하였다. 아마 흔히 시대별이나 작가별로 구분하지 않은 이유는 소재가 되는 그림들이 이야기를 기본 텍스트로 하고 있고, 위 네가지 형식에 따라 그 이야기를 풀어 화폭에 담는 방법에 그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런 부분이 재미있다. 이야기 그림은 분명 그림인데, 그 속에서 텍스트를 읽어 낼 수 있다. 그림과 그림 사이, 그림과 그림을 보는 사람 사이에 이야기와 대화가 있다.

아마도 내가 그림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이런 부분을 간과했기 때문이 아닐까? 결국 그림도 책과 같은 과정을 통해서 탄생하는 것인지도.. 작가가 글을 쓰며 글 속에 자신의 생각을 적어 나가듯이, 화가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이미지를 반영해 나간다. 초현실주의 화가나 상징주의 화가들의 그림도 그런 맥락에서 보면 이해가 쉽게 갈 듯하다. 그림을 보며 이것은 누구의 그림이고, 이것은 어느 시대의 그림인지를 따지기 전에 그림 자체를 보고 '먼저' 감상한 뒤에 그림에 익숙해진 다음에 그에 대해 논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아마 그렇게 하면 그림을 보는 재미가 생기지 않을까?

물론 중국 그림을 소재로 선택한 이유라던가, 정선, 김홍도와 신윤복 같은 조선시대의 뛰어난 이야기 그림 화가들이 있음에도 이들의 이야기가 자세히 소개 되지 않은 부분은 아쉬움이다. 그리고 한국적 소재로 중국의 그림을 독특한 우리만의 그림으로 재탄생 시킨 이들의 예술을 간과하고 지나간 면이 없지않아 보이나, 역시나 내 식견이 부족해서 그렇게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앞으로 그림과 그림에 대한 책을 만나도 편식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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