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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나의 에로틱 갤러리
이명옥 지음 / 해냄 / 2002년 10월
평점 :
품절
내가 참 재미있게 읽었던 <팜므 파탈>의 저자 이명옥의 책을 판다님으로부터 선물받아 읽었다. 결론은 역시 이명옥이라는 것. 저자는 유려한 필체로 미술 속에서 남녀간의 사랑이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설명해 주는데, 책에서 언급한 그림이 가끔식 실리지 않았다는 걸 제외하면 100점 만점을 줄만한 책이다.
어제, 맛있기로 유명한 신사동 <부산아구>(02-546-9947)에서 아구찜을 먹는데 엄청난 미녀가 신발을 신으러 나오는 걸 봤다. 나랑 내 친구들은 넋을 잃고 그녀를 쳐다봤는데, 아름다운 여자 앞에서는 아무리 맛있는 아구찜도 의미가 없다. 바람기가 무척이나 많았던 오귀스트 로댕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내가 지나치게 여자 생각을 많이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생각해 봐야 할 것 중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뭐가 더 있죠?”
제자 카미유 끌로델은 물론이고 이사도라 덩컨에게까지 마수를 뻗쳤던 그는 “자신이 사랑한 여인들의 육체를...더없이 관능적인 조각품으로 창조해 냈다”
예술가의 바람기가 정당화되기 시작한 게 로댕 탓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이 책을 보니 다른 예술가들도 만만치 않다. 루벤스는 쉰세살의 나이에 열일곱의 엘리나 푸르망과 재혼했고, 피카소는 “사랑하는 여인이 바뀔 때마다 그 여성으로부터 철저히 예술의 정수를 뽑아냈”다고 한다. 예술가가 다 그렇지 뭐, 하는 생각을 하려다 초현실주의 화가 달리의 얘기를 읽고 굉장히 놀랐다. 초현실주의가 전공이니 여자관계가 우주적으로 복잡할 것 같은데, 의외로 달리는 순정파였다. 스물다섯에 열 살 연상인 갈라를 보고 맛이 간 달리는 평생동안 갈라를 여신으로 숭배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는 “갈라에 대한 격정적인 사랑을 무한한 창조적 재능으로 전환시켜 미술사에 길이 남을 초현실주의 그림을 창작해 냈”는데, 그래서 그런지 달리는 “완성된 그림에 자신의 이름과 갈라의 이름을 나란히 사인”했다. 더 놀라운 점. 갈라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작품을 더 이상 만들지 못한 채 “산송장처럼 살”다가 갈라의 곁으로 갔다고 하는데, 심지어 이런 말도 했단다.
“아무도 갈라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
친구 아내를 사랑하게 된 뭉크가 자신의 심경을 담은 역작 <질투>를 그린 것처럼, 사랑이 예술에 영감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핑계를 대고 자신의 바람을 정당화시키는 예술가들이 한둘이 아닌 터에 달리같이 위대한 화가가 그토록 순정적인 사랑을 바쳤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다. 내가 갑자기 달리를 존경하게 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