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12월 18일(토)

누구와: 친구와

마신 양: 맥주, 기본은 했다.


토요일은 술을 안마시는 날이었다. 그런데 내 친구가 전화를 했다. 1차를 마치고 2차를 가는 중인데, 갑자기 내가 보고 싶다고. 그의 부름이라면 난 언제든지 나갈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그와 술을 마심으로써 그날 오후에 6킬로를 뛰었던 것은 무효가 된 것 같다^^그날 친구에게 했던 말을 정리한다.


기억이란 영원한 게 아니라, 사람의 머리 속에서 가공되기 마련이다. 더없이 고통스러웠던 기억도 낭만적인 추억으로 승화될 수 있으며, 살아가면서 수많은 고통을 겪음에도 인간이 별탈없이 세상을 사는 것도 다 그 덕분이다.


올 여름이 시작하기 전, 언론에서는 10년만의 무더위가 닥친다고 했다. 실제로 올 여름은 더웠지만,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94년보다 더 더웠다” 정도는 아니었다. 통계상으로 볼 때 94년에는 7월의 31일 중 23일에서 밤에 30도 이상으로 올라가는 열대야가 기록되었는데, 올 7월에는 불과 사흘만 열대야가 있었다. 평균온도 같은 걸 따져봤을 때도 올 여름은 예년과 비슷하거나 약간 더운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94년보다 올해가 더 더웠다고 생각한다. 왜? 94년의 더위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이미 잊혀졌으니까. 아주 먼 과거에 있었던 10만큼의 고통은 눈앞에 닥친 3 정도의 고통을 이길 수 없으니까.


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우리의 기준은 “IMF 때”가 되어 버렸다. 경제가 조금만 어려우면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렵다”는 말을 한다. 언론도 그렇게 보도를 하고, 만나는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말한다. 과연 그럴까. 6.25 이후의 최대 국난이라던, 그렇게 우리 국민들을 고통스럽게 했던 IMF의 충격은 벌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걸까. 어느 택시기사는 말한다.

“그때는 봄날이었지요”

외환위기 직후에 대학로에 길게 늘어선 빈택시의 행렬을 난 똑똑히 기억한다. 밤 11시 반을 넘으면 택시에 합승이라도 하기가 어려웠던 대학로에서, 밤 12시건 1시건 아무 때나 택시가 잡히는 건 신기한 경험이었다. IMF, 미셀 캉드쉬, 우리에게 생소한 그 단어들과 더불어 찾아온 외환위기가 우리 사회에 미친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 사태로 인해 내수는 얼어붙었고, 고금리와 긴축이라는 IMF의 잘못된 처방은 수많은 기업을 도산시켰다. 실업률은 10%로 치달았고, 길거리는 노숙자의 행렬로 가득찼다. 우리 경제는 유사 이래 처음으로 -8%의 후퇴를 경험한다. 2-3% 선이긴 해도 플러스 성장을 하고, 무역수지 흑자가 연 200억불에 달하는 현 상황을 외환위기 때와 비교하는 건 넌센스로 보인다.


하지만 그런 경제지표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외환위기 때보다 지금이 더 어렵다고 믿는다. 외환위기의 기억은 이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낭만화되었으니까. 그것만이 이유의 전부일까. 아니다. 우리 언론들이 그런 상황을 부추기는 것도 지금이 더 어렵다고 믿는 한가지 요인이다. 외환위기보다 어렵다는 말이 처음 나온 게 2001년부터고, 그 전에도 “외환위기보다 더한 사태가 온다”고 언론들이 공공연한 협박을 했던 걸 보면 “IMF보다 더 어렵다”는 말은 상황을 과장한 정치적 수사라는 생각이 든다. “경제가 나빠야 한나라당에 좋다”고 말했던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의 발언을 상기한다면, 경제 상황을 부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득을 보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을거다 (한나라당과 조선일보가 많은 수요창출을 해낼, 다시 말해 뉴딜 정책에 해당하는 행정수도 이전을 반대한 걸 보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외환위기보다 안좋다는 게 과장이라 해도, 지금 경제가 위기라는 데는 전적으로 동의하고, 지표상으로는 좋다해도 사람들이 체감하는 경기가 그보다 훨씬 나쁘다는 점에도 공감한다. 이렇게 된 이유가 뭘까. 최근 읽은 책에 의하면 우리 언론들이 신봉해 마지않는 글로벌 스탠더드가 문제란다. 우리나라처럼 성장이 더 필요한 나라에서 기업들에게 200%의 부채비율을 요구하고, 은행들에게도 BIS 기준-8%인가?-의 준수를 따르라고 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다. 그러니 기업은 현금을 쌓아놓을 생각만 하고, 은행들 역시 기업대출보다 가계대출을 더 선호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외환위기 이전보다 투자가 30% 이상 줄어들어 버렸다. 평생고용이 무너지고 비정규직이 전체의 절반가량 되는 상황에서 내수 활성화를 기대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떤 의도를 가진 언론들을 쫓아 “경제가 어렵다 어렵다”를 앵무새처럼 외치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을지 지혜를 모으는 것이 아닐런지? 외환위기보다 더 어렵다는 걸 밤낮 떠든다고 경제는 나아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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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12-20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행 수수료율은 사상최고치인 7조원의 순이익을 냈다고 하더군요. 국민들의 저축율은 물론, 사상최저치이지요...그 차액이 몽땅 외국인들의 주머니로 넘어가는 이 현실이 무지하게 갑갑합니다.

엔리꼬 2004-12-20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제가 평소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정확히 제대로 써주셨군요. (물론 부채비율이니 뭐니 그런건 모르지만..) 저도 이러한 '단군이래 최대불황' 운운에는 뭔가 숨은 의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기억력 망각도 한 몫을 한다고 보고요... 자알 읽었습니다.

2004-12-20 17: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12-20 17: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12-21 2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4-12-21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림님/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거 사실 반론이 많을 걸 각오하고 쓴 글이거든요...

여우님/우리 것들을 너무 외국에 많이 판 결과겠지요... 시대상황이 어려웠을지라도 좀 성급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니르바나 2004-12-23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억이 아름답기는 해도 부정확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초등학교 교정에 가 보세요. 한 명도 예외없이 좁아터진 운동장과 주변의 적당한 크기로 서있는 나무들에서 자신의 기억이 터무니없이 과장되고 있음을 깨달을 겁니다. 우리의 몸만큼 기억의 총량도 자라나고 있지요. 범부들은 이것을 잊고, 똑똑하신 분들은 이것을 이용하는 차이가 존재할 뿐이지요. 경제전문가 마태우스님의 고견에 동의합니다.