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9시 반부터 오후 6시 반까지 학회가 있었다. 토요일날 오랜만에 공부를 하려니 싫었고, 그래서 유난히 더 지루했다. 일본 사람들과 같이 하는 거라 주 언어가 영어, 발음이 뻔하니 알아들을 수는 있지만 그러기가 싫었다. 하나 더 있다. 엊그제 뺀 사랑니 때문에 얼굴 한쪽이 완전히 부었고, 통증이 심해 타이레놀 ER을 때려 먹으면서 발표를 들었다.


약기운으로 인해 잠이 쏟아졌다. 커피나 마실까 하고 밖으로 나갔더니 많은 사람이 나와있다. 밖에 나가있는 사람의 유형은 다음과 같이 나뉜다

1형: 발표도 하고 열심히 들을 뿐 아니라 질문도 열심히 하는 사람

2형: 자기 발표만 하고 늘 밖에 있는 사람

3형: 발표는 안하지만 열심히 듣는 사람

4형: 발표도 안하고 듣지도 않는 사람


각 유형의 예를 소개한다.

1형; 내 지도교수

학회에서 질문을 가장 많이 하는 분이다. 논문도 많이 쓰고 발표도 열심히 한다. 하지만 이분은 커피 중독이다. 하루 열잔 이상 마시는 것 같은데, 커피가 없으면 안절부절 못하신다. 밖에 나갈 때마다 꼭 한번씩은 만날 수 있지만, 커피만 드시고 금새 들어가시는지라 밖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타입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2형: J 선생

내가 존경하는 분이다. 아주 열심히 하시고, 아는 것도 참 많다. 키고 크고 다리도 길며 성격 또한 화끈하다. 술을 아주아주 잘한다. 맹장수술 한 지 일주일만에 술을 마신 적도 있는데, 배가 아프다면서 계속 소주를 마시는 투혼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이분은 자기 발표할 때랑 관심 있는 주제가 안나오면 주로 밖에 계시다 (나오면 언제나 볼 수 있다). 이분과 떠들다가 “이만 들어가보겠다”고 하니까 당신은 “학교(고대) 투어나 하겠다”며 저쪽으로 걸어간다. 대단한 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3형: 나

발표를 안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난 학회 때는 정말 열심히 듣는다. 초록에 줄을 빡빡 그으면서, 그리고 토론 시간에 오간 질문과 답도 모두 적을 정도. 학회 때만 열심히 한다는 비판이 있지만, 그게 어디냐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어제 역시 오후에 한시간여를 논 걸 제외하면 학회 내내 충실히 들었고, 저녁 술자리에 불참하고 집으로 왔다. 뷔페였는데...아쉽다.


4형: 내 친구 P

어제 난 테니스를 치는 바람에 40분쯤 늦게 학회장에 갔다. 접수 받는 아가씨가 웃으면서 내게 “꼴등이세요!”라고 했는데, 이 친구는 그 뒤 30분을 더 있다가 왔다. 나처럼 학문에 별 뜻이 없어 보이며, 난 그래도 학회라도 가지만 이 친구는 학회도 잘 안온다. 하지만 술은 잘 마셔, 위에 언급한 J 선생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어제 학회가 끝난 뒤 저녁 모임에 가냐고 물어보니까 “그럼 가야지! 그것 때문에 왔는데”라고 말해 “역시!”란 감탄이 나오게 했음.


혼합형: 군대 친구 S

군대에서 만난 친군데, 제대 후 기생충학을 전공, 나와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학문에 대한 정열도 제법 있는 편이지만, 술을 마시면 아주 끝장을 본다. 학회를 듣긴 듣는데 꼭 들어야겠다는 마음은 없어 유혹에 약하며, 한번 나가면 안들어가는 스타일.

어제 오후, 초록집에 줄을 그으며 발표를 듣는데 이 친구가 문자를 보낸다.

S: 열심히 들으시네요

나: 아 뭐 보통이죠. 님도 본받으셔야죠. 근데 졸려 죽겠어요.

S: 저두요

나: 그럼 우리...밖에서 만날까요


S와 난 커피를 뽑아가지고-난 평소엔 커피 안먹는다. 잠 쫓을 때만...-벤치에 앉았다. 한참 얘기하는데 친구 P가 다가와서 셋이서 얘기를 했다. 주로 어떤 얘기를 했을까.

“왜 이렇게 안끝나냐. 지겨워 죽겠다”

이런 얘기를 한시간이 넘도록 했다. 정말 대단하지 않는가. 지겹다, 지겹다를 한시간 가량이나!


사람을 직업별로 따지면 공부하는 직업과 안하는 직업으로 구분할 수 있을거다. 교수는 당연히 공부하는 직업, 그래서 교수들은 다들 열심히 할 것 같지만, 그 안에서도 계층이 나눠진다. 떠드는 애를 제거하면 또 다른 애가 떠들듯이, 노는 교수를 다 몰아낸다고 해도 노는 교수는 또 생겨날 것이다. 엔트로피는 증가하는 방향으로 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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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6-05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혼합형.
근데, 공부안하는 직업은 어떤게 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안 떠오름.

balmas 2005-06-05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엔트로피는 증가하는 방향으로 가니까^^"에 추천 하나요~

토토랑 2005-06-05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천재 유교수의 생활 이란 만화의 한컷이 생각나네요 ^^;;
거기도 학회 참가 하는데,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나오거든요 ~

2005-06-05 2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검둥개 2005-06-06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수님들도 학회 중에 문자를 보내시는군요. ㅎㅎㅎ

클리오 2005-06-06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학회에 가서 점차 알아듣게 되면서, 집중력이 높아지게 되더라구요. 전에는 졸거나, 밖에서 커피 마시거나 했거든요.. 근데 뻔한 이야기가 반복되면 정말 싫어요...

진/우맘 2005-06-06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헐, 지루한 학회 중 벌어진 진/우맘과의 치열한 문자 설전은, 왜 쏙 빼시는 겁니까?
CP 낮고 엉덩이는 큰 마태님!!!!!!

마태우스 2005-06-07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아 맞다! 그걸 빼먹었네요. 음, 사실은 우리 관계가 알려지는 게 두려워 일부러 빼먹었습니다^^ 글구 저 요즘 엉덩이가 반쪽이 되었습니다
클리오님/집중력이 높아지다니 대단하십니다. 전 첫 학회 이후로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집니다
검정개님/나이드신 교수님들은 보낼 줄 몰라서 못보내는 거랍니다^^
토토랑님/아아 그렇습니까? 어디나 사람 사는 곳은 비슷한 법이죠
발마스님/과학적인 단어를 앞으로 꼭 집어넣어야겠어요^^ 추천 받게요
하이드님/공부 안하는 직업...........글쎄요.... 글고보니까 그러네요
따우님/4번은요, 발표할 거리를 일부러 안만드는 사람이랍니다. 그니까 님은 2번이어요
새벽별님/학회 가면 저랑 놀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