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걸 보내주면 어마어마한 선물을 답례로 보내주는

보기드문 지인에게 내가 쓴 새 책을 보냈다.

아니나다를까, 그로부터 며칠 후 택배가 왔는데

여러가지 선물 중 하나가 스티로플 박스에 들어있는 굴이었다.

물론 난 굴을 좋아한다.

석사와 박사논문 주제가 굴에서 나온 기생충이기도 했고 (여러분, 양식굴엔 기생충 없습니다! 걱정마세요)

먹는 것도 아주 즐긴다.

그런 나와 달리 아내는 그 많은 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거 일일이 껍질 다 까서 손질해야 하거든. 보관할 만한 장소도 없고 내일 해야 하는데,

너 출근하면 나 혼자 어떻게 해?"

고민하던 아내는 몇 군데 전화를 돌렸고,

아파트 사람과 전에 알던 피아노선생 등 온갖 인맥을 동원해 그 굴을 나눠줬다.


다음날 어머니와 통화를 하면서 이 얘기를 했다.

"글쎄 굴이 들어와서 어쩌고 저쩌고."

어머니는 멀리서 발을 동동 구르셨다.

"아이고, 나 주면 좋았는데."

이럴 수가. 어머니가 굴을 좋아하시나?

어머니: 그럼, 나 굴 너무너무 좋아해. 나 줬으면 좋은데.

나: 그거, 껍질 다 까야 하는데요?

어머니: 그게 무슨 상관이냐. 내가 굴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갑자기 죄송했다. 아, 어머니가 굴을 이렇게 좋아하시는데 난 몰랐구나. 이런 불효자 자식 같으니.

하지만 집에 있는 굴을 보내드리기 어려운 것이

택배가 배달되는 이틀간 그 굴이 상할 수도 있어서였다.

그래서 난 인터넷에서 찾은 업체에 전화를 걸었고,

깐 굴 4인분(4만원)과 안깐 굴 10킬로 (2만원)를 주문했다.

굴이 다음날 온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는 소녀처럼 웃으셨다.

그리고 어젯밤, 본가 근처에서 일이 끝났기에 잠시 어머니 댁에 들렀다.

어머니는 매우 힘든 표정이었다.

나: 어머니, 굴 잘 드셨어요?

어머니: 말도 마라. 그것 때문에 아주 죽을 뻔했다.

나: 네???


사정은 이랬다.

굴 10킬로를 본 어머니는 그 개수에 충격을 받았고, 이걸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국 본가 근처에 사는 만만한 제수씨와 조금 멀리 사는 누나를 불렀다.

세시간 가까이 그들은 굴을 까고, 씻고, 양념했다.

어머니는 이 일을 자초하신 분이니 그렇다치고, 누나야 어머니 딸이니 또 그렇다 치지만,

제수씨는 굴을 까는 내내 날 원망했으리라.


여기에 조금 더 보태자면, 내가 어머니 말씀에 너무 쉽게 넘어간 면도 있다.

1) TV에 해삼이 나왔을 때

엄마: 맛있겠다

나: 엄니, 해삼 좋아하세요?

엄마: 그럼, 나 해삼 너무너무너무 좋아해.

해삼 좋아하는 것도 모르는 이 불효자 아들 같으니! (이 얘기는 공저 <엄마 사랑해요>에 실렸다)

--> 해삼 사드림.


2) 어디 가서 게장 먹었다는 얘기 하니까

엄마: 게장 먹었냐. 장하다. 그거 정말 맛있지.

나: (괜히 찔려서) 엄마도 좋아하세요, 게장?

엄마: 그럼, 나 게장 너무너무 좋아해.

아, 난 불효자구나. 게장 좋아하는 것도 몰랐다니. ---> 게장 보냄


전복, 더덕, 언양불고기 등등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어머니는 인간이 먹는 거의 모든 음식을 "너무너무 좋아하셨다".

이런 면이 어머니를 건강하게 만들어줬고, 항암투병도 이겨낼 수 있게 한 비결이 아닐까 싶다.

더 이상 어머니가 뭘 좋아하신다는 말에 죄책감을 갖지 않기로 했다.

그냥 맛있는 게 있을 때 보내드리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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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한엄마 2017-12-23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그러게요.^^
긍정적인 면이 오늘날 교수님을 만든 건 아닌가 싶어요.

작년에 이어 올해 북플마니아 서재의 달인이 되었습니다.
교수님이 쓰신 ˝서민적 글쓰기˝를 읽고 시작한 알라딘 블로그 활동입니다.
사실 올해 기대 안 했는데 된 걸 보곤 갑자기 교수님 생각이 났어요.
참-감사한 분이다-이런 생각을 했어요.

올해 교수님 책 거의 다 샀어요.
˝서민적 독서˝ ˝서민 정치˝ b급 정치(?) 등등-이상하게 사 놓으면 읽질 않는 고질병 때문에 고이 모셔두고만 있네요.^^
내년에 슬슬 읽고 평을 남겨보겠습니다.즐거운 연말 보내세요!^^*


마태우스 2017-12-26 23:59   좋아요 1 | URL
와아...제 책을 다 사셨다니 이것 참 부끄럽습니다. 내년부턴 사지 마시고, 제 서재에 주소 남겨주세요. 제가 드릴게요. 근데 제 책 덕분에 알라딘 블로그를 시작하셨다니, 제가 으쓱해지네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stella.K 2017-12-24 09: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저 같으면 엄마는 먹지도 않으면서 욕심만 많다고
뭐라고 했을 것 같아요.
정말 연로해지시면 잘 못 드실까 봐 걱정되더라구요.
그래도 아직은 잘 드셔서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마태님도 어머니 드시겠다면 무조건 사 드리세요.
잘 드시고, 건강하시면 좋죠.^^

마태우스 2017-12-26 23:58   좋아요 1 | URL
네..어머니한테 받은 게 너무 많은지라 앞으로는 잘 하려고 합니다! 잘 드시는 게 건강의 지름길이죠!

moonnight 2017-12-25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비슷한 고민이셔서 막 웃었네요^^;;;


하여간에.. 서민 교수님 늘 응원하고 있습니다^^

마태우스 2017-12-26 23:57   좋아요 0 | URL
넷 응원에 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