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전을 어느 정도 믿는 편이다. 아버님이 대머리셨기에 나도 혹시, 하는 공포감에 시달리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런 것도 유전이 되는 줄은 미처 몰랐다.
몇 년 전, 우리 사돈댁, 그러니까 누나의 시아버님이 말을 타다 떨어져 다리가 부러진 적이 있다. 그것 때문에 고생을 좀 하셨는데, 아까 리뷰나 한편 쓸까 하는 찰나에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나의 셋째 아들이 신갈에 있는 승마장에 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쳤다는 것. 일단 응급처치는 했는데 미덥지가 않아 강남성모병원 응급실로 가고 있단다.
가서 보니까 뭐 그리 심하게 다친 것은 아니었다. 입술이 좀 찢어지고, 머리에는 큰 혹이 났으며 그 예쁜 얼굴에 상처자국이 났지만, 생명에는 하등 지장이 없어 다행이었다. 누나의 목격담에 의하면 말에서 떨어지고 나서 말에게 밟힌 것 같다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매형 빽으로 성형외과 선생을 불러왔고, 그 선생은 아주 친절하게 처치를 해주었다. 입술을 몇바늘 꿰맸고, 얼굴 상처에는 반창고를 붙여 줬다. 애가 다쳤을 경우 처음에 중요한 것은 생명에 지장이 없도록 조치를 하는 것이지만, 그 뒤에 할 일은 성형외과 의사에게 진찰을 받는 것이다. 입술의 상처에 모래가 들어갔으면 빼줘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면 나중에 점으로 남고, 찢어진 입술을 꿰매지 않으면 벌어진 채로 상처가 아문다. 미용이 중요한 시대이니 불러서 조언을 듣는 게 필요한 것 같다.
울고 있는 조카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나: 말이 밟고 지나갔니?
조카: (고개를 흔든다)
나: 큰일날 뻔했다. 말이 밟았으면 삼촌 얼굴처럼 된다.
조카: (놀란 얼굴로 날 쳐다본다)
순간 어떤 환영이 떠올랐다. 나도 어릴 적 말을 탔던 것 같고, 떨어진 기억도 어렴풋이 난다. 내 얼굴을 밟고가는 말, 절규하는 엄마의 얼굴.... 엄마가 그런 얘기를 안하는 걸로 보아 단순히 환영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면 넷이나 되는 형제자매 중 내 얼굴만 이렇게 생겼을 리가 없잖아?
확실히 강남성모병원은 빽이 잘 통한다. 매형이 중국에 출장 중이라 “저...xx 선생 아들이 다쳐서요”라고 했더니 성형외과 레지던트가 둘씩이나 와서 인사를 한다. 그걸 보면서 놀랐다. 동숭동에 있는 S 병원은 그런 게 전혀 없다. “저 xxxx년에 졸업한 사람인데요”라고 말을 해도, 한참 후배일 인턴-혹은 레지던트-는 이렇게 반문해 사람을 무안하게 한다.
“그런데요?”
그런데요라니. 좀 잘 봐 달란 뜻인 걸 몰라서 묻냐? 친한 후배 하나는 노골적으로 이런다. “피곤하게 근무하는데 선배라고 밝히면서 잘봐달라고 하면 거부감이 생긴다”고. 한 학년의 족수가 많아서 그런지 우리 학교 애들은 선후배간의 친밀도가 극도로 낮다. 하기사, 같은 학년 애들끼리도 말을 안해본 사람이 꽤 되는 터에, 선후배까지 챙길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그렇지, 선배라고 밝히면 좀 잘해주면 안되나? 자기들도 그 병원에 천년만년 있는 게 아닐테고, 나중에 나처럼 아쉬운 소리를 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냥, 그게 좀 부러웠다. 빽이 있건 없건 아이가 다친 경우라면 성형외과 선생들이 친절하게 치료해 주면 더 좋겠지만.
* 우리 조카의 치료가 다 끝나갈 무렵, 젊은 여인 둘이 응급실에 왔다. 그 중 한명은 한눈에 보기에도 두들겨 맞은 티가 역력했다. 아직도 그런 놈이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