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일 좋아하는 술은 소주다. 맥주는 먹으면 배가 나와서 싫고, 백세주는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를 않는다. 소주 때문에 사고를 친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맑게 빛나고 도수도 어느 정도 되는 소주가 없었다면 내 음주생활은 꽤 황량했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양주를 마실 기회가 점점 많아진다. 양주. 미국 술. 소주보다 독해 40도쯤 되는 술. 결정적으로, 비싼 술. 사실 난 양주 맛을 잘 모른다. 소주가 당길 때는 수없이 많아도, 양주를 먹고 싶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그래도 내가 양주를 시킬 때가 있다면, 술집의 특성상 양주를 시켜야만 할 때, 혹은 양주를 시켜놓고 폼을 잡고자 할 때이다. 사람들은 양주가 뒤끝이 좋다고 하던데, 난 잘 모르겠다. 양주를 먹고 난 다음날, 상쾌감보다는 폭탄을 맞은 기분이 앞선다.


그렇긴 해도, 혼자 술을 마실 때는 양주가 제격이다. 소주를 혼자 마시고 있으면 처량하지만, 양주를 마시는 모습을 거울로 보면 꽤 운치가 있어 보인다. 고독함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하고. 터무니없이 비싼 술임에도 양주를 마시는 이유는 그런 분위기 탓이 아닐까.


96년으로 기억한다. 그 해에 아버님은 지병으로 인해 두달 가량 병원에 입원해 계셨다. 다른 아들 같으면 병원에 찾아가 어머니 대신 간병도 하고 그러겠지만, 나란 놈은 그 틈을 타서 아버님이 아끼던 양주를 작살냈다. 양주를 그다지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뭔가에 홀렸던지. 아버님의 광에는 좋은 술이 많았고, 난 매일같이 친구를 불러 그 술들을 마셨다. 나중에 아버님이 퇴원하시고 난 뒤, 매우 당연한 일이지만 난 아버님께 무지하게 혼이 났다. “니가 인간이냐”는 말까지 들었는데, 그런 말을 들어도 쌌다. 건강이 악화된 아버님은 결국 그 술들을 못드신 채 돌아가셨고, 그때까지 남은 술은 다 내가 먹어치웠다.


얼마 전, 아버님이 술을 보관하시던 광을 열어봤다. 이럴 수가. 거기에는 술이 가득 들어 있다. 술자리에서 남은 술들을 알뜰하게 집어왔던 게 모인 거다. 지도학생들에게서 받은, 3분의 1쯤 남은 XO, 친구랑 먹다가 남긴 섬씽, 반쯤 남은 스카치블루, 가정용 발랜타인, 산사춘 새거 한병....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른다. 그걸 보면서 난 ‘저걸 언제 날잡아서 다 먹어치워야겠다’라고 낮게 탄식했다. 한가지 다행인 건 나한테는 나같은 망나니 아들이 없어서 저 술에 손을 댈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보고만 있어도 배부른 것, 그건 바로 광에 놓인 술이리라.


* 근데 내가 양주를 싫어하는 거 맞긴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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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2005-02-07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가 인간이냐'
하느님의 지엄하신 말씀같습니다.
마태우스님의 술이야기속에 존재론과 인간학이 다 숨어있군요.
현존하는 한국의 酒仙이십니다. ㅎㅎㅎ

책읽어주는홍퀸 2005-02-07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잼있네요..소문대로..ㅋ 아,안녕하세요..알라딘에 마태우스님이 잼있다고 q하라는 친구의 권유로 얼마전에 q하구 일케 첫인사드립니다요~ 그럼 또 놀러올께요~^^

하이드 2005-02-07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소주. 보드카. 와인. 양주는 별로. 특히나 맨날 어디 나갈때마다 술심부름( 양주 사오기) 했던지라, 면세가격에 빠삭했던 저로서는 술집에서 보는 양주의 가격에 그저 웃지요. 였다구요.

날개 2005-02-07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 옆지기가 젊었을때, 어머님이 담가서 특별한 날에 쓰려고 꼭꼭 숨겨놓으신 술을 친구들을 몰고와 다 먹었다가 무지 혼난 경헙이 있다 하더니...... 아들은 원래 그런가요? ^^

마태우스 2005-02-08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우님/그, 그때는....맥주 계속 먹으면 배부르니까....그리고 거긴 양주가 싸니까...글구 따우님과 상대하려면 독한 걸로 해야 하니까......삐지지 마세요! 흑
겨울빛님/술에 취하면 좋은 게 아니라요, 술을 마시는 그 분위기가 좋습니다. 좋은 친구들과 마실 때는 특히 더 좋아요. 전 슬플 때는 술을 잘 안마시려고 해요. 그럴 때 마시면 더 우울해지거든요. 제가 인사한 적 있던가요? 잘 부탁합니다, 마태우습니다.
날개님/아들은 원래 그런 게 아니라요, 저랑 님의 옆지기만 그런 거예요.
하이드님/양주만 못드신단 얘기죠? 전 와인 못먹어요. 과일을 원래 못먹어서 그런지 와인까지....술집에서 파는 양주 너무 비싸요!
갈색빵님/그 친구분 참 훌륭한 분이네요!! 안녕하세요 갈색빵님.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q'이 뭐예요??
니르바나님/전 주선이 될 자격이 없어요. 최소한 다섯병은 먹어야 주선이 되죠. 전 겨우 두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