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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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린 소설들이 주는 느낌은 '쿨'하다는 거다. '쿨'하다 하면 <동물원xx>를 쓴 배모 작가와 <하치의..>를 쓴 요시모토 바나나가 먼저 떠오르지만, 그들의 작품이 '쿨'하기만 할 뿐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는 데 비해, 정이현이 쓴 이 책의 소설들은 재미 면에서도 아주 탁월하다. 내면으로 침잠하기만 하는, 그래서 우울한 분위기만 드리우는 90년대 여성작가들에게 식상해서 그런지, 이 책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여성들은 하나같이 살아 숨쉬는 듯 신선한 느낌이다. 멋진 이야기꾼이 한명 탄생했다고 생각해도 될 듯 싶다.

대부분 재미가 있었지만, [이십세기 모던 걸]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을사조약 시절, 화류계 여인의 딸로 태어난 김연실은 동경 유학 도중 자기에게 일방적으로 구애를 하던 맹호덕이란 놈에게 몸을 빼앗길 뻔한다. 사타구니를 발로 차고 겨우 빠져나온 연실은 우연히 만난 친구를 통해 자신을 둘러싼 소문을 듣는다. 소문의 진원지가 된 건 유학생끼리 돌려가며 보는 동인지였는데, 거기에 적힌 내용은 이랬다.

[...청년유학생들을 유혹하여 음행을 저지른다는 소문이 자자한 바, 이를 확인한 결과... 느닷없이 모 군의 품에 안기어 애정을 구걸할 제...모 군이 굳은 의지로 이를 거절하고 타이르려 하였으나 김연실 양이 막무가내로 몸을 던져 ....정조를 허용당하고야 말았다...]

후후, 이게 어디 옛날 일인가? 여군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한 장군이 막상 고발을 당하자 상대를 정신이상으로 몰거나, 개그우먼을 야구방망이로 때린 용감한 남편이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고 소문을 내는, 그리고 그게 정당화되는 우리 사회, 성폭행을 당한 여인은 죄인이 되고 저지른 놈은 오히려 활개를 치는 이 사회는 수많은 김연실을 잉태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럼에도 남자들은 여성들이 '성형수술(17%), 제왕절개(39.6%), 여성흡연량(24.8) 각각 세계 1위, 전업주부율(58%), 낙태율도 세계1위'이므로 '대한민국은 여자가 살기 좋은 나라'라는 글을 인터넷에 유포시키며 '역차별'을 소리높여 외친다.

아니, 제왕절개와 낙태가 많은 게 여자 탓인가? 성형수술이 많은 건 여성을 외모로만 따지는 남자들의 가치관 때문이 아니고? 여성이 일자리가 없는 게, 그래서 전업주부율이 높은 게 '여자가 살기좋은' 증거라고? 언제나 느끼지만, 무식에는 끝이 없다. 그 무식한 남성들이 사회의 권력을 쥐고 있는 한, 김연실은 계속 생기기 마련이다. 지금 이순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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