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맛있는 황소곱창을 먹으러 가던 날, 곱창집 근처에 비디오가게가 있는 걸 발견했다. 우리 동네엔 이상하게 비디오가게가 없었는데, 마침 잘됐다 싶었다. 그리고나서 한번도 거기 가지 않았다. 그러다 오늘, 갑자기 그곳 생각이 났다. 일본에서 오래 사셔서 그곳에 대한 향수를 갖고 계신 할머니께 일본 영화를 보여드리자는 깜찍한 생각이. 하이드님에게 괜찮은 일본영화를 문의한 결과 <철도원>과 <비밀>을 추천받았고, 전자가 대여중이라-누구야 그걸 지금 보는 사람이?-<비밀>을 빌려왔다.


1. 닮음

영화를 보는 내내, 남자 주인공인 고바야시 가오루가 조폭마누라에 나왔던 남자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비슷하지 않나요?


이사람이 '비밀'에 나오는 남편이구

 


오른쪽에서 두번째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2. 효도는 힘들다

사실 난 전에 이 영화를 봤었다. 케이블에서 하기에 중간에 약 한시간 정도를 보다가 약속시간 때문에 나갔는데, 나중에 결말 부분을 들었기에 다본 거나 진배없었다. 그래서 안보고 간만에 글이나 쓰자, 이랬었는데 할머니가 심심하실까봐 그냥 눌러앉아 봤다. 내가 안본 부분은 의외로 많았고, 결말 역시 무미건조하게 말로 듣던 거랑은 많은 차이가 났으니 보길 잘한 거지만, 그래도 힘은 들었다. 왜? 우리 TV의 문제인지 음량이 그다지 크지가 않아, 할머니가 대사를 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으니까. 난 소곤소곤 하는 대사를 할머니께 불러줬고, 순간순간마다 상황을 할머니께 얘기해 드렸다.

“그러니까 아내의 귀신이 딸에게 씌운 거죠! 몸은 딸의 몸인데, 정신은 엄마예요!”

귀도 잘 안들리시고 이해력도 떨어지니 참으로 답답했다. 버스 사고 후 죽은 엄마의 영혼이 딸에게 빙의가 된 얘긴데, 할머니는 그걸 이해 못하시는 듯했다.

“왜 딸한테 여보라고 한다냐?”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진다. “저건 딸이 아니라 엄마라니깐요!”


스포일러 비슷하지만, 안타깝게도 영화 막판이 되면 주인공은 딸에서 엄마로, 엄마에서 딸로 변신한다. 영화에선 친절하게 자고 일어나면 바뀌는 걸로 설정을 했지만, 할머니는 그걸 잘 이해하지 못했다. 주인공이 딸이 되어 “아빠!”라고 하니까 우리 할머닌 이러신다.

“엥? 딸이 어디서 왔다냐? 그래도 용케 찾아왔구나!”

"그게 아니구요 엄마 귀신이 도망가서 다시 딸이 된 거예요“

할머니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정말 이해하신 건지 잘 모르겠다. 마지막에 나오는 반전 역시 할머니가 이해하기엔 너무도 난해한 게 아닐까. 영화가 끝나고 나자 마치 내가 고바야시가 되어 혼신의 연기를 펼친 것처럼 힘이 들었는데,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일본 이름들을 보신 할머니가 쐐기를 박는다.

“이거 일본 사람들이 만들었다냐?”


그래도 극장과 달리 내가 마음껏 소리지르며 가르쳐 드릴 수 있으니 좋다. 앞으로 그 비디오 가게를 자주 갈 것 같다. 그러고보면 지난번에 여동생과 벌인 ‘비디오대첩’에서 이기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혹시 좋은 일본 영화 있으면 소개 좀 해주세요!


3. 영화 속 상황에 대한 질문

정신은 아내지만 몸은 딸이 된 주인공, 의대에 들어가 대학생활의 낭만을 마음껏 즐긴다. 남편은 그런 아내를 질투하지만 아내는 그럴수록 남편에게 짜증만 난다. 여성분들게 문의드립니다. 결혼해서 십몇년을 살았는데 자신의 몸이 갑자기 10대 후반으로 바뀌어 버린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남편을 떠나는 쪽입니까, 아니면 남편 곁에서 평생을 살겠습니까? 내 생각인데 ‘떠난다’가 80% 이상 나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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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29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panda78 2005-09-29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남편인가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싶기도.. ^^;;
음.. 아무래도 비밀은 스토리가 약간 복잡하죠.. 뭐가 좋을까나.. 저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태님, 너무 착해요. 이뻐요. ㅋㅋ

겨울 2005-09-29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와 비디오를 그것도 비밀을 보시다니 감탄이 절로.... 저는 할머니와 드라마라도 볼라치면 동문서답은 기본이고 나중에는 버럭버럭 싸움이 다 납니다. 귀가 어두우시니 상황의 십분의 일도 이해를 못하시고 이상한 해석을 해서 나중에는 할머니가 개작하신 내용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할머니의 몸보다도 정신이 더 오래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저 경우 여자인 경우는 80% 남지만, 남자인 경우는 90% 떠나지 싶은데요.

마태우스 2005-09-29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분/우와... 그렇군요. 10대의 몸이 되어도 그렇다니 님의 부군은 행복한 분일 것 같습니다.
판다님/남편에 따라 다르단 말이죠. 근데 전 영화 속에서 딸의 몸을 한 아내에게 훨씬 더 공감을 했거든요. 저 같음 제가 도망가죠^^

마태우스 2005-09-29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울과몽상님/할머니가 개작하신 게 맞다고 하신다니 저희 할머니보다 조금 더 심하신데요^^ 정신이 더 중요하다는 걸 깯다게 됩니다. 님 말씀 듣고 2분의 투표결과를 보니 여자 분은 남고, 남자는 떠나는 것 같군요. 제가 너무 남성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여자도 떠날 거라고 했네요

panda78 2005-09-29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나이도 있으시고 하니,,,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이야기 같은 게 어떨까 싶기도 한데요. (일본 명작 컬렉션이라고, 오즈 야스지로와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 10dvd박스셋트가 있던데 29800원. 이건 어떨지? 구로자와 아키라가 별로라면 오즈 야스지로 박스 컬렉션도 있던데요. 9디비디 24900원.)

마태우스 2005-09-29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 판다님/저희집에 아직 dvd가 없습니다. 이참에 하나 살까요...

panda78 2005-09-29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렇군요! ^^;;;;; 그걸 간과했습니다;;;; 근데 제가 적은 건,,, 아마 dvd뿐일 거 같아요. ;; 비디오로 나와 있을지도 모르니, 한번 스토리라인 보시고 괜찮다 싶으신 거 찾아 보시면 어떨지.. 아.. ^^;; 당혹스럽구만요..
(비디오가 있을 것 같은 영화- 호타루.. 요건 어떨지..?)

마태우스 2005-09-29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VD가 점점 세를 불려가는 것 같아서 무섭습니다...

panda78 2005-09-29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dvd가 비디오에 비해 좋은 점이 많은지라.. ^^;; 저희 집엔 DVD플레이어 뿐이라 비디오는 못 보거든요..

2005-09-29 2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이드 2005-09-29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이 다시 딸의 몸으로 돌아온건 결코 아닌거지. 엄마가 그런척 한거지. 그러다가 나중에 남편이 아내가 일부러 그랬다는걸 아는거지.

BRINY 2005-09-30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고3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절대!

moonnight 2005-09-30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밀, 너무 재미있다는 얘길 듣고 봤는데 왠지 제겐 기대에 못미쳤던 영화였어요. ;; 괜히 찝찝하고 기분 안 좋았던 기억이.. ㅠㅠ;;

마태우스 2005-09-30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나이트님/잔잔한 감동을 느끼긴 하지만, '너무 재밌다' 수준은 솔직히 아니더이다^^
브리니님/그죠? 고3은 너무너무 싫죠. 졸업 후에도 고3이 된 꿈에 얼마나 시달렸는지요
하이드님/저도 알아요!!!!!!!
속삭이신 분/감사합니다^^ 어쩜 그렇게 해박하신가요. 그 갸냘픈 체구에 그리 많은 게 담기더이까...
판다님/DVD로 인한 차별이 21세기 차별의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죠

수퍼겜보이 2005-10-01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리 남편이 좋아도 딸의 몸으로는 좀 찝찝할 거 같아요 -_-
그나저나 할머니는 이해 여부를 떠나서, 자막 없이 일본영화감상이 가능한 바이링구얼이시겠죠? 호호.

예쁜토마토 2005-10-03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주로 몰드시죠? 마테님 글은 참 잼있어서 나 좋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