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리가 우울하단다. 왜 그런 걸까? 마흔을 목전에 둬서? 아니면 학교에서 잘릴까봐? 그 어느 것이 진짜 이유건간에, 내 분신인 부리가 우울하다니 나까지 우울해진다. 무릇 슬픔이란 건 전염력이 뛰어난 법이니까.


난 술을 기분좋게 마시려고 하는 편이다. 울적할 때 술 생각이 더 나긴 하지만, 그럴 때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지기만 하고, 술을 과도하게 먹게 되어 다음날까지 지장을 초래하니까. 그래서 난 우울증이 전염된 지난 월요일부터 술을 먹지 않은 채 집에 일찍 들어갔다. 여친용 전화만 켜놓고 내가 주로 받는 전화를 꺼놓은 것은 술을 먹지 않겠다는 내 의지의 표현이었다 (친구가 그 전화로 전화할까봐). 술을 안마시는 대신 난 책을 집어들었다. 사놓고 읽지 않은 책 중 스티븐 킹의 <그것>이 눈에 들어온다. 마냐님의 리뷰를 읽고 주문한 책이다. 책값이 만만치 않아 불평하기도 했지만 막상 배달되고 나자 엄청난 두께에 놀랐던 책. 그나마도 세권이나 되어 읽을 엄두를 내지 못했던 책.


난 스티븐 킹과 그다지 인연이 깊지 않다. 그의 소설을 딱 두권-<미드나이트 시즌>, <내 영혼의 아틀란티스>-읽어봤지만, 그 책들은 내가 그에게서 바랐던 것을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난 그를 호러 작가 쯤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의 책들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으니까. 소설적 재미가 있다는 건 인정해도, 더 큰 재미를 주는 작가들의 책을 읽는 것만도 버겁다, 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마냐님의 리뷰는 다시 한번 그와 접할 기회를 내게 줬다. “..상권 초반엔 너무 섬뜩섬뜩하여 밤에도 못 읽었지만, 그 이후엔 아예 책을 손에서 놓지를 못해 앉으나 서나, 걸어다니나 잠들기 직전이나 한달음에 읽었다. 공포물은 질색인데, 스티븐 킹이라는 작가의 마력 앞에서는 별 수 없었다”


월요일부터, 난 이 책에 빠져서 살았다. 처음에는 출퇴근 시간과 퇴근 후에만 읽다가, 오늘부터는 아예 근무시간까지 읽고 있다. 도무지 궁금해서 책을 놓을 수 없도록 만드는 책을 오랜만에 만나본 것 같다. 그간 깨닫지 못했던 스티븐 킹의 흡인력을 드디어 알아차리게 만든 책, 난 지금 상중하 중에서 중권 절반을 읽고 있는데, 잘하면 내일까지는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의 우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 자신이 책 속의 인물이 된 듯 살고 있다. 꺼놓은 휴대폰 벨소리가 수시로 울리는 듯하고, TV에서 누군가가 나와서 나를 잡아갈 것 같고... 우울증을 떨쳐 내기에는 딱 좋은 책인 것 같지만,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닌가보다. 어떤 분의 리뷰다. “...읽는 내내 정말...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 댓글, “저두 무척 기대하구 샀는데 전혀 무섭지도 않고 재미도 좀 마니 없고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고 해서 중권까지 읽다 말았습니다”


이분들의 댓글을 읽고보니 스티븐 킹의 책들 중 우리나라에서 뭐 그렇게 베스트셀러가 된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대통령..> 어쩌고 하는 허접한 책에도 리뷰가 스무개 넘게 달리는 판에, <그것>에 올라간 리뷰는 단 네편. 왜 그는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없는 걸까. 우리나라가 그의 소설보다 훨씬 더 무서운 곳이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유영철의 사례도 그렇고, 엊그제 일어난 지하철 방화사건도 그렇지만,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사건들이 이 땅에서는 다반사로 일어난다. 밀양에서는 40명의 고교생이 여중생을 집단 성폭행했고, 니르바나님이 올린 글에 의하면 살아있는 강아지를 쓰레기봉투에 넣어서 버린 사람이 있단다. 이런 판국에 스티븐 킹의 소설이 뭐 그리 대단하겠는가.


책과는 관계 없는 얘기 하나. 주위 사람들에게 질문을 해봤다. “호러작가의 대명사인 스티븐 킹은 <그것>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의 (영어) 원제는 무엇일까요?”

원제는 당연히 지만, 내가 기대한 답은 이런 거였다. “미저리요!” 설마, 책 제목이 ‘그것’이라고 생각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주위 사람의 답은 그보다 황당했다.

사람 1: This 요!

나: 디, 디스? 그건 ‘이것’이잖아!

사람 1: 그럼 that인가?

나: 그건 ‘저것’이지!

사람 1: 그럼 ‘그것’은 뭐지?

나: It 잖아!

사람 1: 까먹을 수도 있지 뭐!


사람 1이 특별한 줄 알고 다른 사람에게 물어봤다.

사람 2: That 아니니?

나: 그건 ‘저것’이잖아!

사람 2: This 인가?

나: It 야, It!


역시 뭐든지 안쓰면 까먹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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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1-05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티븐 킹의 '윈스턴 처칠 고양이'한권짜리 얇은 책인데, 전 그 책을 환한 대낮에 강의실 같이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만 꺼내 읽었다지요. 진짜진짜 무서운 경험이었어요.

마냐 2005-01-05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히히....역시 마태님밖에 없어요...'공감'이 고맙다니까요...

2005-01-05 1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weetmagic 2005-01-05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panda78 2005-01-05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전 황금가지 판이 아닌 걸로 읽어서 그런가,, 무지 지겨웠어요... 언제 황금가지판으로 다시 읽어봐야지.. 쩝.

2005-01-06 0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우맘 2005-01-06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다...흑흑....미안해... 그래도 그 책 짝맞춰 구하느라 무지 고생했는데. 황금가지에서 떡하니 나오니, 허무하기까지 하더군. 사실 나도 아직 안 읽었는데..새로 살까나?^^;;

그리고 역시...마태님이랑 저는 취향이 매우 상반된다니까요. 미드나이트 시즌이랑 내 영혼의 아틀란티스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책 best 10 안에 드는 것들인데. ㅎㅎㅎ

마태우스 2005-01-06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우리가 맨날 다투는 이유가 취향이 상반되기 때문이군요. <브리짓 존스>를 비롯해서 영화에서도 별로 취향이 안맞았던 기억이...

판다님/판다님도 저랑 취향이 다르다니, 안되겠어요. 언제 우리 술로 한판 붙어요^^

매직님/아 저 살인미소!!

마냐님/앞으로 마냐님 추천하시는 책은 넙죽넙죽 읽으렵니다. 취향 맞는 분을 찾아서 기쁩니다.

하이드님/흐음, 무서운 걸 좋아하는데, 한번 읽어봐야 겠군요. 킥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