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소가 되고 싶다 - 민족화합을 향한 통일시론
이원섭 지음 / 필맥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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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겨레 논설위원인 이원섭이 그간 쓴 글들을 모은 거다. 92년에 쓴 것부터 최근 것까지 수많은 칼럼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당시의 글들이 지금도 유효한 면이 있긴 하지만, 시의성이 너무 떨어져 맥이 빠지는 글도 상당수 있다. 479쪽이나 되는 두꺼운 책으로 내는 대신, 뺄 부분은 과감히 빼고 책을 냈으면 지루함이 덜했을 것같고, 표지도 음울한 회색빛 대신 소 사진을 실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가치를 폄하할 필요는 없다. 남북관계에 있어서 알아주는 논객답게 그의 글들은 당시 국제정세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으며, 책 구절구절마다 통일에 대한 그의 열망이 물씬 느껴진다. 또한 그의 칼럼들을 읽으면서 남북관계가 어떤 가시밭길을 걸어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책에서 특히 새겨들을 만한 말들이다.
-한국과 미국이 계속 첨단무기를 늘려가면서 북한에 대해 재래식 군사무기 감축과 후방배치를 요구하는 것은 억지스런 주장이다(76쪽)
-남북이 자주적으로 문제를 풀지 못할 때 외세의 개입은 필연적이며 냉전세력의 목소리가 커진다는 엄연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120쪽)
-객관적 정보의 부족이나 인식의 차이로 편향성을 띠는 사람도 있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의도적으로 냉전적 시각을 퍼뜨리는 세력이 우리 사회에 있다는 것이다(144쪽)

이 책의 서문을 쓴 김학준은 '김일성과 김정일 정권에 대한 분노의 표시가 저의 기대에 미치지 않는 점이 아쉽습니다'라고 했지만, 이 책에는 북한에 대한 비판이 상당부분 포함되어 있다. 나에게는, 북한을 욕해야 한다는 김학준의 강박관념이 오히려 안타깝다. 우리 사회의 언로를 장악한 보수언론들이 원없이 북한 때리기를 해온, 그래서 국민들로 하여금 왜곡된 인식을 갖게 했던 과거를 생각해본다면, 균형잡힌 시각이 필요한 쪽은 오히려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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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인명사전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세계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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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의 책을 몇권 읽어 봤지만, '재미'라는 면에서만 보면 이 <로베르 인명사전>이 가장 낫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이 책이 대단히 훌륭하다, 이런 건 아니다. 흥미진진하고 주인공이 뭔가 큰일을 해낼 것같은 초반부에 비하면 결말은 너무도 맥이 빠지는데, 도대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게 뭔지 도무지 이해가 안간다. 그밖에 느낀점을 몇개만 써본다.

1) 노통은 쓰는 소설마다 '작가 자신의 얘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책 뒤에 나온, 강렬한 눈빛을 가진 노통의 사진을 보니까 소설에서처럼 그녀의 어릴적 꿈이 발레리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매력적인 그녀의 눈은 소설에서 강조되는 '발레리나의 눈'인 것 같다.

2) 책에 나오는 사람 중 정상적인 사람은 거의 없어 보인다. 하나같이 이상한 행동을 천연덕스럽게 해, 꼭 '사이코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었다.

3) 공주병에 대한 노통의 생각은 이렇다.
'...자신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한다고 해서 누구한테 해가 된단 말인가? 오히려 그들은...서글픈 상황에 처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는 셈이 아닌가?(38쪽)'
나 역시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 사회에서 공주병이 웃음거리가 되는 원인은, 구성원들 모두가 자기 비하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자기를 존중하는 방법을 배운다면 인생은 훨씬 더 아름다울 수 있을텐데.

4) 우정에 대한 말, '아이들에게 있어서 친구란 자신을 선택한 존재다....아이들에게 우정은 최고의 호사다(60쪽)' 이 말은 어른에게도, 아니 어른이 될수록 더 절실히 느껴진다. 친구를 소중히 여기자.

5) 소설마다 나오는 노통의 남성 비하는 여전하다.
'평생에 걸쳐 남자들이란 남들 앞에서는 큰소리로 헐뜯어대는 이야기를 혼자 수음을 할 때면 떠올리는 족속이 아닌가(88쪽)'

6) 사랑에 대한 견해, '만약 마티외가 그런 제안을 했다면 플렉트뢰드(주인공)는 인생의 7년을 헛되이 보내지 않을 수 있었으리라(100쪽)'
그러니까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지레 짐작하고 포기하는 일은 어리석다. 당장은 망신을 당할지라도, 밑져야 본전이다. 사랑하는 이가 옆에 있다면 과감하게 고백하라.

7) '그녀(어머니)는 플렉트뢰드를 통해 그 야망을 대리만족시키고 있었다(131쪽)'
어머니가 자식을 통해 인생을 보상받으려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아무리 정을 줘도 자식은 자식, 자신의 인생은 스스로 가꾸자.

결론: 난 175페이지에 글자도 큰 이 책을 한시간 남짓만에 읽었다. 그 짧은 즐거움을 위해 쓰기엔 7천원은 너무 비싼 게 아닐까? 나야 노통의 팬이고, 알라딘에서 할인받아 책을 샀으니 기꺼이 감수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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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블리 본즈
앨리스 세볼드 지음, 공경희 옮김 / 북앳북스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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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사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문학으로도 엔터테인먼트로도 완벽한 소설이다'는 뉴욕 타임스의 찬사 때문만은 아니었다. 14세 소녀가 성폭행 후 살해된 얘기를, 역시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는 저자가 어떻게 풀어나갈까 하는 점이 못내 궁금했다. 책 초반부에서 난 범인이 언제, 어떻게 잡힐까에만 관심을 두었지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폭행범으로부터 딸, 언니, 누나를 잃어버린 한 가족의 얘기였다. 그들의 고통이 너무도 사실적으로 그려져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사형 등 국가가 행하는 형벌체계를 못마땅해하는 나지만, 유아 성폭행범만큼은 특단의 조치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순간적인 실수가 아닌, 일종의 정신병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열살도 안된 여자애한테 성욕을 느끼는 게 정상인가. 성인이 된 이후의 성폭행도 피해자에겐 씻을 수 없는 고통이지만, 어릴 때 겪은 성폭행은 더더욱 큰 정신적 피해를 가져온다. 9세 때 당한 성폭행으로 괴로워하다가 21년 후 가해자를 살해했던, 그리고 '나는 짐승을 죽였다'고 외쳤던 김부남 씨의 경우가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폭력에 대해 우리 사회는 너무나 관대하다. 유아 성추행자들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에 대해 '인권침해'라는 반발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말하는 '인권'은 오직 가해자만의 것이며, 그로 인해 고통을 받을 피해자의 인권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걔중에는 '신상공개가 유아 성폭력을 경감시키지 못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일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메간법(Megan's law)을 통과시킨 미국처럼, 제대로 된 신상공개만이 유아 성폭력을 줄일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성폭력으로 피해를 본 가족들의 얘기가 주를 이루지만, 소설의 전개가 워낙 사실적이고 탁월해, 시종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내가 감동을 받았던 대목을 소개한다.

[녀석(이번에 죽은 개, 할리데이)이 천국에서도 내(주인공, 성폭력으로 죽은 소녀) 곁에서 잠을 잘지 조바심이 났다. 하지만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할리데이는 날 보자 행복해하면서 달려들었다(277쪽)]

나 역시 개를 십오년째 기르고 있는데, 개들의 충성심으로 미루어 볼 때 전혀 허황된 얘기는 아닐 것 같다. 이 책, <러블리 본즈>는 성폭력의 왕국인 우리나라에서 널리 읽혀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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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Box 2021-11-26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폭행 아픔 글로 써 세계적 작가 됐는데..그가 지목한 범인은 40년만에 무죄 선고, 그래도 사과는 없었다 | 다음뉴스 https://news.v.daum.net/v/20211126001102241?x_trkm=t
 
인물과 사상 28 - 이류 청산 이류 개혁
강준만.고종석.김진석 지음 / 개마고원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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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인물과 사상> 시리즈가 변신한 뒤 두번째로 나온 책이다. 강준만 교수가 대부분의 원고를 쓰던 시절에는 가끔씩 지겨운 느낌이 있긴 했지만 글의 수준이 어느정도 이상이 된 반면, 집필자가 다양해진 이번 책은 지루한 맛은 덜해도 가끔씩 맥이 빠지는 글이 있다는 게 아쉽긴 하다. 전반부를 읽을 때는 그래서 시큰둥했지만, 홍윤기.정혜신.강준만.고종석 등이 집필한 후반부는 어찌나 재미있던지, 새벽이 오는지도 모르게 책장을 넘겼다.

테러에 대해 고찰한 홍윤기님의 글은 오클라호마 연방청사 폭파범 맥베이가 내가 생각해왔던 것처럼 '한순간 돌아서' 테러를 저지른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 줬다. 모든 테러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우리가 납득하든 납득하지 못하든간에 말이다. <남자 vs 남자>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던 정신과 의사 정혜신님은 한가지 주제로 거기 걸맞는 짝을 찾아내는 혜안을 갖고 있는데, 이번 글에서는 '소통'을 가지고 정몽준과 이창동의 삶을 조명한다.

고종석님은 복거일이 최근 책으로 낸 친일파 변명문-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의 비논리성과 허구성을 날카롭게 분석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모순된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설파한다. 한 나라의 존립에 있어서 자긍심도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믿는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었으면 좋겠다. 많은 이들이 읽을 수 있다면, 허접한 논리로 친일파와 일제시대를 비호해놓은 복거일의 책에 '복거일을 다시 보게 한 명저'라느니' 한국인이면 놓쳐서는 안될 책'이라는 따위의 감상문을 올리는 사람이 줄어들 테니까 말이다.

언제나 나에게 깨우침을 주는 <인물과 사상> 시리즈, 내년 1월께 나올 29권을 기다느라 올 연말은 지루하게 보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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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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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린 소설들이 주는 느낌은 '쿨'하다는 거다. '쿨'하다 하면 <동물원xx>를 쓴 배모 작가와 <하치의..>를 쓴 요시모토 바나나가 먼저 떠오르지만, 그들의 작품이 '쿨'하기만 할 뿐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는 데 비해, 정이현이 쓴 이 책의 소설들은 재미 면에서도 아주 탁월하다. 내면으로 침잠하기만 하는, 그래서 우울한 분위기만 드리우는 90년대 여성작가들에게 식상해서 그런지, 이 책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여성들은 하나같이 살아 숨쉬는 듯 신선한 느낌이다. 멋진 이야기꾼이 한명 탄생했다고 생각해도 될 듯 싶다.

대부분 재미가 있었지만, [이십세기 모던 걸]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을사조약 시절, 화류계 여인의 딸로 태어난 김연실은 동경 유학 도중 자기에게 일방적으로 구애를 하던 맹호덕이란 놈에게 몸을 빼앗길 뻔한다. 사타구니를 발로 차고 겨우 빠져나온 연실은 우연히 만난 친구를 통해 자신을 둘러싼 소문을 듣는다. 소문의 진원지가 된 건 유학생끼리 돌려가며 보는 동인지였는데, 거기에 적힌 내용은 이랬다.

[...청년유학생들을 유혹하여 음행을 저지른다는 소문이 자자한 바, 이를 확인한 결과... 느닷없이 모 군의 품에 안기어 애정을 구걸할 제...모 군이 굳은 의지로 이를 거절하고 타이르려 하였으나 김연실 양이 막무가내로 몸을 던져 ....정조를 허용당하고야 말았다...]

후후, 이게 어디 옛날 일인가? 여군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한 장군이 막상 고발을 당하자 상대를 정신이상으로 몰거나, 개그우먼을 야구방망이로 때린 용감한 남편이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고 소문을 내는, 그리고 그게 정당화되는 우리 사회, 성폭행을 당한 여인은 죄인이 되고 저지른 놈은 오히려 활개를 치는 이 사회는 수많은 김연실을 잉태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럼에도 남자들은 여성들이 '성형수술(17%), 제왕절개(39.6%), 여성흡연량(24.8) 각각 세계 1위, 전업주부율(58%), 낙태율도 세계1위'이므로 '대한민국은 여자가 살기 좋은 나라'라는 글을 인터넷에 유포시키며 '역차별'을 소리높여 외친다.

아니, 제왕절개와 낙태가 많은 게 여자 탓인가? 성형수술이 많은 건 여성을 외모로만 따지는 남자들의 가치관 때문이 아니고? 여성이 일자리가 없는 게, 그래서 전업주부율이 높은 게 '여자가 살기좋은' 증거라고? 언제나 느끼지만, 무식에는 끝이 없다. 그 무식한 남성들이 사회의 권력을 쥐고 있는 한, 김연실은 계속 생기기 마련이다. 지금 이순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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